소사신앙촌과 밀실을 거쳐 승리제단에 오기까지

나는 1939년에 태어났다. 내 위로 오빠가 하나 있고 동생이 셋이 있다. 딸로서는 큰딸이다.

우리집은 인천 소래였는데 옛날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살았다.

부모님과 나는 인천에서 교회를 다녔는데, 어머니는 막내를 출산할 때 아이가 잘 안 나와서 제왕절개수술을 하였고, 그때 봉합 수술이 잘못되어서 그 후유증으로 계속 몸이 아프셨다. 어머니의 아픈 모습을 보고 어머니의 건강이 안타까워 하나님께 건강을 달라고 기도를 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어머니는 아픈 몸으로 교회에 열심히 다니셨지만 몸이 좋아지지는 않았다. 궁핍한 삶이라 수술을 할 수도 없었다

어머니가 박태선 장로를 만난 후 신앙촌에 입주

노구산 집회
1958년 6월 30일 노구산 전체를 가득메운 박태선 장로님의 집회 인파

한편 1955년부터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님의 은혜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박장로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의 소문이 어머니의 귀에도 들리게 되어 어머니는 병을 나으려고 박 장로의 집회에 쫓아다니게 되었다.

박 장로님이 서울 한강에서 집회를 하면 한강 백사장으로 달려갔고, 남산에서 집회를 하면 남산으로 달려갔고, 노구산에서 집회를 하면 노구산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박태선 장로를 따라다녔지만 어머니의 병이 완쾌되지는 않았다.

어머니를 따라 신앙생활하며 박태선 장로님의 은혜를 체험

내가 박 장로님을 만나게 된 때는 내 나이 17살이었다. 나는 어머니를 따라서 박태선 장로님의 집회에 가게 되었는데 그 집회에서 하나님의 향취도 맡는 등 여러 가지 은혜 체험을 하였다. 당시 박 장로님은 집회에 온 사람들에게 머리에 안찰을 해주셨는데 서로 먼저 안찰을 받으려고 다투었다. 나도 머리 안찰을 받았는데, 안찰을 받으면 은혜가 왔다. 하루는 박 장로님이 머리 안찰을 해주신 후 저만치 가시더니 또 다시 오셔서 한 번 더 안찰을 해주신 적이 있다. 너무너무 감사했다.

박태선 장로님의 집회 분위기

박 장로님의 집회에는 한번 앉으면 그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몰랐다. 너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고로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서면 그 자리를 뺏기게 되었다.

박 장로님을 따르는 사람들 중 몇몇이 짠지공장을 하던 곳에 전도관을 세웠다. 어머니와 나는 그곳으로 가끔 예배를 보러 다녔고, 나중에는 그곳에 인천제단이 세워졌고, 박태선 장로님은 토요일마다 새벽에 오셔서 예배를 보셨다.

전답을 팔아 신앙촌으로 들어가 신앙촌 건설에 동참

당시 박태선 장로로부터 불성신을 받은 어르신이 인천제단에 한 분 계셨는데 그분이 하나님께서 신앙촌으로 들어가라고 하신다고 하여 우리 가족도 소사신앙촌에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전답을 팔아 소사신앙촌으로 들어갔고, 그때는 신앙촌을 건설할 때라 나도 건설대원이 되어서 신앙촌 건설 노동을 하였다.

나는 몸이 허약한 편이라 건설대에 갔더니 여러 사람들이 너같이 약한 사람은 여기서 못 견딘다면서 핀잔을 주기에 어디 한 번 해보고 그런 말을 하라고 하여 삽을 들고 땅을 파고, 질통을 지고 흙을 퍼 날랐다. 하나님의 성신의 힘으로 약골인 나도 힘든 노동을 이겨내며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소사 신앙촌 건설
소사신앙촌 오만제단 건설당시, 산꼭대기에서 돌을 깨면 이어받기로 산 밑까지 옮기고 있는 모습

신앙촌은 순전히 사람의 노동으로 지어진 집들이다. 모두 사람 손과 발을 이용하여 지은 것이다. 수많은 신앙인들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기 위하여 모여들었고, 그들은 손과 발을 이용하여 사람 키로 두 길이나 파서 주춧돌과 구들장을 놓고 집을 지었다. 퍼낸 흙과 돌을 머리에 이고 날랐다. 신앙촌 형제들이 머리에 돌을 이고 가는 개미떼 같은 모습은 정말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신앙촌 건설대에는 대학생들이 많았다. 영모님은 매일 아침 건설대원들을 모아놓고 힘을 주시는 말씀과 안수를 해주셨다. 그들은 신앙의 힘으로 힘든걸 모두 이기고 신앙촌 건설을 열심히하였다.

건설대에는 무보수로 일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가산을 정리하고 들어 온 우리집 같은 경우에는 약간의 돈을 받아서 밥을 해먹고 살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지은 집 중 씨디(CD)동에 입주할 수 있었다. 물론 공짜가 아니라 전답을 팔아서 구입한 것이다.

그러다가 영모님께서 이승만 정권에 의하여 구속되자 건설대원들 중 학생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다 뿔뿔이 흩어져서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영모님이 구속되자 신앙촌 식구들도 많이 흔들리게 되었고, 나는 먹고 살기 위해서 미싱을 가지고 자수(刺繡)를 놓았다. 당시 신앙촌 수(繡)는 인기가 좋았다.

어머니가 마귀취급을 받게되자 가족 전체가 마귀취급을 받아

나의 어머니는 열심쟁이였다. 어머니는 박태선 장로님을 지극정성으로 믿었다. 예배를 보러 오만제단에도 새벽같이 일어나서 제일 먼저 가서 앞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찬송하며 손뼉을 쳤다.

예배가 끝나면 박 장로님에게 인사하러 부리나케 박 장로님 타신 자동차로 달려가서 인사를 드렸다. 어머니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셔서 그런지 신령한 꿈을 많이 꾸었던 모양이다. 영모님이 꿈에 나타나셔서 뭐라고 하셨다는 내용의 꿈을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곤 하였는데 그러다 보니 신앙촌 식구들에게 마귀라고 찍히게 되었다.

박태선장로를 믿는 신앙촌에서는 꿈이야기를 잘못하게 되면 마귀로 왕따시키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나의 어머니도 천사마귀가 들렸다고 사람들이 말을 하였다. 그래서 우리 가족들도 마귀가 되어버렸다. 우물가에 물을 뜨러 가면 마귀가 왔다고 멀리 피해버렸다. 물론 그러다 보니 물도 흡족하게 길어올 수 있어서 좋기는 했지만 어린 마음에 좀 마음이 안 좋았다.

홍업비 권사님과 친하셨던 어머니

홍권사님과 나의 어머니와는 서로 친하셨다. 어머니가 아침 일찍 오만제단에 올라가면 해와이긴자(홍업비권사)도 먼저 올라와서 제단 앞자리에서 예배를 보았다. 홍권사님은 자신을 마귀라고 끌어내니까 안내원들이 알아 차리기 전에 일찍 제단에 올라오셔서 몰래 예배를 보셨던 것이다. 나의 어머니도 그분과 똑같이 천사마귀라고 불리게되었다.

마귀취급을 받은 홍업비 권사님

두분다 하얀 한복을 입고 다니셨다. 영모님은 홍업비 권사님을 마귀라고하셨다. 주변 사람이 영모님에게 홍권사가 마귀라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마귀 같지 않고 신앙이 참 좋은 분이라고 말하니 영모님께서 그건 천사마귀가 들려서 그렇다고 하셨다. 그래서 홍권사님은 마귀는 마귀인데 천사마귀가 들린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세상에 별 놈의 마귀가 다 있지만 도대체 천사마귀가 뭔지 사람들은 홍권사님을 천사마귀라고 난리법석을쳤다. 심지어 홍권사님의 어머니까지도 마귀는 죽어야 한다면서 집안에 있는 쌀독에 쌀을 퍼다가 다락방에 감춰두었고, 출산한 작은 딸 산후조리를 돌보러 가서는 몇 날이고 오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자신의 딸이 기도 생활을 하기 전에는 집안일을 잘 도와주고, 효도를 다했는데 기도생활만 한다고 핍박을 많이 하셨던 모양이다. 신앙촌 식구들도 홍권사님이 기도하는 곳에 와서는 “신성한 신앙촌에서 빨리 나가라” 고 연탄재를 던지는가 하면 제단에서 예배를 못 보게 쫓아내었다.

영모님의 깊은 뜻은 비밀리에 해와이긴자를 생육하는 것

영모님께서 홍권사님을 천사마귀라고 하신 데에는 사실 깊은 뜻이 있었다.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 한없이 올라가다가 거의 다 자존심 마귀에 걸려서 넘어졌다. 영모님은 해와이긴자 후보자로 키우는 자신의 가지가 자존심 마귀에 걸려 떨어지지 않도록 누구도 모르게 연단을 시킨 것이었다.

홍권사님은 신앙촌 사람들이 천사마귀라고 손가락질을 하고, 핍박을 주고, 심지어 밥을 못 먹게 해서 굶을지라도, 그러한 시험과 핍박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사모하며 기도하여 결국 다 이겨내셨다. 그리고는 해와이긴자가 되신 것이다.

그러자 영모님이 나타나셔서 이제는 “다 끝났다. 저 아래에 가면 쌀집이 있는데 그곳에 가서 쌀을 갖다가 밥을 해먹어라” 라고 하여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밥을 해먹었다고 한다.

영모님의 깊은 뜻은 비밀리에 아담이긴자를 생육하는 것

해와이긴자가 되신 후 밀실에 가면 털보가 있을 테니 그 사람을 이긴자로 키우라는 꿈속에서 영모님의 명령을 받고 밀실에 가니 털보가 자신의 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었다. 그 털보는 전봉국 집사로 누가 닭장으로 쓰다 버린 곳을 거처 삼아 소사에 나가서 밥을 빌어다 먹고 살고 있었다. 해와이긴자는 눈비를 피하기 위하여 바위 밑에서 기도생활하며 전봉국 집사와 그 어머니를 이긴자로 키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봉국 집사와 어머니는 잘 이겨 나가다가 지고, 또 넘어지고 하여 이긴자로 장성하지는 못했다.

해와이긴자가 황무지와 다름없는 그곳 밀실에서 기도생활 하는 것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흉년이 들면 동냥을 받아 빌어먹고 살기도 힘들어 굶주림에 지쳐서 하나님께 울며불며 통곡하는 기도생활을 하셨던 것이다.

해와이긴자가 어머니를 밀실로 불러들였다

이렇게 밀실에서 이긴자를 키워 나가던 해와이긴자가 하루는 우리 집에 들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어머니를 밀실로 데려오라고 명령하시는데 해와이긴자가 집을 모른다고 대답하니 하나님께서 당신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고 하여 집앞까지 인도해 주셨다고 한다. 집앞에 해와이긴자가 당도하자 마침 어머니께서는 문을 열고 밖을 보셨고, 두 분이 자연히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해와이긴자를 따라 그 길로 밀실로 들어가셨고, 들어가신 후에는 집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전혀 잊어버리고 오직 해와이긴자가 인도하는 대로 기도생활을 하셨다고 한다.

영모님의 명령으로 밀실의 기도 공간이 만들어져

황무지와 같던 밀실이 그런대로 가옥의 형태를 갖게 된 것은 자유시장에 불이 났을 때 영모님께서 불타다 만 목재를 가져다가 밀실에 집을 지어 주라고 하신 것에 의한 것이었다. 그때 밀실은 눈비를 면할 수 있는 시설을 처음으로 갖게 되었고, 나름대로 기도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던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해와이긴자를 따라 밀실로 가셨다는 이야기만 들었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어머니가 안 오시기에 밀실을 찾아서 가게 되었고, 밀실에서 해와이긴자를 처음 만나 뵙게 되었다.

영모님에게서 받던 은혜를 체험하고 밀실로 들어가

해와이긴자를 처음 뵈올 때 그분의 눈이 어쩜 그렇게 맑고 깨끗한지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그런 눈을 가지고 계셨다. 물론 만나는 순간부터 영모님으로부터 받았던 향취 은혜가 오기에 이분이 영모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어머니를 따라 나도 밀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해와 이긴자는 나에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밀실로 들어오라고 하셨고, 지금 미싱을 가지고 수를 놓아서 먹고 사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하였더니 그 미싱까지 다 가지고 밀실에 들어와야 된다는 것이었다.

혀가 갈라 터질 정도로 기도만 하다

밀실에 들어오자 해와 이긴자는 다른 것 하지 말고 기도만 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도만 하였다. 자신의 생각이 돌아가는 것에다가 마귀의 이름을 붙여서 기도를 했다. 음란마귀 무저항, 미워하는 살인마귀 무저항, 관심의 음란마귀 무저항이라고 하여 한도 끝도 없는 무저항(無低坑)에 쓸어 넣는 기도를 하였다.

특히 “진탕만탕마귀 무저항” 기도를 많이 하였다. 다른 식구들도 이 기도를 많이 했다. 기도는 아주 큰 소리로 했는데 마귀의 세력이 어떻게 강하게 오는지 그 세력이 오면 머리에 무거운 것을 씌워놓은것 같았고, 그러한 상태가 몇 시간이 지나면 곧 죽을 것 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죽을힘을 다해 큰 소리로 기도를 하였다.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는지 혀가 빵꾸가 날 정도였고, 갈라터져서 피가 나고 그랬다.

해와이긴자는 사람의 마음 상태를 들여다 보는 능력자

내가 밀실에 들어가니까 학생들이 많았다. 해와이긴자는 그들에게도 기도를 하라고 시켰다. 그러다가 학생들이 약한 음란마귀에 진다고 하여 담대한 마음을 갖게 하려고 공동묘지를 돌게하였다. 밀실 주변에 공동묘지가 있었다. 담대한 마음을 가지라고 공동묘지를 한 바퀴 둘러서 오라고 하여 여러명이 같이 공동묘지를 돌았다. 그때 무서워서 울고 그런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그러면 해와이긴자는 그 사람을 콕 찍어서 야단을 치셨다. 그리고는 더욱 무서운 것을 행하게 하셨다.

해와이긴자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밥을 주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학생들이 많이 떨어져 나갔다.

김동분 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