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둣물마을 이야기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 한반도 중에서도 3면이 바다와 강으로 둘러싸인 김포

경기도의 북서쪽으로 가면 한강 하류와 임진강 하류가 만나는 한강(漢江) 하구언이 있다. 김포읍에서 서쪽으로 1차선 좁은 도로를 따라 2 Km쯤 가면 감정리(次井里)라는 큰 마을이 나오는데 이 마을은 내옹, 외옹, 구둣물, 나진교, 독작골이라고 불리우는 5개 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부락 중 구둣물이라고 불리우는 동네는 아흡 구(九)자에다 머리 두(頭)자를 써서 구둣물인데, 이는 감정리 내 에 장릉이라는 왕릉(王陵) (조선조 인조(1623∼1649) 부친의 묘)이 있어, 이 능(陵)을 중심으로 사방 팔방으로 돌아가면서 우물 아흡 개를 팠는데 그 아흡 우물 중 가장 처음 팠다 하여 ‘구두(九頭)물’이라고 하였다.

중봉 조헌 선생의 영정

지금도 그 우물터가 있으며, 이 마을을 ‘구둣물 동네’ 또는 ‘구둔말’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 마을 한 가운데에는 약 100여 평 되는 사당이 있는데, 이 사당은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 10호로서, 약 500년 전인 선조 때의 사람, 조중봉(호: 조헌) 선생이라는 분의 사당이다.

그는 시의 학자요, 예언가요, 장수로서 축지법을 써서 지맥을 이용하여 땅을 주름잡아 먼 길을 빨리갈 수 있는 능력을 행하던 분이요, 수많은 마을 사람들에게 인격과 덕망을 끼쳐 추앙을 받던 이 지방의 유지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왜놈들이 조선 땅을 점령하기 위하여 정탐군을 보냈는데, 그 중 한 정탐군이 이 마을까지 오게 되었다.

조중봉선생은 이때 초가 지붕을 이을려고 이엉을 엮고 있었다. 이때 정탐꾼이 와서 신분을 속이고 “이 마을에 조중봉 선생 댁이 어디 입니까?” 하고 물으니 선생은 그가 왜놈의 정탐군인 줄 미리 아시고 “저기 저 산 너머에 있다. “고 말하였다. 정탐군은 고맙다고 인사하고 나서 산고개를 향하여 아무리 열심히 걷고 걸어도 그 자리가 그 자리였다.

정탐군은 순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 있어 “선생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목숨만 살려주시고 무사히 돌아가게만 해 주세요.” 하고 백배사죄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조헌 선생이 도술을 행한다는 소문을 듣고 사실을 확인하러 왔는데 땅을 주름잡는 조헌 선생의 도술을 직접 대하게 되자 질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헌 선생은 이 정탐군을 죽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다가오는 국난을 어떻게 해서든지 막고 싶은 일념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소리쳤다. “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이 곳까지 와서 정탐을 하려느냐? 당장 그만 두고 너희 나라로 떠나가라. ” “그리고 본국에 돌아가거든 풍신수길에게 이렇게 전하라.

조선 땅에 이 조헌이가 살아 있는 한 감히 조선 땅을 침범할 수 없다.” “내가 왜놈들을 요절을 낼 것이라고, 알겠느냐 ! ” 하니 “예, 꼭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나으리.” 하며 정탐군은 식은 땀을 닦으면서 도망치듯 그 곳을 물러갔다.

선생께서는 임진왜란이 있기 십여 년 전부터 미리 앞 일을 내다보시고 당시 조정에다 왜놈들이 우리 조선을 침략하게 될 것이니 하루 바삐 양병(養兵)을 하여 적의 공격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쓸데없는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백성들을 혼란케 한다는 죄목을 씌워 함경도 길주로 귀양을 보냈다.

선생은 귀양에서 돌아와 다시 상소를 올리니 이번에는 충청도 옥천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왜놈이 쳐들어와 난리가 터질 날이 가까와지니 조중봉 선생은 사비(私費)로 청년들을 모아 무술을 가르치며 의병을 양성하여 왜란에 대비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조헌과 700여 의병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금산전투의 가상화

임진왜란 당시 조헌과 700여 의병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금산전투의 가상화

이윽고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생은 의병을 거느리고 몰려오는 왜군과 더불어 치열한 전투를 하여 청주성을 탈환하는 등 많은 전공 (戰功)을 세우며 여러 고을을 왜놈들의 손아귀에서 건져내셨다.

그러나 밀려오는 왜군을 막아내기엔 의병의 수가 너무 적으므로 금산까지 후퇴를 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셨다. 활을 너무 많이 쏘아 손톱이 다 빠져 버리니 발로 쏘아 열 발톱이 다 빠지도록 싸우다가 임진년 8월 18일에 49세의 젊은 나이로 금산에서 700여 의사(義士)와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지금도 그 사당에 가보면 조중봉선생의 영정과 함께 비문이 있다. 이 서원은 조선 선조때 학자이며, 의병장 중봉 조헌(1544∼1592) 선생의 학문과 충성심을 추모하기 위하여 인조 26년 (1648)에 창건되었으며, 숙종 원년 (1675)에 사액되었다. 이 동네에 살고 있는 이한철(61세) 씨의 말에 의하면 조헌 선생이 태어나신 생가 장소에 사당이 지어졌다고 하며,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돌아가신 음력 8월 18일을 기하여 매년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우리 마을에 이런 위대한 인물이 났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 라고 그는 말한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은 동학의 대가라 불리우는 이민제 선생이 기록한 예언서에, 한강 하구언에서 진인(眞人), 정도령(正道令)인 나온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김포가 바로 한강이 바다와 마주쳐서 합류하는 한강 하구언인 것이다.

또한 조중봉 선생의 말씀에 의하면, “이 구둣물 마을에서 앞으로 세계를 구원할 큰 인물이 날 것인데 그 사람이 나타나면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하셨다고 어르신들께서 늘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예언의 말씀 그대로, 김포군 김포면 감정리, 바로 구둣물 마을에서 사람 몸이 죽지 않는 전무후무한 비결을 가르쳐주시며, 인간이 행복하고 보람되게 살 수 있는 바른 길을 제시해 주시는 정도령 조희성님이 태어나셨다는 것은 수천 년 전부터 숨기고 숨겨서 완성해 낸 하늘의 예정임에 틀림없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