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

김포읍에서 북쪽으로 포장된 국도를 따라 조금 가다 보면 서쪽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다시 좁은 농로를 따라 들판을 지나면 감정리에 들어선다.

거기 중구 봉산 나즈막한 야산 기슭을 타고 200여 세대가 웅기종기 모여 있는 구둣물 부락이 있다.

이 마을 입구쯤에 있는 조중봉(趙重峯)선생 사당을 지나면 좌측으로 l00m쯤 되는 곳에 40∼50년생 감나무 한 그루가 서있고 ‘다’ 자형 구조의 고옥이 한 채 있다.

바로 이 곳, 경기도 김포군 김포읍 감정리 구둣물 마을의 한 초가집이 온 인류에게 영생(永生)을 주러 온 조희성(曺熙星) 님의 생가인 것이다.

조희성님의 함자와 사주

이 사람은 1931년 8월 12일(음력 신미년 6월 28일 새벽 4시경), 농부이신 부친 조경남(曺慶男)과 모친 오지덕(吳只德) 사이에 9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증조부께서도 형제 두 분중 둘째였고, 조부와 부친께서도 둘째였고 이 사람대에 와서도 남자 5형제 중 두번째였으니, 4대를 계속해서 차자(次子)로 이어져 온 것이다.

*주:여기서 부터는 조희성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을 엮은 것임.

이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사람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외할아버지께 들어서 알고 있었다.

외가집이 부평 ‘덴말’이라는 동네에 있었는데, 어릴 적에 외갓집에 가면 외할아버지께서는 항상 어린 것을 업으시거나 손을 잡으시고 장능산 지름길을 다니시기 좋아하셨으며, 재미 있는 옛날 이야기와 필요한 세상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다.

그중에서도 “사람이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절대로 신세를 지지 말아야 한다. 어느 집에 가더라도 그냥 나오지 말고 엽전 한 닢이라도 놓고 나와야 한다.” 고 하시던 말씀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외할머니께서 “이 영감쟁이 매일 책만 들여다 보고 있으면 먹을 것이 나오느냐?”고 성화를 부리셔도 외할아버지께서는 대꾸하지 않고 여전히 책만 보며 잠자코 계시면서 언행을 흐트리지 않으셨다.

이것을 보면 참으로 우리 조상들은 성인(聖人)에 가까운 분들이셨다는 것을 알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이다는 인내천 사상을 주장하는 민족종교 천도교의 창시자 수운 최재우 선생의 동상

외할아버지께서는 책을 마차에 싣고 다니실 정도로 많은 서적을 보유하고 계셨으며 학문의 경지 또한 깊으셨는데, 이런 외할아버지께서 천도교인(天道敎人)이셨다는 것은 후에 가서야 알았다.

많은 이웃 주민에게서 칭송을 받으며 지내시던 외할아버지는 모처럼 다니러온 외손자를 애지중지하시고 같이 다니며 업어 주셨는데,

해질 무렵 집에 돌아오면 잡수시도록 마련된 석청(石淸: 옛날에는 아주 귀한 보약)을 아껴 두었다가 선반에서 꺼내어 어린 것에게 먹여 주시곤 하셨다.

그러시면서 “우리 희성(熙星)이가 장차 큰 일을 할 골상을 지녔어. 손에는 다이아몬드와 임금 왕자의 손금이 있고, 가슴에는 북두칠성에 해당하는 점이 있으니 큰 인물이 될 것이 틀림 없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시면서 “이 손금을 누구에게도 보여서는 안된다.”고 당부를 하시며 너무도 이 사람을 사랑해 주시고 귀여워해 주셨던 것이다.

모친께서 이 사람을 잉태하셨을 때 꾸셨던 태몽이 있는데, 다음은 모친에게서 들은 얘기이다.

조희성님이 태어나신 김포 감정리, 뒤로는 산이 병풍이 감싸는 듯 둘러 있고 앞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있는 지세

부평읍에서 서쪽으로 5리쯤 가면 계양산이 있는데, 이 산은 예로부터 명산으로서 많은 전설을 지니고 있는 산이다.

하루는 꿈에 계양산 정상에 올라 갔는데, 산봉우리가 셋이 있고 가운데 큰 봉우리의 정상에 우물이 하나 있었다.

거기 있는 맑은 물이 근원이 되어 옥수(玉水)같이 깨끗한 물이 끊임없이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마음 이 흡족하고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것에는 편편하고 넙적하게 생긴 바위가 하나 있고 그 위에는 깨끗한 물동이와 바가지가 놓여 있어서, 이 맑고 깨끗한 수정 같은 물을 바가지로 떠서 물동이에 가득 채워 놓으니, 어디선지 하얀 비둘기가 날아와 물동이 위에 앉아, 모친은 그대로 물동이를 이고 감정리 집으로 내려 왔다.

며칠 후에 다시 그 산을 올라가니 낮선 청년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저 쪽을 보라고 손가락질을 하였다.

그래서 가리키는 쪽을 쳐다보니 새하얀 옷으로 예쁘고 아름답게 치장한 처녀들이 30여명 줄을 지어 걸어 오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아름답고, 한편으로는 기이하기도 하여 그 청년에게 “저 처녀들은 무엇하는 사람들입니까?” 하고 물으니,

“당신을 하늘나라로 안내하기 위하여 환영나온 선녀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듣고 참으로 기분이 좋고 마음이 흡족함을 느끼며 산을 내려 왔다.

또 하루는 어느 동산에 올라 갔는데 큰 옥수수대가 둘 있고 잘 영글은 옥수수가 한 대에 한 개씩 열려 있었다.

옥수수를 모두 따 자루에 담으니 자루 두 개가 가득하여 그것을 또한 집으로 가지고 왔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꿈에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나타나 하시는 말씀이 장차 “이 아이가 태어나서 성공할 때까지 누구에게도 절대로 꿈에서 본 광경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래서 모친께서는 이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계시다가 이 사람이 밀실에서 연단을 받고 완성자가 되어 영생(永生)의 역사를 시작한 1981년도에 와서야 비로소 이 사람에게 말씀해 주셨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에게도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다.

구둣물마을 이야기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 한반도 중에서도 3면이 바다와 강으로 둘러싸인 김포

경기도의 북서쪽으로 가면 한강 하류와 임진강 하류가 만나는 한강(漢江) 하구언이 있다. 김포읍에서 서쪽으로 1차선 좁은 도로를 따라 2 Km쯤 가면 감정리(次井里)라는 큰 마을이 나오는데 이 마을은 내옹, 외옹, 구둣물, 나진교, 독작골이라고 불리우는 5개 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부락 중 구둣물이라고 불리우는 동네는 아흡 구(九)자에다 머리 두(頭)자를 써서 구둣물인데, 이는 감정리 내 에 장릉이라는 왕릉(王陵) (조선조 인조(1623∼1649) 부친의 묘)이 있어, 이 능(陵)을 중심으로 사방 팔방으로 돌아가면서 우물 아흡 개를 팠는데 그 아흡 우물 중 가장 처음 팠다 하여 ‘구두(九頭)물’이라고 하였다.

중봉 조헌 선생의 영정

지금도 그 우물터가 있으며, 이 마을을 ‘구둣물 동네’ 또는 ‘구둔말’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 마을 한 가운데에는 약 100여 평 되는 사당이 있는데, 이 사당은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 10호로서, 약 500년 전인 선조 때의 사람, 조중봉(호: 조헌) 선생이라는 분의 사당이다.

그는 시의 학자요, 예언가요, 장수로서 축지법을 써서 지맥을 이용하여 땅을 주름잡아 먼 길을 빨리갈 수 있는 능력을 행하던 분이요, 수많은 마을 사람들에게 인격과 덕망을 끼쳐 추앙을 받던 이 지방의 유지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왜놈들이 조선 땅을 점령하기 위하여 정탐군을 보냈는데, 그 중 한 정탐군이 이 마을까지 오게 되었다.

조중봉선생은 이때 초가 지붕을 이을려고 이엉을 엮고 있었다. 이때 정탐꾼이 와서 신분을 속이고 “이 마을에 조중봉 선생 댁이 어디 입니까?” 하고 물으니 선생은 그가 왜놈의 정탐군인 줄 미리 아시고 “저기 저 산 너머에 있다. “고 말하였다. 정탐군은 고맙다고 인사하고 나서 산고개를 향하여 아무리 열심히 걷고 걸어도 그 자리가 그 자리였다.

정탐군은 순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 있어 “선생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목숨만 살려주시고 무사히 돌아가게만 해 주세요.” 하고 백배사죄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조헌 선생이 도술을 행한다는 소문을 듣고 사실을 확인하러 왔는데 땅을 주름잡는 조헌 선생의 도술을 직접 대하게 되자 질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헌 선생은 이 정탐군을 죽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다가오는 국난을 어떻게 해서든지 막고 싶은 일념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소리쳤다. “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이 곳까지 와서 정탐을 하려느냐? 당장 그만 두고 너희 나라로 떠나가라. ” “그리고 본국에 돌아가거든 풍신수길에게 이렇게 전하라.

조선 땅에 이 조헌이가 살아 있는 한 감히 조선 땅을 침범할 수 없다.” “내가 왜놈들을 요절을 낼 것이라고, 알겠느냐 ! ” 하니 “예, 꼭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나으리.” 하며 정탐군은 식은 땀을 닦으면서 도망치듯 그 곳을 물러갔다.

선생께서는 임진왜란이 있기 십여 년 전부터 미리 앞 일을 내다보시고 당시 조정에다 왜놈들이 우리 조선을 침략하게 될 것이니 하루 바삐 양병(養兵)을 하여 적의 공격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쓸데없는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백성들을 혼란케 한다는 죄목을 씌워 함경도 길주로 귀양을 보냈다.

선생은 귀양에서 돌아와 다시 상소를 올리니 이번에는 충청도 옥천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왜놈이 쳐들어와 난리가 터질 날이 가까와지니 조중봉 선생은 사비(私費)로 청년들을 모아 무술을 가르치며 의병을 양성하여 왜란에 대비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조헌과 700여 의병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금산전투의 가상화

임진왜란 당시 조헌과 700여 의병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금산전투의 가상화

이윽고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생은 의병을 거느리고 몰려오는 왜군과 더불어 치열한 전투를 하여 청주성을 탈환하는 등 많은 전공 (戰功)을 세우며 여러 고을을 왜놈들의 손아귀에서 건져내셨다.

그러나 밀려오는 왜군을 막아내기엔 의병의 수가 너무 적으므로 금산까지 후퇴를 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셨다. 활을 너무 많이 쏘아 손톱이 다 빠져 버리니 발로 쏘아 열 발톱이 다 빠지도록 싸우다가 임진년 8월 18일에 49세의 젊은 나이로 금산에서 700여 의사(義士)와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지금도 그 사당에 가보면 조중봉선생의 영정과 함께 비문이 있다. 이 서원은 조선 선조때 학자이며, 의병장 중봉 조헌(1544∼1592) 선생의 학문과 충성심을 추모하기 위하여 인조 26년 (1648)에 창건되었으며, 숙종 원년 (1675)에 사액되었다. 이 동네에 살고 있는 이한철(61세) 씨의 말에 의하면 조헌 선생이 태어나신 생가 장소에 사당이 지어졌다고 하며,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돌아가신 음력 8월 18일을 기하여 매년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우리 마을에 이런 위대한 인물이 났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 라고 그는 말한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은 동학의 대가라 불리우는 이민제 선생이 기록한 예언서에, 한강 하구언에서 진인(眞人), 정도령(正道令)인 나온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김포가 바로 한강이 바다와 마주쳐서 합류하는 한강 하구언인 것이다.

또한 조중봉 선생의 말씀에 의하면, “이 구둣물 마을에서 앞으로 세계를 구원할 큰 인물이 날 것인데 그 사람이 나타나면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하셨다고 어르신들께서 늘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예언의 말씀 그대로, 김포군 김포면 감정리, 바로 구둣물 마을에서 사람 몸이 죽지 않는 전무후무한 비결을 가르쳐주시며, 인간이 행복하고 보람되게 살 수 있는 바른 길을 제시해 주시는 정도령 조희성님이 태어나셨다는 것은 수천 년 전부터 숨기고 숨겨서 완성해 낸 하늘의 예정임에 틀림없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