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군사혁명 이후 육군장교로서 그리고 전도사로서의 행적

군 영창에도 가고 재판도 받아

논산 훈련소에서 독도법 교관으로 있을 때 하루에 300명씩 이사람 앞에서 교육을 받았다. 교육을 일찍 끝내고 박태선장로와 전도관에 대한 진리 이야기를 하였다.

그런데 훈련받는 사람중에는 신학교 졸업생, 재학생 및 목사, 전도사였던 자가 있어 군종참모에게 연락이 되고 또 그 위의 높은 사람에게 이 사실이 보고되어 이 사람이 불려 가서 구두발로 정강이를 차이고 호된 따귀를 맞으며 주의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조금도 굴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신병교육중에 전도관 진리를 전도하니 군 영창에 집어넣고 재판까지 받게 하였다.

당시 낮에는 신병을 훈련시키며 전도하고 밤이면 마을 청년들을 모아 중고등학교 과정을 가르치면서 전도관을 개척하였다. 때로는 장교복을 입은 채 북을 치며 전도를 하니, 군 장교의 체면과 위신을 손상시키고 특정 종교를 전도한다하여 영창에 가두고 재판을 받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재판정에서 이 사람은 “국가 재건 최고회의 의장의 지휘 각서 0조 0항의 ‘모든 지도자 위치에 있는 군경(軍警)들은 주민들을 계몽, 교화하라’는 명령에 의하여 청년들을 교육시키고 교화한 것이 무슨 죄가 됩니까?”라고 스스로 변호하니 훈련소장이었던 백소장은 당황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이 사람을 무죄 판결하여 석방시켰다.

그때 이 사람을 구타하고 영창에 집어넣었던 기성교회 장로들인 중, 대령과 백소장은 혹시 이 일로 자기들의 신분이 위태로와지지 않을까 염려하여 이 사람에게 선물도 보내고 음식도 대접하려고 하였으나 이 사람은 같은 군인으로서 개인적인 앙갚음으로 선배 장교님들의 앞길을 가로막을 짓은 절대 하지 않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가는 곳곳마다 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개척

이 사람은 가는 곳곳마다 학교를 세우고 전도관을 세우고 틈만 있으면 전도를 하여 서울 시내에 안들어 간 집이 없을 정도였다. 논산에서도 낮에는 군영생활에서 군인들을 훈련시키고 퇴근하여 밤늦게까지 민간인 학생을 가르치는 것을 계속해 나가니까 잠잘 시간이 없을 정도였다.

잠을 제대로 못자므로 피곤이 겹쳐 어느 날은 늦잠을 자고 급히 서둘러서 출근하는 바람에 이부자리를 살펴보지 않고 나갔는데 전 날 밤 코피를 쏟아 베개가 온통 피범벅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이 사람이 5시가 되어 군무를 마치고 퇴근하여 10리 길을 구보로 뛰어 재건학교에 도착하니 전학생 2∼300명이 이 사람을 부등켜 안고 통곡을 하며 울먹였다.

이 사람이 “왜들 이러느냐? 무슨 일이라도 생겼느냐?”고 의아해서 물어보니 코피로 물들은 이 사람의 베개를 들고 와서 부등켜 안고 다시 우는 것이었다.

당시의 학생들 중에는 전쟁으로 부모를 잃어 공부를 못한 학생도 있지만 전란으로 어려워져서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불우한 학생들도 많이 있었다.

부모도 가르치지 못한 배움의 길을 돈 한 푼 받지 않고 가르치시는 선생님, 낮에는 군무에 시달리시고 밤에는 피곤하신 몸을 이끌고와 가르치시는 선생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어떠한 여건에서도 매일 군인선생님의 모든 개인 사정을 송두리채 버리시고 우리를 위하여 수고를 하시는 선생님, 너무도 힘드시어 코피를 흘리시면서도 저희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또 다시 강단에 서 주시는 선생님을 뵈올 때,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며 또한 선생님의 건강 사정이 너무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워 눈물이 흐른다고 하면서,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이 엉엉 소리내어 통곡바다를 이루는 것이었다.

상수중학교: 현 조양중학교

이런 위대한 선생님을 모신 것이 진정 가슴뿌듯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설사 우리를 죽음의 길로 끌고 간다 해도 선생님께서 가자시면 기꺼이 가겠다며 굳은 결심을 하는 것이었다. 그후 300명의 학생들이 배움에 더욱 열성적이고 적극적이 되었으며, 흙벽돌을 찍어 학교와 전도관 제단을 건축하는데 헌신적으로 협조하였다.

이후 금마일대에 전도의 불길이 일기 시작하여 제단이 크게 발전되었던 것이다. 당시 기성교회 황박사라는 목사가 부흥집회를 한다기에, 이 사람도 참석하였는데, 설교 시간중에 자신만만한 어조로 성경에 대하여 질문을 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사람이 죽는 것은 죄값으로 죽게 되었다고 성경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죄가 우리 인체 어디에 존재하고 있습니까?”고 질문을 하였더니 당당하게 단상에서 외치던 목사가 많은 기성교인들 앞에서 제대로 답변을 못하고 얼버무리는 고로 “죄는 피속에 있습니다”하고 가르쳐 주니 그는 부흥집회에 모인 교인들에게 망신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 외에 두세 가지 질문을 더 하였는데, 결국 이 질문 바람에 부흥이 아니라 해산이 되어버리는 기현상이 일어났으며 전도관으로 많은 교인들이 돌아오게 되었다.

재건중고등학교 개교기념식, 1962년 8월 6일

이 사람이 논산 훈련소에 근무했을 때 세운 학교가 전라북도 익산군 금마면 동고도리의 금마재건 중고등학교였는데, 지금은 공립 익산 중고등학교로 발전하여 현재도 수많은 학생들을 배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파주의 마지 감리교회, 양주군 남면 상수장로교회, 상수 중학교, 또한 임진강 옆 백학장로교회, 동두천 안흥리의 농축기술 중고등학교(현재는 신흥 실업 중고등학교로 변모), 경기도 파주군 일동면에 일동중학교 등을 세웠다.

전남 광주에서는 OBC교육 갔을 때 당시 기성교회에 다녔던 장창익집사와 힘을 합쳐 상명여자고등학교를 세웠으며, 이 외에 전도관도 곳곳에 세웠던 것이다(개봉동제단, 도봉동제단, 금마제단, 수궁동제단 등등).

 

신비로운 초능력을 행하다

이 사람이 온양제단에 있었을 때 일주일간 부흥집회기간을 정하고 부흥회를 했는데 계속 비가 와서 집회에 지장이 많으므로, 단상에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 감람나무 가지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하고 간절히 기도한 후 비가 멈추었으니 밖에 나가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쏟아졌던 비 때문에 계속 창문을 타고 빗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보고 장로들이 비웃으며 인정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단상에서 내려와서 밖으로 나가 온양만 비가 오지 않고 둔포,성환, 천안, 예산등 주위를 돌아가면서는 비가 오고 있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제서야 교인들이 모두 놀라는 것이었다.

또 향취가 진동하고 이슬 같은 은혜가 쏟아지니 온양의 지방유지들이 많이 전도되어 큰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 사람은 음란죄를 짓고 오는 사람에게는 뱀냄새가 나고 도둑질을 하고 오는 사람 몸에서는 구린내가 나는 것을 맡을 수 있었다.

이효성이란 청년교인이 음란죄를 지었어! 하고 지적을 하니 그 청년이 그것을 어떻게 아세요하며 얼굴이 빨개지면서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다음부터는 그런 짓 하지 말라고 타일러 주었는데 쑥스러워서인지 그 후 제단에 나오지 않았다.

또 다른 청년에게서 구린내가 나므로 “너, 왜 도둑질을 했어?”하니 “안했어요” 하므로 “잔소리 하지 말고, 어디 숨겨 놨어?” 하며 호통을 치니 “저기 숨겨놨어요.” 하며 바른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아세요?” 하면서 무서워서 제단 출석을 하지 않는 고로, 다음부터는 지적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바라 보이는 하나님께서 지적을 하지 말라고 하시므로 그 후부터는 냄새가 나도 일체 지적을 할 수가 없었으며 알면서도 모르는 것같이 지내 오기를 수십 년간 해왔다. 이 사람에게는 이미 오래 전에 그런 능력이 있었다.

이 사람이 제주도에서 신병훈련을 받고 있었을 때 훈련병 중에서 돈을 잃어버린 자가 있어 중대원 전원이 단체기합을 장시간 받게 되었다. 한참을 엎드려 있어도 범인이 나타나지 않아 모두들 고통이 심하므로 이 사람이 벌떡 일어나 나가서

“중대장님, 제가 도둑을 잡을테니 기합을 면하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네가 봤어?”

“안 봤습니다. 그러나 300명 훈련병 전원을 제 앞으로 1m 간격으로 한 명씩 제 눈을 바라 보고 지나가도록 해 주시면 제가 잡아 내겠습니다. ” 하니 중대장이

“너, 못잡으면 죽어” 하며 그렇게 하라 하였다.

그래서 내 앞으로 150명쯤 지나가는데 구린내가 나는 자가 있어

“중대장님, 바로 이 놈입니다” 하니 그 훈련병이 이 사람 멱살을 잡고 아니라고 우기며

“이 자식이 괜히 생사람 잡는다” 고 펄펄 뛰며 날뛰는 고로 냄새난다는 소리는 하지 못하고 “내가 봤어!”하였다.

그러자 중대장이 사람을 시켜 도둑질한 훈련병의 자리 밑에서 돈을 찾아냈다. 그 사건 이후 이 사람은 훈련병들 사이에서 귀신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다. 이와 같이 이 사람은 벌써 20대에 냄새로 음란죄인, 도둑질한 죄인들을 구별해 내었던 것이다.

이 사람이 온양전도관에서 시무했을 때 제단에 있지 않고, 제단과 좀 떨어진 마을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매일 새벽 제단에 가는데 하루는 지름길을 철조망으로 막아 놓아 돌아서 가다가 늦게 도착하여 단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자 좋지 않다”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갔다.

그런데 그 이튿날 그 철조망친 집의 12살짜리 외아들이 멱감다가 물에 빠져 죽어 버렸다. 이 죽은 아이의 부친은 평소 전도관이라면 괜히 싫어하고 못마땅 하게 여기다가 급기야는 그 길이 자기 농토 안에 있는 땅이라는 핑계로 길을 막았던 것이다.

그 집안의 기막힌 사정과 애곡소리를 듣고 이 사람이 찾아가서 “그 아이를 제가 책임지고 살려 줄 테니 그 아이 시체를 달라”고 하니 더욱 펄펄 뛰며 미친 소리 하지 말라고 하며 기어이 거절하는 고로 돌아오고 말았다.

뒤에 들으니 동네 유명한 무당을 불러와서 자리걷이 (푸닥거리)를 하니 그 무당말 “이 아이는 전도관 전도사를 미워하고 길을 막았기 때문에 죽었으니 가서 용서를 구하면 아이가 살 수도 있다”고 하였으나 그 때는 죽은 지 사흘이 지나 시체가 이미 썩어가는 상태인지라 어찌 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남을 비방하거나 저주하는 말을 절대 하지 않았다.

단상에서 말씀을 하게 되면 말씀이 씨가 되어 그대로 이루어지므로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세상 말에도 ‘여자의 악담에는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흔히 ‘빌어먹을 자식’이니 ‘망할 자식’ 등의 욕을 하는데 이는 우리 모두가 고쳐야 할 말버룻이다.

‘아이구, 힘들어 죽겠네’ , ‘좋아 죽겠네’, ‘더워 죽겠네’, ‘추워 죽겠네’ 등등 ‘죽겠네’로 끝을 맺는 우리들 말이 씨가 되어 모든 인류가 죽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고쳐서 해야 되는데 말끝마다 ‘영생하겠네’ 또는 ‘살겠네’로 고치든지 ‘죽겠네’ 소리를 안 하든지 해야 되는 것이다.

 

 단에 서지 말라는 영모님의 명령에 순종하다

조희성 중위

온양제단에서 시무하는 동안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뿐만 아니라 비를 멈추고 냄새로 죄를 지적하는 등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역사를 하게 되니 하루는 영모님께서 부르셔서

“단에 서지 마라 ! 단에 서면 이긴자가 될 수 없어! 조중위는 내가 장차 세계에서 제일 큰 단에 세울거야!” 하심으로

“네, 알았습니다” 하고 온양으로 돌아가서 단에 서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전 교인이 들고 일어나서 장로를 중심으로 곳곳으로 다니며 조전도사가 온양제단을 떠나면 온양제단은 문을 닫는다고 이야기하였다.

결국에는 영모님 앞에까지 가서 조전도사를 떠나 보내면 온양제단은 문을 닫게 되니 조전전사를 온양제단에 그냥 있게 해 달라고 애원을 하게 되니 영모님께서도 마지 못해 허락하셨던 것이다.

그렇지만 영모님의 눈치가 다르고 또한 하나님의 숨은 사정을 아는 고로 이 사람은 얼마간 시무하다가 기회를 봐서 몰래 온양제단을 떠나오는데 어떻게 알고 역전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아쉬운 석별의 전송을 해 주었다.

그 와중에 한 학생이 달리는 열차에 몸을 날려 자살한 일이 발생 하였다. 이런 일은 일동중학교를 떠날 때도 있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못한 공부를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이 없는 세상은 살기 싫다면서 죽음을 택한 학생이 있었던 것이다. 그 후로는 일체 드러내지 않고 평신도로서 지내게 되었다.

언젠가 조성옥 전도사가 논산 연무대 제단에 있었을 때인데 전도가 안된다 하여 이 사람에게 대신 단에 서 달라고 하므로 이 사람이 몇 번 단에 서게 되니 은혜창파가 되고 부흥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성옥 전도사가 하나님의 깊은 사정도 모르고 영모님께 가서 “조중위 전도사를 다른 사람들은 마귀라 하지만 제가 볼 때는 마귀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 단에 서게 허락해 주십시오” 한 바 있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 한번은 몇몇 전도사들이 영모님께 “조중위를 상대해도 되겠습니까?” 하고 여쭌 적이 있었는데 영모님은 “너희들, 조중위 만큼만 믿어!” 그리고 “이 소리 조중위한테 가서 하지마.” 하신 바 있다고 그 소리를 조성옥 전도사가 이 사람한테 와서 전해 준 일도 있는 것이다.

언젠가 소사 신앙촌 강대헌 장로댁 앞에서도 영모님께서 이 사람에게 “장차 세계에서 제일 큰 단에 세워 줄거야! 그 때까지 드러나지 마라! 숨어야 돼” 하며 말씀하셨다.

 

영모님을 만난 이후부터 1961년 5.16 군사 혁명까지의 행적

신기한 꿈 안찰

설교하시는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님

그런데 어느 날 밤잠을 자는데 꿈에 이단의 괴수라는 박태선 장로가 나타나서 안찰을 해주는데 너무 통증이 심하여 꿈에서도 펄펄 뛸 정도였다.

안찰을 하신 후 귀에서 고막을 꺼내 찢어진 부분을 꿰매 주시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훈련병 시절 동료들과 함께 군용트럭을 타고 이동하고 있던 중 갑자기 어디선가 날아온 포탄이 트럭 바로 옆에 떨어져 당시 타고 있던 훈련병의 대부분이 부상을 당한 적이 있었다.

포탄이 떨어지는 것을 보는 순간 이 사람은 공중으로 뛰어 올라 회전 낙법을 이용하여 포탄이 떨어지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논두렁에 떨어져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리고 바로 일어나서 주위를 살펴보니 파편이 박힌 사람, 총열이 목덜미를 뚫고 나온 사람 등등 각양각색으로 부상을 당한 동료들이 피를 흘리고 신음하며 살려 달라고 외쳐대고 있었다.

그런데 인솔 책임자인 중대장도 역시 전투 경험이 없는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댈 뿐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워낙 겁이 없고 또 3년 동안의 포로 생활을 통해 온갖 시련을 다 겪었는지라 침착하게 한 사람 한 사람 응급처치를 해 주었다.

총열이 목을 뚫고 지나간 사람은 군화로 머리를 눌러 움직이지 않게 하고는 총대를 힘있게 당겨내니 “우둑!” 하면서 총열이 빠져나왔다. 총열이 박혔던 구멍으로 붉은 피가 철철 흘러 나오는 고로 런닝 셔츠를 찢어 나오는 피를 막았다.

이런 식으로 대충 응급조치를 하면서 동료들을 돌봐주었는데 그 때 이 사람도 폭발음으로 인하여 한쪽 고막이 찢겨나갔던 것이다. 그 후부터는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이 작은 소리를 하면 잘 알아 듣지 못하여 되묻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그 분이 꿈에 찢어진 고막을 꺼내니 고막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굉장히 커 보였는데, “이렇게 고막이 찢어 졌으니 소리를 잘 못 알아듣지!” 하시며 친히 바늘로 고막을 꿰매시고는 도로 귀안으로 넣어 주시는 것이었다

 

박태선 장로를 만나다

박태선 장로님 천막집회 당시 내린 이슬성신 사진

참 신기한 꿈을 꾸고 여느 날과 같이 기성교회 새벽기도에 가기 위하여 일어나서 군복을 입으려고 허리띠를 졸라 매는데, 배가 아픈 고로 옷을 헤치고 아픈 곳을 보니 새까만 손자욱이 배, 옆구리 등에 나 있었다. 그제서야 간밤에 꾼 꿈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이었다.

꿈에 안찰을 받았는데 실제로 안찰을 받은 것처럼 손자국이 나 있다니… 하는 생각이 돌아가는데 문득 시계 돌아가는 소리가 분명하게 들려오는 것이었다. 전에는 시계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꿈에 귀 수술을 받았는데 이렇게 귀가 깨끗하게 나을 수가 있다니… 기쁘기도 하고 신기하게도 생각되었다.

그래서 돌아오는 토요일에는 박태선 장로를 만나러 가기로 작정을 하였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토요일 아침이 되니 금요일까지 멀쩡 했던 배가 아파오는 것이었다.할 수 없이 그 날은 그냥 보내고 말았다. 다음 주에도 한 주일이 다가고 토요일이 되니 또 배가 몹시 아파왔다.

멀쩡하던 배가 토요일만 되면 아파오다니, 이건 필시 박태선 장로를 만나러 가지 못하게 하려는 마귀의 장난임에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귀를 속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번 주 토요일은 기성교회에 나가야지… 하고 짐짓 꼭 그렇게 하리라는 결심도 하였다. 그랬더니 그 주 토요일은 배가 아프지 않는 것이었다.

옳지,됐다! 마귀가 속아 넘어갔구나!  쾌재를 부르며 부천 소사로 갔다. 박 장로의 댁을 물어 찾아가니 마침 출타중이었다. 잠시후면 돌아 오니까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잠시후 박태선 장로가 들어오는데 신도들이 대하는 태도가 한 나라의 대통령 대하는 것보다 더해 보였다.

이단의 괴수라더니 정말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기분이 좋지 않아 곧 돌아가 버려야 겠다고 다짐했다. 이윽고 박태선 장로가 오셨다.

“그래, 장교님은 어떻게 오셨어?”

박태선 장로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물어왔다.

막상 질문을 받으니 대답이 궁하여

“장로님께 안찰받으러 왔습니다. ”

“안찰은 이미 해 줬는데 뭘 또 안찰을 받아?”

박장로님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장로님께 안찰을 받은적이 없습니다. ”

꿈에서는 본 적이 있으나 실제로 박태선 장로를 만나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라 분명하게 대꾸하였다.

그러니까 박 장로님은 기가 차다는 듯이

“장교님이 이제는 거짓말까지 하시네 내가 지난 번에 안찰을 해주고 귀수술까지 해 줬잖아?” 이 사람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꿈에서 안찰해 준 것을 알고 말씀하니 박장로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무섭고 떨려 더 이상 인간 대하듯 할 수는 없었다.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되서 안찰을 받지 않고 그냥 갈 수는 없었다.

“그래도 안찰 좀 해 주십시요” 이렇게 하여 안찰을 받으니 향취 냄새가 진동하고 몸이 둥둥 뜨며 걸어가는지 날아가는지 모를 정도로 몸이 가벼우며 기분이 좋았다.

부대로 귀환하려면 영등포 역까지 와서 열차로 갈아타고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가야 하였다. 그러나 버스를 탈 수가 없었다. 일반 사람들은 은혜를 입지 않은 죄인들인지라 감당할 수 없는 세력이 오는 것이었다.

은혜 받은 것이 오염받아 다시 더렵혀지는 것이 너무너무 싫은 고로 걸어서 영등포까지 갔으며 기차 안에서는 자리가 비어 있었어도 앉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승강대에 서서 목적지까지 가야 했다.

그리하여 그 때부터 지금까지 30여 년간을 일편단심 영모님이 이끄시고 가르치는 대로 결사적으로 믿고 따르게 되었다.

 

영모님을 ‘오실 인자’ 로 알고 바라보고 사모하였다

노구산 야외집회시 산 전체를 가득 메우고 운집해 있는 성도들, 1958년 6월 30일

초창기 남산 집회를 비롯한 전국각지에서 천막집회를 할 때마다 영모님이 단상에 서시면 번갯불이 번적번적하며 은혜가 임하는 것을 보고 성경에 “인자가 임할 때 동편에서 서편까지 번갯불이 번쩍인다” (마태 24:27)는 말씀을 그대로 행하시는 ‘오실 인자’가 바로 영모님 이라는 것을 알았다

영모님께서 단상에 서실 때마다 “바라보시라요!”하고 큰 소리로 당신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시고, 안찰을 하실 때에는 “주님을 바라보시라요”하고 말씀하시는 고로 이 사람은 당신이 주님이라는 것을 깨닫고 당신을 바라보았고, 또한 “고도로 사모하시라요”하시므로 초초로 바라보고 고도로 사모하는 이 두가지 말씀이 지상명령인 줄 알고 수십 년간 초초로 바라보고 고도로 사모하게 되었다.

박태선 장로님 천막집회시 내린 이슬성신 사진

또 영모님께서 “마귀가 들린 미친 사람을 쳐다보지 말라! 쳐다보면 마귀신한테 씌운다”고 설교하실 때, 이 사람은 그러면 하나님의 영이 계신 분을 바라보면 하나님 신을 받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수십 년이 넘도록 영모님 얼굴을 바라보며 지내왔다.

바라보이는 영모님 얼굴이 빙글빙글 웃으시면 마음 상태가 정상이고, 바라보이는 영모님 얼굴이 화나신 모습으로 보이면 마음이 잘못된 것이므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또 바라보이는 영모님 얼굴이 바라봐지지 않으면 호흡을 멈추고 ‘영모님께서 외면하시면 죽겠나이다’하고 결사적으로 매달리고 어거지 떼를 썼다. 그러면 다시 영모님이 바라보여 주시기도 하였던 것이다.

또한 영모님께서 단에서 “너희들이 기도할 때 아버지 하나님하고 부르지 말라. 죄인이 아버지 하나님을 부르면 죄인의 아버지 하나님은 마귀인 고로 마귀가 오냐하고 오게 되어 있으니 주님이라고 불러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이 사람은 죄인이 주님을 부르면 죄인의 주님도 마귀인 고로 마귀가 오냐하고 오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죄인은 기도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소사신앙촌 전경
소사신앙촌 건설현장, 산 꼭대기에 깬 돌을 산 아래까지 이어받기로 운반하고 있는 광경

한편 이 사람은 소사 신앙촌 건설대에 참여하여 신앙촌 건설을 도왔다. 당시 노고산은 뱀산이라 하여 뱀이 워낙 많고 바위가 많아 사람이 살 수 없는 버려진 산이었다. 그 산을 신앙촌으로 개발하는 작업이었다.

그 일은 먼저 바위를 깨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바위를 해머로 깨면 그 깨진 면에 감람나무 잎사귀가 뚜렷하게 새겨져 나왔는데, 그 걸 이 사람이 제일 먼저 발견하고 영모님께 보여드리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분은 하나님

박태선 장로님에 대한 헌금사기혐의는 무죄 신문기사

영모님께서 옥중(獸中)에 가 계실 때는, 매일 뵙고 사모하다가 몇날 며칠을 못 뵈옵게 되니 너무나 보고 싶어 눈물로 밤을 지새웠던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현역 장교의 신분이지만 법정에 들어가 검사 판사 등 법관을 죽여 버리고, 우리 영모님을 구출한 다음 자살해 버리기로 작정을 하고 가슴에 권총을 품고 법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때 영모님이 자꾸 이사람을 돌아보면서 고개를 가로 저어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 하여 마음을 바꾸니 영모님께서 뒤를 돌아보지 않으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생명을 걸고 결사적으로 믿었던 것이다.

영모님께서 두 번씩이나 옥중에 들어가시게 된 것은 당신의 참 가지인 아담과 해와를 키우기 위함이었다.

영모님께서 옥중에 들어 가시니 더욱 더 사모가 되고 보고 싶어졌으며 논산 훈련소 근무지에서 열차를 타고 올라와 서대문 형무소에서 면회를 하게 되면, 당시에는 책상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 앉아 보면서 면회할 때였는데 영모님께서 이 사람 두 손을 붙잡고 한 시간 반 내지 두 시간씩 목을 놓고 우셨다.

영모님이 슬퍼 우시니 이 사람도 따라 울었다. 두 사람이 우는 광경이 너무너무 애절하고 기막힌 고로 당시 간수부장으로 있었던 한장로도 같이 울었다.

이 한장로는 그 당시 기성교회 장로로서 영모님의 인격과 은혜에 감동이 되어 후에 전도관에 들어와 소사 신앙촌에서 형광등 공장장으로 일하였다.

영모님께서 애절하게 우시면서 간간이 하신 말씀이 “숨겨야 이겨, 숨겨야 돼” 하는 것이었다. 그때 이 사람은 하나님이 처하신 곤고한 사정과 영모님이 이 세상에서 최고로 불쌍한 분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고로 이 사람은 이것이 희생 재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데 가치가 있으시면 이것을 이용해 주시옵소서. 이용하시다가 나중에 지옥에 던져도 좋으니 당신의 뜻만 이루어 주옵소서 하는 기도를 하였다.

그래서 수십 년 마귀소리를 들으면서도 참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전도관에서 마귀 취급을 당하다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범박동 소사 제1신앙촌, 1957년 11월 1일 착공

이 사람이 군인의 신분으로 온양 제단 전도사 교역을 맡다가 영모님이 “이제 단에 그만 서, 계속 단에 서면 이길 수가 없어. 이긴자가 될 수 없어. 조 중위는 앞으로 세계에서 제일 큰 단에 세울거야”

하시므로 교역자 생활을 그만 두었는데 곧이어 “이제 조중위는 안찰 안받아도 돼…” 하시며 안찰을 안 해주시므로 마귀 소리를 듣게 되었다.(마귀라고 불려져 왕따당함)

많은 신도들이 안찰받기 위하여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데 이 사람도 그 대열에 끼어 서 있으면 그냥 내버려 두셨다가 가까이 가게되면 이 사람을 힐끔힐끔 보시면서 “안찰 안 받아도 되는데…” 하시면서 혼자 말씀으로 하셨다.

드디어 차례가 되어 영모님 앞에 누우면 손을 대시지 않아도 은혜를 부어 주시는 영적 안찰을 해 주시는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양동이로 물을 붓는 것같이 시원한 은혜체험을 하였다.

그러나 영모님께서는 육적으로는 다른 전도사들을 보고 “전도사, 요즘 전도 잘되나?” 하는 식으로 딴전을 부리시다가 안찰이 다됐다 싶으면 눈짓으로 대기중인 안내원에게 고개짓을 하며 데려가 라는 신호를 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면 2,3명의 안내원이 이 사람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덕소 제2신앙촌, 1962년 7월 21일 착공

육군 중위 계급장이 붙은 장교복을 입은 채 얼굴이 빨개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끌려 나오는 것이었다. 창피를 당하고도 또 가면 끌어내고 그래도 또 가고 하니 이 사람을 아는 전도관 식구나 교역자들은

“조중위는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는 이야기를 입에 오르내렸던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 눈을 속이고 손으로 안찰을 안 해 주시기를 3년이나 계속하시니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이 사람이 마귀라서 안찰을 안해 주시는 것같이 보여 수많은 전도관 교인들은 이 사람이 마귀인 줄 알았다.

진짜 마귀라면 안찰받기 위하여 차례를 기다리는 대열에 끼일 수도 없으며, 만약 끼여 있더라도 영모님 가까이 가게 되면, 세력이 가는고로 “저 마귀새끼 끄집어 내!” 하시며 못 오게 하셨다.

어찌 되었던 전도관 식구들 간에 이 사람이 마귀라서 영모님이 안찰을 안해 주신다는 소문이 퍼져버려 모든 사람들이 이 사람을 외면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는 이 사람에게 직접 전도를 받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맛을 보고 이모저모로 신세를 졌던 사람까지 이 사람을 길거리에서 만나면

경상남도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기장 제3신앙촌, 1970년 2월 28일

“오늘은 마귀 새끼를 보게 되서 기분 잡쳤다” 하며 땅바닥에 가래침을 뱉는 것이었다. 길에서 마주치게 되면 마귀라 하여 외면을 하고 오던 길을 돌아 다른 골목으로 가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신사 양복에다 가래침을 뱉기도 했는데, 그러면 이 사람은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길가에 자라고 있는 풀을 뜯어 가래침을 닦아 내곤 하였던 것이다.

이 사람은 주먹으로 한 대 치면 박살이 날 정도의 볼품없고 나약한 형제를 시켜 ‘나’라는 것이 원수중의 원수인 것을 깨닫게 하시고 ‘나’라고 하는 자존심마귀를 뽑아 주실려고 이런 일을 당하게 하신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감사하게 여겼던 것이다.

이 사람이 영등포 당산동 지관에 다녔을 때 나중에 소사 신앙촌 천부장이 되었던 한영순 권사를 전도하였는데 그 아들 김용이도 군입대 할 때 이 사람이 카츄사로 주선해 주었으며, 의사인 남편 김선생이 영등포에서 고려 엑스레이병원 원장으로 있을 때 이 사람이 피의 원리를 논하며 전도를 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한영순 권사는 소사 신앙촌 C 5동 4호실에 있는 이 사람 집을 찾아와 “천부장 권한으로 명하니 조중위 마귀는 나가라”고 행패를 부렸다. 그러나 이 사람은 끝까지 나가지 않고 버티었던 것인다.

 

고도로 사모하는 신앙생활

소사 오만제단

영등포 당산동 전도관을 건축할 때 이 사람이 헌금을 1등으로 하면서도 아무도 모르게 하였으며, 연보 취급자가 눈치채어 알게 되면 일부만 말하고 그 외는 숨겨 달라고 부탁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당시 박기호 전도사가 당산동 지관에 시무하였는데, 그 당시 이 사람 생각에는 나는 평신도인데도 영모님이 늘 함께 따라 다니시는데 전도사님들은 더욱 영모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어

“박 전도사님, 영모님께서 지금 옆에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박 전도사는 무슨 이야긴지 모르는 고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하고 반문하기에 그때서야 사람마다 따라 다니지 않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바라 보이시는 영모님께서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고 말하지 말라고 신호를 하시므로 그 후부터는 일절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지켜왔던 것이다.

소사 오만제단, 예배 후

영모님의 존재를 초창기 때부터 분명히 ‘재림의 주님’으로 알고서 방안에 영모님 사진만 걸어 놓으면 어머니께서 예수 사진을 옆에다 같이 나란히 걸어 놓은 것이 눈에 보여 “어머니, 예수사진은 떼세요.” 하고 말씀 드리기도 했다.

한번은 인천 동암 간석동 전도관 전도사가 설교를 해 달라는 부탁을 해와 박태선 장로님이 재림의 주님이라는 설교를 하였더니 그 곳에 참석한 교인들이 깜짝 놀라며 조전도사가 이상한 말을 하는 마귀라고 한 적도 있었다.

소사 신앙촌 건설 당시에 밤늦게 ‘주님이 거느리시니 즐겁고 태평 하구나. 주야에 자고 깨는 것 주님이 거느리시네. 날 항상 거느리시고 날 친히 거느리시네. 날 항상 거느리시고 날 친히 거느리시네.’하는 찬송의 가사 내용과 일치된 마음을 가지면서 감사함의 눈물을 흘리며 비탈길을 지나 지금의 오만제단이 지어지기 전 넓은 공터에까지 올라갔다.

찬송을 걸음걸이에 맞춰 원래 곡조보다 빠른 템포로 간절하고 은혜 스럽게 부르니 이 찬송소리를 들은 다른 교인이 감동이 되어 이 찬송을 같이 부르며 뒤에 따라오는데, 오만제단 꼭대기에 와서 보니 5-6명이나 따라왔다.

실제로 영모님께서 옆에서 늘 동행하고 계시는데다 이 찬송을 부르니 감개무량한 눈물이 흐르지만, 이러한 체험을 하지 못하고 찬송하는 자는 냉랭하여 은혜생활하는 것 같지도 않은 것이다. 그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이다.

항상 따라다니시고 초초로 바라보이시는 나의 생명이 되신 주님께 무엇을 드려도 늘 아쉬운 마음뿐이고, 또 육으로 매일 뵈옵게 되면 감개무량한 눈물만 한없이 쏟아지지, 말씀드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영으로, 마음으로, 서로 통하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하루도 영모님을 뵈옵지 못하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도로 사모가 되는데 영모님께서 옥중에 들어가시니 그 하늘을 찌를 듯한 사모함은 말로 형언키 어려웠다.

밤마다 베게깃을 눈물로 적셨던 것이다.

 

군사 혁명을 계획하다

서울 원효로 이만제단

그런 영모님을 두 번째 옥중에 투옥시켰을 때에는 완전히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당시의 민주당 정권을 뒤집어 엎고 내 생명보다 억천만 배 귀한 우리 영모님을 옥중에서 구출하고 영모님을 중심으로 우리 대한민국을 전도관 천지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전국 전도관 대학생회장 이종배 관장과 몇몇 청년 간부들 유제창, 민경춘, 박기호 등에게 제의하여 서울 원효로에 있는 2만제단에서 전국 전도관 대 집회를 열어 교인 일부 몇천 명은 결정된 시간에 원효로에서 출발하게 하고, 또 일부 몇천 명은 마포에서 출발하게 하기로 계획을 짰다.

또 몇천 명은 어느 정류소에서 거기에 있는 승객 시민들과 합세하여 출발하고, 또 일부는 다른 버스정류소 여러 곳을 선정하여 출발토록 하는 한편 조철구를 중심으로 하여 300명의 특별 결사대를 조직, 행정부와 육본 등을 담당하고, 각 경찰서는 헌병대가 점령 하도록 하였다.

수류탄을 비롯한 탄약등은 이 사람의 군동기생이 안양 탄약고에 있으므로 연락하여 조달키로 하는 등 치밀한 계획하에 행동에 옳기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영모님 사모님과 형님인 박태국 장로님은 극구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안됩니다! 죄없으신 우리 영모님을 두 번 씩이나 옥중에 집어 넣은 만행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이 썩은 정부를 뒤집어 엎어 버리겠습니다. “고 강경하게 나가니 그들은 용산 경찰서에 신고해 버렸다.

박태선장로에 대한 사형집행 하루 전날 발생한 5.16혁명 직후의 박정희 소장

그리하여 거사가 들통이 남으로 이 사람이 주범으로 지명수매를 받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영어(囹圄)의 몸으로 계신 영모님께 옥중 발령을 받고 온양 전도관에서 시무하며 피신하고 있었는데, 그 후 6개월 뒤에 5.16군사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이 일어나니 용산경찰서 형사들이 사람이 혁명주체세력인 줄 알고 찾아와 점심을 같이 하자는 등 아부를 하려 하기에 나는 혁명주체세력이 아니라고 해명한 적도 있었다.

자유당 정권 당시 부통령 이기붕과 부인 박 마리아가 영모님을 죽이려고 옥중에 집어넣고는 자유당 정권이 무너졌는데, 그들은 그때 영모님을 옥중 깊은 대변통에 빠뜨려 죽게 했는데 다행히 변소 안에 나무토막이 있어 붙들고 살아 나신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영모님을 체포한 강차장 검사가 심장마비로 죽고, 이기붕 박마리아는 아들의 총에 맞아 죽었던 것이다. 그 후 민주당 정권 때 다시 영모님을 두 번째 투옥시킨 정부가 몇개월 만에 무너졌다.

당시 혁검부장 김창룡이라는 자가 영모님을 직접 구속했는데 구속한 다음날 이유없이 자살을 해버렸다.

성경에 ‘감람나무를 해하고자 하는 자 죽임을 당하리라’고 한 대로 하늘의 사람을 건드린 자들의 말로는 이와 같이 비참했던 것이다.

 

휴전이후 영모님을 만나기 이전 행적

반공포로 제1번으로 석방

 

당시 포로석방은 한국군이 미군들을 꼼작 못하게 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진행되었다. 사진은 거제도포로수용소의 반공포로들을 비밀리에 탈출시키기 위해 한국군이 절단한 철조망

이 사람은 1953년 6월 19일 경북 영천에서 반공포로 제 1번으로 석방되어 판문점을 거쳐 고향으로 와서 김포읍 사무소에 도착하였는데, 어머니께서는 당신 아들을 앞에 놓고도 못 알아 보시고 우리 아들이 어디 있냐고 두리번 거리시며 찾으셨다.
6 · 25동란의 시련속에서 수백 번 수천 번 죽음의 고비를 넘어 단련되고 단련된 몸이라 못 알아 볼 정도의 사람으로 변모되어 있었다.

집에 와서 어른들에게 너 눈동자가 바뀌었구나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죽음의 고비, 사선의 고비를 수없이 넘고 보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어린애로 보여지며 정신력이나 마음은 이 세상의 무엇으로도 당할 수 없는 강하고 강한 마음으로 다져져 있었던 것이다.

전도관 영모님께서도 6 · 25사변은 이긴자를 배출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때 당시에는 영모님 자신이 고생하신 줄 알았으나, 이제 와서 보니 이긴자가 걸어온 길을 그때 그때 바라보시고 말씀하신 것이었다.

전쟁당시 부산 난민촌

포로 아닌 포로 생활에다 입에 담을 수 없는 모진 고초를 3년 동안 당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 고향집으로 돌아왔으나 며칠 쉬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뿌리치고 포로생활 때문에 중단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서 학교를 찾았다.

그러나 당시에 다니던 학교가 전쟁으로 인하여 부산으로 옮겨가 버렸다. 그래서 곧바로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서울대 법대 2학년 때 이미 육법전서를 다 통달해 버렸고 또 전쟁 중 무수한 사선을 넘으면서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더욱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으므로 신학 대학에 들어갔다.

그 당시 이사람은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다가 부산 부두의 미군 통역관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는 전쟁중이라 미국에서 많은 군수물자와 구호물자가 들어왔는데 이것을 많은 한국인 보급관들과 관계자들이 빼돌려 사사로이 착복하였다.

그때 이사람은 유창한 영어 솜씨로 미군에게 인정을 받은 고로 모든 물자 반출시 이사람의 도장을 받아야 되는 직책으로 승격되어 있었다.

이사람이 통역관 겸 감독관으로 일하면서 부정사건이 거의 사라져 버렸는데 한번은 집에 들어와서 보니 5억환이라는 거금이 방안에 놓여 있었다. 5억환이라면 당시 부산에서 몇째 안가는 거부가 될 수 있는 거금이었다.

그러나 이사람은 평소 물욕이 손톱만치도 없는 사람인지라 그런것에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돈을 싸가지고 다음날 출근하니 아니나 다를까 한 트럭 운전수가 손목시계를 가뜩 싣고 나가면서 눈을 껌뻑껌뻑거리는 것이었다.

이사람은 차를 세워 창문으로 돈을 던져주며 물건을 원위치에 돌려 놓았다. 이 일이 알려지자 미군들은 당신같이 훌륭한 청년이 있느냐 하면서 감동했던 바 있었다.

 

신학대학 재학 당시 군입대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에 위치한 육군 제1교육장 막사

신학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고 있는데 갑자기 군입대 영장이 발부되면서 학교에서 바로 육군으로 입대를 하게 되었다. 신병훈련을 제주도에서 받았는데 그때가 가장 더운 7 8월이었다.

한창 전쟁이 치열한 가운데 멀리 부산에서 그것도 학교에서 바로 입대를 하게된 고로, 집에서 면회를 올 형편도 못 되었지만 가족들이 미처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다른 동료 가족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생사를 기약하지 못하는 석별의 눈물을 흘리며 환송하는 물결을 뒤로 보내며 제주도로 향하는 배를 탔던 건이다.

제주도 모슬포에서의 훈련 중 어떤 동료는 이질에 걸려 죽고 어떤동료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탈영도 하고 또 어떤 동료는 구보를 하다가 심장마비로 죽기도 하였다.

전국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기 때문에 훈련도 고되었지만 급식사정이 지금 같지 않아 몹시 배고픈 설움을 당하였다.

모슬포 신병훈련소에서 면회를 신청하고 있는 가족들

다른 훈련병은 가족이 면회를 와서 훈련소 주위의 아주머니들이 파는 가래떡을 사서 먹을 수도 있었지만 이 사람에게는 그런 기회도 없었다.

그 떡이 너무나 먹고 싶어도 그 먹고 싶은 것을 참아야하는 연단이 가해지는 운명 속에 힘든 마음을 달래 보고자 노래 가사를 지어 부르기도 했다.

제주도 좋다지만 나는야 싫어
모슬포 빵고지에 고동이 울면
낮이면 앞에총에 구보를 하고
밤이면 내무반에 엎드러 뻗쳐
호랑이 같은 일등병의 눈치만 본다.

이 가사를 지어 당시 유행하는 유행가의 곡조에 맞춰 부르니 훈련병들 사이에 널리 유행이 되어 제주도 훈련소를 거친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당시는 전시라 소위(少尉)는 전방에서 거의 다 죽어 나갔으므로 대부분의 청년들이 장교되기를 거부하였다. 그래서 군인력 담당 부서에서는 신병훈련을 마친 대학생들과 고졸자들을 모아 놓고 행정요원을 뽑는다고 공고를 하면서 희망자는 응시하라고 부추겼다.

그 말을 사실로 믿은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응시하였는데 이 사람이 그 중에서 1등으로 합격이 되었다. 그러나 300명의 합격자들을 데리고 간 곳은 전남 광주에 있는 상무대 장교훈련소였다. 깜쪽같이 속아서 원치 않는 장교훈련을 받게 되었다.

추운 겨울에 갑종장교후보 87기로서 사병 훈련보다 몇십 배 고달픈 장교 훈련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소위 신분으로 연대 정훈과장을 맡다

조희성님이 소위 임관되어 배치 받을 때를 즈음하여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사진은 중국 북한 연합군대표 미국간 휴전협정 조인서. 한국은 무시되고 없다.

소위 임관이 되어 동료들은 거의 일선 소대장으로 배치를 받았으나, 이 사람은 훈련 성적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특출했으므로 대대 작전 과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곳은 포천군 사창리에 있는 28사단 82연대 3대대였다. 그러나 전쟁은 이미 끝난 뒤여서 정식 군인으로서 전투경험을 쌓지는 못하였다.

이 사람은 작전 과장으로서의 소임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틈나는 대로 사병들에게 공산주의의 정체에 대해 정신 교육을 해 주었다. 이러한 것이 상부에 인정되어 이 사람은 소위 계급으로서 중.소령이 담당하는 연대 정훈과장으로 발령이 났다.

그 때는 고향이 그리워 탈영하거나 고된 병영 생활을 이기지 못하여 월북하는 사병들이 많을 때였다. 이 사람이 정훈과장으로서 연대내 전 사병들을 상대로 이 사람이 직접 포로가 되어 빨갱이들에게 당한 경험담과 공산이론의 허구성에 대해 설명해 주니 월북하는 사병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 들었다.

그리고 업무시간이 끝나면 연대내에서 전쟁과 가난 때문에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사병들을 모아 중.고등학교 과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소문이 나기 시작하자 공부를 배우려는 사병들이 물밀듯이 밀려 들었다. 그런데 28사단 관할 지역내 야산에는 울창한 나무가 많이 들어 서 있었다.

사단에서는 필요한 사단 건물과 진지 등을 짓기 위한 나무를 마련하기 위해 인근 산의 나무를 벌목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작업을 맡은 장병들이 하나같이 나무를 시중에 내다 팔아서는 착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단장은 부정을 하지 않을 만한 깨끗한 장교를 물색하느라 고심한 끝에 이 사람을 책임장교로 임명하였다.

이 사람이 현지에 부임하자 선임하사는 장교님은 이런 데 오시면 안됩니다하면서 방을 하나 얻어 주면서 편히 있으라고 권했다. 그리고는 며칠 후에 돈뭉치를 갖다주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돈이냐고 추궁하니 나무를 내다 판 돈의 일부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원래 불의라면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 돈이 부정으로 마련된 돈이며 선임하사가 주도해 이런 부정이 일어 났다는 것을 확인한 후, 이 사람은 선임하사를 영창에 보내도록 사단장에게 강력히 건의하였다. 그리고는 이 사람이 직접 벌목작업을 지휘하고 감시하여 이 후부터는 한 치의 부정이 없게 하였다.

사단장은 그만한 일로 선임하사를 영창에까지 보낼 것까지 있느냐고 만류하였지만 이 사람은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런 일로 해서 사단장은 이 사람을 깊이 신임하게 되었다.

82연대 정훈과장이 공부 못한 사병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데 그 호응도가 매우 좋다는 것을 들은 사단장은 어느 날 이 사람을 불렀다.

자네, 소원이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 주겠네”

제게 소원이 있다면, 장교로서 맡은 과업을 성실히 수행하고 남는 시간에는 사단 내에 전쟁으로 인해 교육을 받지 못한 사병들에게 공부를 시켜주고 싶은 것뿐입니다.

그게 소원인가? 그러면 자네를 사단 중.고등반 책임 장교로 임명해 줄테니 사단내의 공부 못한 사병들을 가르쳐 주게 이렇게 해서 근무시간에 사단내 군인들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이것이 인근 민가에까지 소문이 나 민간인 청년들이 몰려와 자기네들에게도 공부를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단장의 허락을 받아 근무 시간이 끝나면 부대 밖에 나가 민간인 학생들도 가르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군대식으로 엄하게 가르치므로 70% 이상이 국가에서 시행하는 중.고등학교 졸업자격 검정시험에 합격하여 당시 신문에도 크게 난 일도 있었다.

 

일동 중 ·고등학교를 세우다

제자들과 찍은 사진. 잊지못할 선생님. 가운데 군복차림으로 앉아계신 분이 조희성님

낮에는 군인 학생들을 가르치고 밤이면 부대 근처 마을의 민간인 학생을 가르치니 피곤이 겹치고 잠도 부족하여 몸이 점점 약해져 갔다.

어느 날 야간에 천막 안에서 밤늦게까지 민간인 학생을 가르치다가 코피가 터지니 몇 학생이 우리가 번 돈이 없어 보약은 커녕 따뜻한 식사 한번 대접하지 못했는데도 이 군인 선생님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나오셔서 우리 불우한 학생들을 위하여 당신의 몸도 돌아보지 않으시고 공부를 가르쳐 왔습니다.

배움의 시기를 넘기고 나이가 들은 학생들을 위하여 환경도 좋지 않은 천막에서 심혈을 기울이고 정열을 쏟아 부어주시는 선생님이 너무나 불쌍하다면서 울음을 터뜨리니까 일시에 온 천막안이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 때 마침 지나가던 미군 5군단 소속 공병장교 메이저 존이란 분이 이 광경을 보고 감동이 되어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이걸 보고 미국인이나 한국인이나 감정이 마찬가지라고 느꼈다.

강의를 마치고 나오니 그 때까지 기다렸던 미군 장교가 하는 말이 당신의 소원이 무엇이요? 내가 당신의 소원을 다 들어줄 수는 없지만 당신이 하는 일을 내 힘 닿는 데까지 도와주고 싶소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사람은 전쟁으로 인하여 배울 기회를 놓쳐버린 이 불우한 학생들을 가르칠 교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내 입에서 돈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을 줄 알았는데 다른 말이 나오니까
당신 개인적인 소원은 없느냐하며 다시 물어왔다.

이 사람이 나 개인에 대한 소원은 없다고 답변하니 한국에 이런 훌릉한 청년이 있다니…하며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메이저 존이 상관인 미8군 사령관에게 건의하여 학교 교실을 지은 것이 지금의 일동 중.고등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그러는 중 의사인 일동장로교회 손장로라는 자가 이 학교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야심으로 28사단 고위 장교들을 매수하여 이 사람을 OBC교육을 받게끔 광주로 보낸 다음 그 틈을 이용해 이 학교를 사립학교로 바꾸어 보려고 포천 지방유지들과 공모한 일이 있었다.

공립학교가 되어 있는 현재의 일동 중고등학교

그러나 이 사람은 OBC교육을 끝내고 돌아와 당시 이익흥 경기도 지사등 관계 공무원과 지방 유지들을 직접 찾아가 강력히 주장하여 공립학교로 만들어 버렸다.

어려서부터 희생하기를 좋아하고, 어떤 댓가를 바라지 않는 성품인 고로 이 사람을 찾아와서 우리 포천 군민 전체가 합세하여 똘똘 뭉쳐서 밀어줄테니 군복을 벗고 국회의원에 출마하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의 마음에는 추호도 그런 생각이 없었던 고로 일언지하에 거절하여 버리니, 나중에는 사단장에게 건의하여 이 사람은 사단장실에까지 불려 갔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사람이 20대 젊은이에 어울리지 않게 사회와 국가를 위해 살신성인의 자세로 젊음을 불태우는 것을 보고, 국회의원 출마를 권하였으나 이 사람에게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겨우 국회의원 자격밖에 되지 않습니까하고 되물으니 그들은 무안해서 아무말도 못하고 돌아갔다. 언제나 이름도 없이 묵묵히 누구도 모르게 젊음을 불살라 이웃과 나라를 위해 희생 생활을 계속하였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마다 사람이 해서 안되는 것이 없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하는 시조를 즐겨 말하였고, Where there is a will, there is a way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하는 격언도 가르치며, 불가능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든지 마음을 품고 목적을 세우고 노력을 하면 못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도 교과서를 들고 오늘은 몇과 할 차례냐? 어제는 어디까지 했느냐? 는 식으로 해 보지 않았다.

백묵 하나만 가지면 교과서 참고서 필요 없이 영어, 수학, 국어, 국사, 물리, 화학, 지리 등 모든 과목을 거침 없이 가르치므로 이 사람의 별명이 백과사전이었던 것이다.

 

6.25사변 후반기

신양리 형무소에 재수감

나체로 이동중인 인민군 포로들

대동군 치안대장시절 어느날, 미군 헌병이 지프차를 타고 와서 갑자기 권총을 들이대며 영어로 이 사람이 빨갱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당시 이 사람은 치안대장이라 소제(蘇制)권총을 두 정이나 차고 있었기 때문에, 차고 있던 권총을 꺼내어 재빨리 사격자세를 취하였다.

헌병은 치안대장이 빨갱이라는 정보가 들어와서 잡으러 왔다고 했다.

그래서 이 사람은 한 쪽 손으로 팔의 POLICE CHIEF라고 쓴 완장을 가리키며 빨갱이가 아니고 빨갱이를 잡아서 없애는 자라고 말하였다. 그러면 우리 대장에게로 가보자고 하여 이 사람은 지프차에 타고 미 헌병대 본부로 갔다.

그런데 미 헌병대장은 자초지종을 묻지도 않고 형무소에 보내라고 명령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사람은 다시 평양 신양리 형무소로 가게 되었다.

뒤에 알고보니 치안대장이라는 자가 빨갱이를 잡으면 죽이지 못하게 한다 하여 치안대원 중에 불만이 있던 몇 명이 헌병대에 이 사람이 빨갱이라고 신고를 한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이 사람은 이런 상황에 처하도록 해 주신 하나님께 깊이 감사하게 되었다. 얼마 안 있어 중공군이 인해 전술을 쓰면서 물밀듯이 밀고 내려 오게 되니 당시 대동군 치안대원 30여 명은 몰살당했으며, 내 생명의 은인이었던 이양숙이란 처녀도 그 때 죽음을 당하였다.

이 소식을 부산 가야 수용소에서 포로로 잡혀온 인민군들에게 듣고 동료들을 생각하며 슬피 운 적도 있었다. 이 신양리 형무소에는 전에 이 사람이 직접 포로로 잡아서 집어넣은 인민군 수천여 명이 수용되어 있는 고로, 이 사람이 들어가니 많은 포로들이 깜짝 놀라면서

“어떻게 해서 치안대장인 당신이 여기에 들어 왔느냐”고 물어왔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저 그렇게 되었노라고 담담하게 답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잡힌 포로들은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서 이 사람을 담요로 덮어 씌우고 때리며 발로 짓밟기도 하였다. 이 사람은 형무소 안에서 갖은 수모와 곤욕을 치르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향하여

압록강을 건너고 있는 중공군

며칠 있으니 신양리 형무소가 포로들로 넘쳐 동양방직 공장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는 밀을 주식(主食)으로 주는 고로 그걸 먹다가 그만 항문이 막혀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며칠을 고생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수용소 내의 길바닥에 쓰러져 의식불명이 되어 있었는데 마침 지나가던 어느 국군장교가 보고 주머니에서 하얀 알약(다이아찡)을 꺼내 입 안에다 두서너 알 넣어주고 갔다.

한참후 정신이 들어 깨어보니 온 전신이 설사로 인해 똥범벅이 되어 있었다. 어느새 가을이 되어 조석으로 서늘한 때였지만 다 벗어버리고 모포로 몸을 감고 식사를 타러 다녔다.

그렇게 해서 타온 밥을 먹지 않고 밥 한그릇으로 팬티 하나와 바꾸고, 또 이튿날 밥 한 그릇으로 런닝 하나와 바꾸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며칠이 지나서야 복장을 다 갖출 수 있었다.

포로로 수용되어 있는 자들이 한참 먹을 시기인 젊은 사람들이라 적은 급식량으로는 항상 배가 고픈 상태였기 때문에 옷과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몸은 회복되지 않고 곧 바로 이질로 밥을 먹기만 하면 계속 그대로 설사로 나와 버리는 고로 얼굴과 몸 전체는 뼈만 앙상히 남게 되었다.

철수직전 흥남부두

그런데 전황이 아군에게 불리하게 변해 국군은 중공군에 밀려 남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 사람은 포로들과 함께 인천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 사람의 고향이 김포라서 이 지역의 지리는 훤히 아는 고로 여기서 탈출을 시도하면 성공할 것 같아 시도해 보려 해도 너무 몸이 쇠약해져 있는데다 계속 이질이 낫지 않은 상태이므로 탈출을 할 수 가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사람의 탈출을 병고(病苦)로써 막은 것을 이 사람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 당시 탈출하게 된다 해도 국군이 계속 후퇴하며 밀려 내려오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도망을 못 가게 하였던 것이다.

전세(戰勢)는 점점 불리하여 후퇴 일로에 있었던 고로 또 다시 부산으로 가게 되었다. 화물열차에다 몸을 싣고 포로들과 함께 남으로 달리게 되니 고향 김포와는 점점 멀어지니 여기서 도망 못하면 앞으로는 더욱 불리할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감으로 달리는 화물열차에서 철길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피골(皮骨)이 상접하고 쇠약할 대로 쇠약한 몸인지라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한참 후 정신을 차려보니 포로 수용소 안의 의무실이었다.

곧 이어 부산 가야수용소로 가게 되었고 그 곳에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수용소를 건설하는 작업에 투입되어, 포로를 지키며 감독하는 미군들에게 설움도 많이 받았다.

상륙함

몸이 아픈 사람이나 성한 사람 상관 없이 포로들을 때리고 가혹하게 작업을 시키는데, 이 사람은 이질이 걸려 기운이 없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데도 그들은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행동이 민첩하지 못하다 하여 군화발에 채이고 총개머리판에 얻어 맞는 고통을 당하였던 것이다. ‘갓댐 (God Damn)’하고 소리지르며 가혹하게 일을 시키는데 몸이 아프다는 표시를 해도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쇠약한 몸을 끌고 무거운 돌을 운반하다가 넘어지고 쓰러지면 쫓아와서 매를 가하는 고로, 다시 그 돌을 짊어지고 가다가는 또 쓰러지고 하는 이런 비참한 상황은 당해 본 자가 아니면 말로만 들어서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가야 수용소에서 약소민족의 설움을 뼈속깊이 맛보았다. 후세에는 다시 이런 비참한 꼴을 당하지 않아야 되겠다는 굳은 각오와 결심을 하였다.

국력배양에 젊음을 불태을 것을 가슴깊이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이를 갈아부치고 참고 또 참았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전황은 점점 불리하다는 소문과 함께 음력 정월 초하룻날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앞으로 닥쳐을 운명앞에 초연(超然)한 자세로 상륙함에 몸을 실었다.

오끼나와로 간다, 하와이로 간다, 괌도로 간다, 바다에 몽땅 수장(水葬)시켜 버릴 것이다라는 등 구구한 소리와 억측들이 난무한 가운데 항해는 계속되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이 상륙함은 영화관, 교회 등의 시설을 갖춘 큰 군함이었는데, 5천여 명이 먹을 수 있는 밥이 나무로 제조된 둥근 밥통에 담겨 크레인에 의하여 밧줄로 윗층에서 아랫층으로 내려왔다.

여러 단계를 걸쳐 배식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 동안을 배고픔을 참지 못한 많은 포로들이 일시에 몰려 그 큰 밥통에 매달려 손으로 밥을 퍼서 먹는 고로 힘이 약한 자는 밑에 깔려서 죽어가고 힘이 강한 자는 밥을 실컷 먹는 일대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이 때 밑에 깔려 죽은 자가 수십 명이고 부상자는 수백 명에 이르는 큰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곳이 거제도였다.

도착한 곳이 어딘지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우리를 실은 상륙함이 닻을 내리며 정박하는 것을 보아 목적지에 도착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너무 날씨가 추워 작은 배로 옳겨 타는 구름다리 바닥이 얼어 붙어 몹시 미끄러워 내 바로 앞에 내리는 사람이 미끄러져 바다로 빠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구조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참으로 포로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이었다. 큰 배 밑에 떨어지면 배 밑에서 끌어 당기는 힘이 있어 빨려 들어가기 때문에 수영을 잘 하는 자도 살아 나오기 어려운 것이다.

조심조심하여 구름다리를 건너서 작은 배로, 작은 배에서 육지에 도착해 보니 거기가 바로 경상 남도 거제군 일운면 고현리의 거제도 포로수용소였다. 거제도는 우리 나라에서 제주도 다음 두 번째로 큰 섬이며, 부산, 진해, 마산, 충무와 인접하고 있다. 1970년 경에 육지인 통영군과 육교를 건설하였고, 면적은 389km2이다.

6.25당시에는 상주인구가 약 10만을 헤아렸으나, 근래는 삼성과 대우 두 조선소가 생겨, 인구가 많이 늘어난 지역인데, U.N군이 이 곳에서 포로수용소를 3년간 운영하였기 때문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의 3년

거제도 포로수용소내 급식장

이 곳에서 나는 포로 아닌 포로로서 연단과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3년을 지내게 되었다.

논바닥 위에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 한 사람이 누으면 그 다음 사람은 발쪽에 머리를 두고 눕고, 또 바로 누으면 그 다음은 거꾸로 눕고 하여, 수백 명이 전부 옆구리가 가마니에 닿게 모로 누워 잤다.

그리고 그 위에 담요를 한 장씩 덮고 잠을 자는데 몇 분만 지나면 체온에 의하여 가마니에 붙어있던 얼음이 녹아 가마니가 축축히 젖어 오는 고로 옷이 젖고 몸이 젖을 뿐만 아니라 옆에 누운 사람들의 발냄새가 코를 찔러오는 것이었다.

그러한 악취와 추위 속에서도 군소리하지 못하고 잠을 자는, 그야말로 인간으로서는 최하의 밑바닥 생활을 했다. 1개 수용소 포로 인원이 5천 명이었는데 이 사람이 소속된 수용소는 61포로수용소였다.

이 5천 명을 통솔하는 통솔책임자를 뽑는데, 처음 50명을 뽑는 중에 이 사람이 뽑히었고, 다음 10명을 뽑는 데도 이 사람이 뽑히었고, 나중엔 5명을, 다음은 2명을, 그리고 마지막 한 명에 바로 이 사람이 뽑히게 되었다.

5천 명을 울렸다 웃겼다 하며 손아귀에 쥐고 휘두르는 통솔책임자를 어떤 개인이 지명함도 아니요, 5천 명의 의사를 종합하여 투표와 거수 등으로 나이 20의 이 사람을 뽑았던 것이었다.

그 속에는 대학교수, 목사 등 사회에서 활약하던 지도급 인사들도 있었지만 그들을 물리치고 3년 동안 61포로수용소를 좌지우지했던 것이다. 다른 수용소는 책임자가 몇 개월 만에 바뀌었지만 이 사람이 맡은 61포로수용소만은 책임자가 3년 동안 바꿔지 않았다.

똥통을 운반중인 포로들: 인민군 포로들은 반공주의자를 인민재판을 통해 처형하고 토막낸 시체를 똥통으로 위장하여 바다에 버렸다.

그러나 이 61포로수용소 안에는 극좌익계에 물들은 사람들이 많아 어느 수용소보다 우익계 청년들이 학살을 당하고 보복을 받으며 가장 곤욕을 치룬 수용소였다.

수시로 빨갱이들이 난동을 일으켜 우익계 청년들을 숙청시켜 주도권을 잡고, 태극기를 내리고 빨갱이 깃발을 올렸다.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과 같이 죽이는 처참한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어떤 때는 이 사람을 모포로 뒤집어 씌워놓고 수십 명이 닥치는 대로 때리며 발로 밟아 짓이기기도 했다.

그런데도 갈비뼈 하나 상하지 않았으니, 하나님깨서 이 사람을 항상 지켜주셨던 것이다. 보통사람 같으면 골병이 들어서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수용소내에서 폭동이 일어나니까 미군들이 기관총을 연발로 난사하여 수많은 포로들이 총에 맞아 쓰러져 죽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앞사람, 옆사람, 뒷사람이 기관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는데도 이 사람만은 총에 맞지 않고 상한 데가 없는 것을 보고, 참으로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막사주변에 반공포로 희생자들을 암매장 했던 곳

그러던 어느 날 밤중에 잠을 자고 있는데 누가 와서 “조동지!, 조동지!” 하고 깨우는 고로 일어나니 잠간 천막 밖으로 나오라고 하기에 밖에 나가니 “잠시 후 조동지를 죽이기로 되어 있으니, 지금 속히 몸을 피하시요!” 하고 이북 말씨로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더니

“그건 알 필요 없다. 다만 내가 죽을 상황에 처하였을 때 당신의 도움으로 살아났으므로 당신은 나의 생명의 은인인데 당신이 죽게 되었으니, 그 은혜를 갚는 의미에서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니 생각을 고쳐 먹고 인민공화국으로 돌아오시오”라고 하며,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옆의 천막으로 피해 누워있으려니, 잠시 후 큰 돌을 가지고 사람 머리를 찧어 죽이는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이 사람 바로 옆에 누워있던 사람이 이 사람 대신 억울하게 희생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후부터 이 사람은 얼굴에다 검정칠을 하고 길게 내려쓰는 영국군 모자를 눌러쓰고 다녔다.

포로수용소내 인민군 최고위장교 이학구 대좌: 조희성님이 대동군 치안대장시절에 이 사람을 살려주었다는 사실 여부는 분명치 않습니다.

식당에서 밥을 먹기 위하여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으면 노출이 될까봐 밥을 타러 가지도 못하고, 김포 고향친구가 타온 밥을 둘이서 나눠먹곤 하다가 때로는 미안한 생각이 들어 계속 먹지 못하고 굶기도 하며 지냈으나 일주일만에 빨갱이 골수분자들에게 들키고 알았다.

이 빨갱이들은 우익 청년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버리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대동군 초대 치안대장을 지낸 바 있는 이 사람이 제 1차로 숙청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좌익청년들에게 잡혀서 빨갱이 본부로 끌려 가는데, 그들은 빨갱이 대장에게 “조희성이가 죽은 줄 알았는데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어 잡아왔습니다” 하고 보고하였다.

그 빨갱이 대장이 “그 놈은 독안에 든 쥐새끼니까 그 곳에 내버려 두고 너희들은 빨리 이쪽으로 집합해!” 하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일언지하에 빨갱이들은 이 사람을 내버려두고 돌아서서 건물 반대쪽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음성이 며칠 전 밤중에 죽음을 피하게 해 준 음성 인데다가 현재 취하는 행동도 도망가라는 신호로 느껴지는 고로, 있는 힘을 다하여 도망쳐 높이 막아놓은 철조망을 하나 기어 올랐다.

기어올라 넘고 또 한 철조망을 기어 올라갈 무렵 빨갱이들이 쫓아와 돌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 많은 돌들이 사정없이 날아오면서 몸에 맞기도 하였으나, 철조망 꼭대기에 올라 갔을 때 뒷통수에 정통으로 맞고 의식을 잃고 철조망 밖으로 떨어졌다.

 

수용소 정화작업을 마치고 반공포로 석방하라는 시위를 주도

조희성님이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반공영화 <철조망을 넘어서> 의 한 장면: 1970년대에 TV상영

철조망에서 떨어진 후 미군 앰브런스에 실려 야전병원으로 후송 되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머리와 몸에 붕대가 감겨 있고 옆에는 김아열 선교사가 앉아 있었다.

지금도 뒷통수에 흉터가 크게 있는데 바로 그 61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할 때 둘에 맞은 상처이다. 김아열 선교사는 전남 광주사람으로 포로수용소를 출입하며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상처를 완전히 회복한 다음 김아열 선교사의 협조로 200여 명의 우익청년을 대동하고 미군의 지원을 받아 좌익에 물든 빨갱이 골순분자들을 색출, 별도로 수용하고 반공주의 일색으로 만들어 버리는 혁명 작업을 개시하였다.

이 사람이 선두에 서서 먼저 61수용소를 완전히 뒤집어 엎고, 빨갱이 깃발을 내리고 대신 태극기를 달았으며 전 인원을 집합시켜 놓고 이 사람이 악질 빨갱이 들을 직접 지적하여 잡아내어 수용소안의 영창에 가두었다.

더 이상 빨갱이들이 난동을 부리지 못하게 정화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사람이 61수용소에 있었던 고로 사람들의 사상을 이미 파악해 놓았기 때문이다.

칼 도끼 철조망을 띁어서 만든 사제무기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62수용소에 들어가서 뒤집어 엎으려 하였으나 빨갱이들의 세력이 너무 강하고 더욱이 미군 장성 돗드 준장이 빨갱이들에게 납치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63수용소, 65수용소, 66수용소를 차례로 뒤집어 엎는데 성공 하였던 것이다. 수용소 정화작업을 성공리에 끝마치고 나서 이 사람은 ‘포로 아닌 포로를 석방하라’ ‘반공 포로 석방하라’ 하는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혈서를 써서 이승만 대통령과 국회의장, 유엔 등에 제출하였더니 이 건의가 관철되어 마침내 정부에서 반공포로를 석방키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반공포로 환영식이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요인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경북 영천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환영사에 이어 반공포로 12만 명의 대표로 이 사람이 답사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연설문을 손수 작성하 여 그 동안 생생히 체험했던 공산주의의 악랄함을 전 세계에 폭로하였다.

군인도 아닌 대학생 신분으로 포로생활에서 당한 기막힌 사정을 말하게 되니 만장한 청중도, 이승만 대통령도, 프란체스카 여사도, 각부 장관을 비룻한 정부요인도 모두 다 울어 눈물바다가 되었던 것이다.

포로가 아닌 20살 젊은 대학생이 인민군에게 죽을 때까지 매를 맞고 이북으로 끌려가면서 당한 고초와 설움, 총살 집행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거제도 포로수용소까지 가며 받은 약소민족의 설움, 수용소내에서 수없는 폭동과 아비규환 속에서 죽음의 고비고비를 당해야만 했던 기막힌 내용을 시간의 제약으로 대강만 열거하여 말했는 데도 온통 울음바다로 변했던 것이다.

이는 한 포로의 설움이면서, 또한 한국 민족 전체의 비극을 대변한 것으로서 지금도 그 연설문이 역사의 한 페이지로서 보존되어 있을 것이다. ‘철조망을 넘어서’ 라는 전쟁영화도 이사람을 주인공으로 하여 제작된 반공영화였던 것이다

 

*주: 「거제도 포로소요사건」 에 대하여 역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당시 수용소장 도트준장

1. 5월 7일 거제도 포로수용소장 돗드준장을 공산포로들이 납치하고 그 석방조건으로서, 공산포로에 대한 대우를 개선할 것.

2. 자유의사에 대한 포로송환 방침을 중지할 것.

3. 포로의 심사를 중지할 것.

4. 포로의 대표위원단을 인정할 것 등 4 항복을 요구하였다.

돗드 준장은 납치된 지 1개월 78시간 5분만인 6월 10일에 겨우 구출되었다.

그런데 5월 20일 부산 포로수용소에서 공산포로들이 경비병에 반항하다가 1명이 피살되자 거제도 수용소의 공산포로들은 또 다시 6월 7일에서 10일에 걸쳐 폭동을 일으켜 다수의 사상자(死傷者)를 내는 대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 폭동 중에 105명의 반공포로들이 공산포로들에게 무참하게 학살되었다.

-金 益達 發行 百科事典에서 발췌

6.25사변 전반기

죽음을 각오한 예배 인도

6.25전쟁 당시 전차를 앞세워 서울에 들어오는 인민군

이 사람이 20살 때 6.25 동란이 일어났다.

북괴군이 순식간에 쳐내려 오는 바람에 이 사람은 피난갈 생각을 못하고 고향으로 내려 갔는데 일요일이 되어서 김포읍에 있는 장로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목사님들이 모두 피신하여서 예배를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사람은 학생 신분이었지만 교회 종을 치고 예배를 인도하였다.

예배가 시작되고 조금 지나자 인민군이 나타나 출입구에서 이 사람을 향하여 사격자세를 하고는 총을 쏘려 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시간 반 정도 예배를 인도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하나님을 증거하다 죽으면 순교가 되어 천당가는 줄 알았던 고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예배를 마치고 그냥 집으로 갔으면 무사했을텐데 이 사람은 집집 마다 다니며 전도를 하고 다니니, 인민군이 옆에 다가와 대검을 꽂은 총으로 옆구리를 찌르며 이 사람을 연행하였다.

그래서 잡혀간 곳이 면사무소에 설치한 「인민군 환영 위원회」 라는 곳이었다.

마을사람들이 인민군들 앞에서 데모

인민재판 광경: 법에 기준한 재판이 아니라 참석한 사람들이 유무죄를 결정함. *사진은 특정 사실과 무관합니다.

이 사람이 인민군에게 끌려간 소문이 마을에 퍼지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면사무소에까지 와서 “이 청년은 모범적인 청년이니 죽이면 안된다”고 하며 인민군들 앞에서 데모를 하였다.

당시 인민군들이 점령하면서 많은 우국지사들을 잡아다 죽이면서 공포정치를 했을 때 마을 사람들이 이 사람이 인민군에게 붙들려 갔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와 데모를한 것은 공산 치하에서는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외쳤다. “그 청년은 우리 마을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없어서는 안 될 모범청년이다. 그 청년을 죽이려거든 우리를 먼저 죽여라!”

그런데 인민군 환영위원회 위원장이란 사람은 이사람의 국민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었던 김낙영씨였던 것이다.

김선생님은 이 사람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분이었다.

그는 이사람이 총살형을 당하게 될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사랑스런 제자를 석방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이 사람을 내보내게 되면 자신의 위치가 위태로와질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그 때 마을 사람들의 데모가 있자 이를 핑계거리로 삼아 김선생님은 이 사람을 풀어 주었다.

김낙영 선생님은 이 사람에게 조용히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지금이 어느 때인데 전도를 하고 다니느냐? 오늘 너는 내가 아니었다면 틀림 없이 죽을 터인데, 내가 살려줄 테니 앞으로는 절대 그런 행동을 하지 말고, 인민군에 들어와 일을 해라.” 하며 내보내 주었던 것이다.

지방 빨갱이에게 잡혀 죽을때 까지 매를 맞다

인민군

인민군으로부터 석방되어 집에와 있으니 이 사람이 유능한 청년이라는 것을 안 인민군은 무슨 대회다, 무슨 모임이다 하면서 이 사람 더러 나와서 자기네 일에 협조하라고 채근하였다.

자꾸 거절하다보니 도저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는 고로, 자전거에다 보리쌀 한 말을 싣고 김포를 떠나 서울 흑석동 하숙집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그런데 노량진쯤 오니까 유엔군 비행기가 무차별 폭격을 하는 것이었다.

폭격이 심하여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인데, 하늘을 보니 집체만한 포탄이 머리 너머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전봇대를 붙잡아야 산다’ 하는 생각이 들어 자전거를 버리고 도로변에 있는 전봇대를 부등켜 안아 구사일생로 살아났다.

포탄이 떨어진 자리는 큰 연못 정도의 웅덩이가 파였는데, 파편이 비오듯 하며 폭풍으로 가까운 건물이 파괴됨은 물론 멀리있는 건물의 유리창까지 다 깨지는 것이었다.

그 때 이 사람이 전봇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폭풍에 날아가 죽었을 것이다.

간신히 죽음의 위기를 모면하여 하숙집을 향해 오는데, 거의 다와서 흑석동 지방 빨갱이에게 잡히게 되었다.

뒤에서 총부리를 들이 대었다. “너, 조희성이지? 손들어!” 이 사람은 두 손을 들고 흑석동 인민군 본부로 끌려갔다.

빨갱이들이 볼 때, 이 사람은 집집마다 전도를 하고 다니는 열렬한 예수쟁이였으며 형은 경찰관이니 그들의 눈에는 가시 같은 반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빨갱이들에게 잡혀 끌려가는 이 사람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지방 빨갱이들에게 잡혀간 곳이 흑석동 인민군 본부 지하실이었다.

어두컴컴한 지하실 가운데에는 백열등이 달려 있고 밖으로 나 있는 조그만 창에선 희미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서늘하고 음습하여 공포 분위기가 풍겨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네모난 마차철주를 이 사람의 양쪽 무릎오금에 끼워 놓고 꿇어 앉혔다.

그낭 가만히 앉아 있어도 너무 아파 비명소리가 저절로 나오는데 그들은 이 사람이 못 일어서도록 한 사람이 팔 하나씩 양쪽에서 잡고 내리누르며 또 다른 사람은 구두발로 무릎과 허벅지를 짓 밟았다.

그러면서 너의 형이 있는 곳을 대라는 것이었다.

당시에 이 사람의 친형은 수도 경찰국에 근무하는 경찰관이었다.

이 사람이 말을 하지 않자 그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곡괭이 자루로 이 사람을 인정사정없이 개 패듯 하는 것이었다.

매질이 너무 아파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너무 혹독한 고문이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 때 형님은 김포 고향집에 숨어 있었는데 이 말을 하게 되면 온 가족이 몰살당할 것은 자명한 것이었다.

차라리 나 하나가 희생되어 죽는 것이 낫지 온 가족이 몰살당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자 말을 못하도록 혀를 깨물었다.

“윽” 하는 소리와 함께 입안에서 피가 터지자 빨갱이들은 “이 간나 새끼 악질 반동이구만” 하며 대여섯 명이 있는 힘을 다하여 사정없이 때리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매에 의식을 잃고 쓰러지면 양동이에 찬물을 떠 와서 끼얹어 붓고 꿈틀거리면 또 곡괭이 자루로 사정없이 때리고 또 찬물을 끼얹고 하여 이 사람이 죽을 때까지 매질을 가하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이 사람의 온 몸과 팔다리가 마치 개구리가 죽을 때 다리를 떨다가 잠시 후에 죽는 것처럼 그렇게 부들부들 떨다가 「푹」 하고 꺼지는 상태가 되니 그제서야 그들은 이 사람이 죽은 줄 알고 몽둥이질을 그치고 가마니를 가져다가 이 사람 위에다 덮었던 것이다.

이 사람이 그 때의 상황을 어떻게 알았는가 하면 그 당시에 흑석동 감리교회 이찬영목사 사모님께서 자기 교회 청년 지도교사가 인민군에게 끌려 가는 것을 보고 멀찌가니 따라와 이 사람이 인민군 본부 지하실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창틈으로 이 사람의 매맞는 광경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지켜 보고 돌아가 이찬영 목사님에게 말했던 것이다.

그 후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이찬영 목사님이 이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도 한편 반가와 이 사람의 손을 잡고 그렇게 매를 맞고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있느냐? 하나님을 열심히 믿더니 부활하셨나 보다고 하며 그 당시의 일을 세밀히 말씀해 주셨던 것이다.

이 사람은 한 시간 반 가량 인민군에게 뭍매를 맞았는데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중에도 하나님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꺼져가는 생명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부르며 이 생명과 몸과 모든 전체를 맡기며 하나님께 매달렸던 것이다.

마포 형무소로 이송

모시 옷: 모시 풀로 만든 까끌 까끌한 느낌의 옷, 주로 여름철에 헐렁하게 입음.

의식을 잃은 후 몇 시간이 지나 정신이 들기에 몸을 움직여 보려고 해도 도저히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 사람의 살이 매질에 얼마나 부었는지 헐렁한 여름 모시적삼이 꽉 끼였으며 옷이 터져 그 사이로 살이 여기 저기 튀어 나왔다.

한참 애를 쓰다가 간신히 몸을 뒤집는데 성공하여 조금씩 기어 계단을 올라가니 인민군 장교가 지나다가 이 사람을 보고 부하에게 물었다.

“이 간나 새끼는 뭐야?”

“이 새끼는 반동 아새끼입니다.”

“그럼, 마포 형무소로 이송하라우!”

이리하여 이 사람은 마포형무소로 끌려가게 되었다.

인민군에게 끌려 가는 도중 노량진 도로변에 서 있는 사람들 중에 고모부가 눈에 보이기에 소리쳐 부를 수도 없고 하여 이 사람이 인민군에게 끌려간다는 표시로 피투성이가 된 웃옷을 벗어서 도로변에 던졌다.

그 옷을 영등포에 살고 계셨던 고모부님이 주워서 김포집에 가져다 주었다.

그 옷은 이 사람이 방학 때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야학에서 공부를 가르쳤을 때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고마움의 표시로 나에게 선물한 길쌈모시 옷이 분명하므로 집에서 이 사람이 인민군에게 붙들려 갔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죽은 시체라도 찾으려는 사람들… *사진은 특정 사실과 무관할 수 있습니다.

그 후 부모님들께서는 이 사람의 소식이 전혀 없는 고로 죽은 줄 알고 젊은 사람들의 시신만 있으면 들쳐보며 이 사람의 시체를 찾곤 하였다.

한강 다리가 폭격에 파괴되어 버렸기 때문에 인민군들은 포로들을 노량진을 거쳐 영등포 염천교까지 끌고 갔다.

그런데 가는 도중 내가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한다고 구두발로 사정없이 걷어차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아무리 바르게 걸어 보려고 애를 써도 숨가쁘게 가해오는 고통에 몸의 균형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간신히 마포 형무소에 이르러보니 그 안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었다.

현직 국회의원, 경찰 간부, 대한 청년단장, 군인 등 저명인사들이 천여명 넘게 수감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이 사람이 가장 나이가 어렸지만 가장 처참하게 고문을 당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 사람의 사정을 듣고 난 후 이구동성으로 “어린 것이 죄를 지었으면 얼마나 지었다고 저 모양으로 만들어? 잔인한 놈들..” 하면서 같은 처지이지만 이 사람을 가여워해 주고 사랑해 주었다.

이 사람은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알 수 없는 암담한 현실 속에서 슬픔의 눈물을 안으로 삼키고 오직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텅 빈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갔던 것이다.

철사줄에 묶여 북으로 북으로

인민군에 끌려가다가 총살당해 길가에 널부러져 있는 국군포로들

공산당들은 마포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천여 명의 우국지사들을 모두 죽여 없애기로 계획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마포 형무소에서 4, 5일을 지나는 동안 쌀 한 톨,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던 것이다.

배가 고픈 것은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었으나 목이 타는 갈증은 해소 할 수 없어 밖에 있는 간수에게 “선생님! 목이 타서 견딜 수 없어요. 물 한 모금만 주세요” 하고 애원하니 그 간수가 한다는 말이 “이 반동 아새끼가 물은 무슨 물이야? 너희들은 곧 죽을 놈들이다” 하며 쌀쌀하게 면박을 주었던 것이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알 수 없는 가운데 며칠이 지났다.

하루는 인민군들이 모두 나오라 하여 밖으로 나갔더니 철사줄에 두 손을 꽁꽁 묶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다시 긴 쇠사슬로 앞사람과 뒷사람을 이어 일렬 종대로 만들어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낮에는 비행기의 폭격이 심하고 노출이 되기 때문에 이동을 하지 않고 어두워지기만 하면 북쪽으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유행가 가사 그대로 이 사람은 철사줄에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맨발로 절며 절며 미아리 고개를 넘었다.

그리고는 의정부, 동두천, 전곡, 연천, 평강을 거쳐 신고산을 돌아 원산까지 끌려갔던 것이다.

끌려가는 사람들이 모두 고문을 많이 당했기 때문에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므로 하루 밤에 10리 정도 가면 먼동이 트면서 날이 밝아오기 때문에 원산까지 가는 동안 무려 한 달이 걸렸다.

그들은 , 끌고 가는 중에도 쌀 한 톨, 물 한 모금을 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너무너무 배가 고파 풀을 뜯어 먹었다.

그것도 인민군 감시병에게 들키면 사정없이 총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후려치기 때문에 몰래 뜯어 먹어야 했다.

그래서 낮에 숨어있는 자리에는 풀이 남아나지 않았다.

이 사람은 풀을 뜯어 먹으면서 소가 풀을 맛있게 먹는 심정을 알 것 같았다.

풀의 종류가 여러가지 있지만 그 중에서 쑥을 뜯어 먹으면 흐릿한 정신이 좀 맑아지면서 좋은 요기가 되었다.

평강 쯤에 가니 누가 옥수수를 먹고 속배기를 버린 것이 눈에 띄었다.

감시병이 눈치채지 못하게 몰래 주워서 흙이 묻은 것을 옷에 털어 버리고 먹었더니 정신이 번쩍 났던 적도 있었다.

이 사람은 너무너무 목이 말라 오줌을 받아 마셔야 했다.

노랗다 못해 붉은 피색이 도는 텁텁한 오줌을 손에 받아서 입을 축였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오줌이 더럽다 냄새가 난다하는데 그것은 목이 마르지 않을 때의 소리이다.

이 사람에게는 오줌이 너무나 달고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것이었다.

인민군 개인화기 다발총: 개머리판은 사격시 어께에 붙이는 총구 반대쪽 납작한 부분.

또 어떤 사람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니 물이나 실컷 먹고 죽자하고 동료들 쇠사슬에 묶인 채 동료들을 끌어 당기며 논에 가서 물을 먹다 인민군의 총 개머리판에 머리를 맞아 죽는 것이었다.

그러면 인민군은 죽은 사람을 쇠사슬에서 풀어 논에다 버리고 다음 사람에게 쇠사슬을 연결해 끌고 가는 것이었다.

그들은 사람의 목숨을 파리보다도 못하게 여기는 집단이었다.

필사의 탈출

엄마는 죽었는데… 죽은 엄마 곁에서 울고 있는 아이들…

전쟁이라는 상황은 너무나 비참한 것이었다.

끌려가는 길목마다 죽은 시체가 즐비하게 늘려져 있는데, 그 모습은 너무도 참혹하였다.

아기를 업은 어미의 죽음은 끌려가는 사람 모두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어미는 죽었는데 아기는 엄마를 부르며 눈이 붓고 목이 쉰 상태로 울고 있는 것이었다.

비행기의 기관총에 맞아 죽은 군인들의 시체, 인민군들이 무차별 학살한 양민들의 시체, 그 죽음들은 형형색색으로 이 사람의 마음에 부딪쳐 오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루 이틀만 잠을 안 자도 피곤하여 비틀거리는 법이다.

그러나 놈들은 원산까지 가는 한 달 동안 잠을 한 숨도 재워주지 않는 고로 너무너무 졸려 견딜 수가 없어 철사줄에 매여 가면서도 졸았다.

졸면서 걷다가 걸음을 비틀거리든지 하면 따발총으로 쏘아 죽여 연결된 쇠줄에서 풀어버리는 것이었다.

나이 스무 살에 참으로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연단을 받았으며, 인간의 탈을 쓰고 그 이하가 없을 정도로 밑바닥 중의 밑바닥 생활을 했던 것이다.

원산에 도착하니 놈들은 일을 부려먹기 위하여 주먹밥을 주었다.

그 때부터는 살 만했으나 틀림없이 종래에는 죽일 것이 확실하게 느껴지므로 탈출을 생각하게 되었다.

같이 끌려간 분들이 대부분 정부의 요직에 계셨던 분과 사회 저명 인사로서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분들이지만 이 사람은 그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고 신분 또한 학생이었다.

끌려간 많은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공산주의 빨갱이 놈들이 참으로 지독하구나

너 같은 학생이 무엇을 안다고 또 무엇을 하였다고 이토록 모질게 고통을 주어 고생을 시키다 마지막에는 죽여 없앤단 말인가?

우리들은 그래도 반공을 해서 그러려니 하겠지만 이제 자라나는 젊은 학생까지 무참히 죽이는 공산주의는 참으로 비인도적이요 악질이구나하며 혀를 차고 탄식을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 놈들이 언제라도 필경은 죽이고 말테니, 비록 우리는 죽더라도 너는 이제 스무살 학생이니 청춘이 아까와서라도 한번 탈출해 보라” 조언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죽을 바에야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니까 이왕이면 탈출이라도 해보자 하여 도망가기로 결심을 하였다.

원산폭격: 인민군 보급시설에 대한 아군측 폭격, 이 폭격으로 포로들 전부 사망하였다고 전해들음. 조희성님은 폭격 이전에 탈출하여 죽음을 모면함.

인민군들은 우리들에게 전쟁 물자 옮기는 일을 시켰다. 밀가루 포대 같은 것을 고개 하나 넘어 저쪽으로 메어 나르는 운반작업이었다. 이 사람은 탈출을 결심하고 한 번 밀가루 포대를 메고 중간 고개를 지나 저쪽까지 운반해 보니, 그 곳에 보초 하나가 고갯마루에 서서 총을 들고 지키고 있었다.

경비가 허술한 편이었다. 놈들은 감히 포로들이 탈출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모양이었다. 이 보초 하나만 처치하면 탈출할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두 번째 포대를 메고 고개에 올라와서 그 인민군이 있는 곳을 향하여 마치 다리에 힘이 없어 비틀거리는 시늉을 하며 다가갔다.

그리고는 “어휴, 힘들어” 하면서 힘에 부쳐 포대를 떨어뜨리는 척하였다. 포대를 놓는 동시에 그 보초를 발길질로 힘껏 내질렀다. 이 사람의 발길질에 차인 보초의 총이 보초의 이마를 치자 그 보초는 뒤로 넘어지면서 입에 거품을 흘리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이 사람은 어림잡아 남쪽이라고 생각되는 곳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달음질을 쳤다. 그런데 남쪽으로 도망을 간다는 것이 그만 방향이 틀려 북쪽으로 가게 되었다.

그 당시는 아직 군에 입대하지 않았던 때라 방향을 알 수 있는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며칠간 무작정 도망을 가다가, 너무나 배가 고파 밥을 훔쳐 먹으려고 어떤 민가의 담을 넘어 부엌에 들어갔다.

평양 신양리 형무소로

여기저기 밥을 찾아 보았으나 밥은 없고 고구마 삶은 것이 있기에 막 먹으려고 하는데, 누가 뒤에서 “손들어!” 하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손을 들고 뒤를 돌아보니, 붉은 완장의 내무서원 – 우리 남한에선 경찰관 – 들이 총을 들이대고 있는 것이었다.

고구마는 입에 대보지도 못하고 내무서로 끌려갔다. 그 곳은 함경남도 고원군 탄광역전이었다. 원산에서 포로 한 명이 인민군을 해치고 탈출하였다는 긴급연락을 받은 원산 근처 백 사오십리는 완전 비상 상태였는데 이 사람은 그것도 모른 채 섣불리 행동하다 그만 잡히고 만 것이었다.

이 사람을 잡아서 밤새도록 고문을 가하는데 인간으로서는 차마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들은 이 사람에게 재미로 고통을 가하였으며 사람의 생명을 놓고 장난짓을 하였던 것이다.

이 사람을 발가벗겨 거꾸로 매달아 놓고 가죽 채찍으로 몇 사람이 돌아가면서 후려치며 고추가루물을 이 사람의 코에 집어 넣었으며 또 전기 고문을 가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밤새도록 고문을 한 다음 양손을 머리 뒤로 하여 묶어 놓고는 평양 신양리 형무소로 압송하였다.

서울에서 원산까지 한달동안 끌려간 후, 탈출, 방향을 잘못잡아 북쪽 고원군에서 체포됨. 이후 평양 신양리 형무소로 이송

신양리 형무소에는 한 사람이 들어가 앉아도 여유가 없는 작은 독방이었는데 그들은 거기에 6명을 집어 넣었다. 한 사람이 들어가도 꽉차는 독방에 6명을 집어 넣으니 몸을 움직일 수 없으므로 쥐가 나서 한 사람씩 죽어 나가는 것이었다. 쥐가 난 곳을 주물러 주면 주물러 주는사람의 손에 쥐가 나기 때문에 옆사람이 쥐가 나도 주물러 줄 수 조차 없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죽어 나가면 또 다른 사람을 집어 넣기 때문에 항상 6명이 꽉 찬 상태로 있었던 것이다. 밥이라고는 하루에 한 번씩 주는데 밀 삶은 것에 모래를 섞어 주는 것이었다.

그것을 주면서 하는 말이 “너희들은 이왕 죽을 놈들이니까 총살을 시키면 총알이 아까와. 그러니까 모래를 골라내지 말고 그냥 먹고, 맹장이나 걸려서 죽어”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니 빨리 죽자 하면서 모래째 먹고는 얼마 후에 참으로 고통스럽게 죽어나가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불안한 마음을 갖고 초초로 긴장 속에서 지내기 때문에 피가 썩어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 갔다.

그러나 이 사람만은 항상 마음이 태평한 상태에서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 뜻에 맡긴 채 한 번도 실망이나 낙심을 하지 않고 구원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얼굴이 환한 상태로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간수들도 “이 반동아 새끼는 먹는 것도 없는데 얼굴이 좋다”면서 때리기도 하였다.

이 사람은 모래밀밥을 입 안에 넣어도 모래는 골라내고 밀만 먹었다.

하루는 모래를 골라 내다가 간수에게 들켜 긴 막대기로 머리를 얻어 맞고 정신이 아찔한 적도 있었다.

이 사람은 감방안에서도 끊임없이 찬송을 불렀다.

「죄짐맡은 우리 구주」라는 찬송을 콧 노래로 부르니 같이 있던 사람들이 노래 곡조가 너무 좋다며 가르쳐 달라고 하기에 가르쳐 주어 같이 부르기도 하였다. 이 찬송을 부르니 하나님께서 폭포수와 같이 은혜를 주셨던 것이다.

또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라는 찬송을 콧노래로 부르며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이 독방에 들어온 죄수는 모두 중벌로 다스려 죽이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의 사정을 들어보니, 이 사람만큼 매를 맞은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다시는 그러지 않겠으니 봐달라고 하면서 놈들에게 항복 했기 때문에 매를 피할수 있었으나 이 사람만은 불의 앞에서 결코 굴하지 않고 항복을 하지 않았던 고로 죽을 때까지 그 모진 매를 맞았던 것이었다.

총살 집행

평안남도 대동군

한 달 반쯤 지난 어느 날 오후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다.

모두들 걸음을 걸을 수 없어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기어서 나오기도 하였다. 그들은 죄수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한 30분쯤 운동을 시킨 다음 트럭에 태웠다. 해가 넘어가는 오후에 어디로 데려가는 것일까?

모두들 불안한 심정으로 차에다 몸을 실었으나 차는 곧 출발하였다. 트럭에서 내려보니 도착한 곳은 평양 서포 뒷동산이었다. 그 곳은 서울의 망우리 공동묘지 같은 평양시 근교의 공동묘지인데, 동산 7부 능선쯤에 큰 구덩이가 파여져 있었다.

놈들은 우리들을 총살시킨 후 거기다 묻으려는 작정이었다. 500여 명을 모두 총살시키는데 한 번에 열 명씩 총살을 시키는 것이었다. 제일 마지막에 총살을 당하는 차례에는 여섯 명이 서게 되었는데 그 속에 이 사람도 끼게 되었다.

500명 집단 총살이 집행되었던 대동군 서천면내 서포, 주변에는 저모산, 봉수산, 소형제산, 대형제산이 표시되어 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오백 명이 죽는 광경을 끝까지 다 볼 수 있었다. 말뚝 앞의 큰 구덩이에는 시체가 가득 쌓여 있었고 총잡이는 불과 30m 전방에서 총구를 겨냥하며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덤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 이 영혼을 맡아 주옵소서하고 마음 속으로 기도를 하였다.

그 때는 예수를 증거하다 죽는것이 순교인 줄 알았을 때였다. 불현듯 부모님과 가족들 얼굴이 활동사진 필름처럼 스쳐 지나가는데, 순간 ‘탕! 탕!’ 하고 두 발의 총탄이 불을 뿜으면서 이 사람은 쓰러져 버렸다.

얼마가 지났는지 정신이 들기에 가만히 생각하니 조금 전에 총살을 당한 것까지 기억이 나, 여기가 천당인가 지옥인가 알 수 없어 살을 꼬집어 보니 아픈 고로 내가 다시 살았구나 하고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위에 시체 두 구가 내리 누르고 있고 그 위에 소나무 가지가 덮혀 있었으며 흙이 1∼5cm정도 덮였는데, 죄수복의 크고 넓은 칼라가 얼굴 일부와 코를 덮은 고로 질식사를 당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 시체더미 속에서 자세히 들어 보니 아직 죽지 않은 자의 신음 소리가 났으나 그 엄청난 500여 구의 시체 때문에 살릴 수가 없었다. 필사적인 힘을 다하여 시체 두 구를 헤치고 일어나서 상처가 있는지 온 몸을 점검하여 보니 다행히 상처는 한 군데도 없고 죄수복 칼라에 총탄이 지나간 흔적으로 구멍 두 개가 나 있을 뿐이었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신 것이 너무도 분명하여 이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였다.

500여 명을 총을 쏘아 죽였으니 총이 벌겋게 달아 총구의 끝이 약간 넓어져 총알이 빗나갈 수 있었으리라 하고 생각도 해 보았으나 불과 30m 전방에서 쏘았는데 명중이 되지 않은 것은 기적이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살려주시려니까 제일 마지막에 총살을 당하게 되었으리라 하고 생각되었다.

반공운동가의 도움

인민군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들

서포 뒷동산 꼭대기로 올라가 보니 저 아래 마을에서 불빛이 번쩍 하며 가슴에 와 닿고 하는 고로 하나님! 저 불빛나는 곳으로 가라는 말씀이십니까 하니 다시 번쩍하고 불빛이 다가와 가슴에 부딪히며 그래 그래하는 암시를 주었다.

그래서 그 불빛나는 곳으로 갔다. 가는 중에도 간간히 인민군이 지나가므로 인민군 기척이 나면 숲속에 몸을 감추었다가 지나가면 또 가고 하여 불빛나는 곳에 도착하였다.

그 불빛은 어떤 외딴 집 부엌에서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것이었으며 그 안을 들여다보니 한 처녀가 설겆이를 하고 있었다.

그 처녀의 이름은 이양숙이었고, 평양 여자 사범학교 출신으로 이 사람보다 한 살이 많았다. 부엌문을 열고 그 처녀에게 솔직하게 말을 하였다.

그 곳은 인민군의 점령하에 있는 지역이니 인민군에 관련된 주민이라면 영락없이 붙들려 죽을 운명인데도, 어린애같이 순진하게 나는 서울에서 온 대학생인데 인민군에게 붙들려 감옥살이를 하다가 500명을 죽이는 서포 뒷동산의 총살 집행장에서 인민군에게 총살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살려 주셔서 살아났습니다. 저를 살려주시면 생명의 은인으로 알고 그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그 처녀는 이 사람을 보고 기겁을 하고 놀랐다. 이 사람의 옷과 얼굴은 다른 시체에서 흘러 내린 피로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다. 또 오랫동안 옥중생활로 모발이 많이 길어 있었던 고로 누구든지 처음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 처녀는 인민군과 관련이 없는 교회목사의 외동 따님으로 기독교 신자였다.

그 처녀에게는 오빠가 셋 있었는데 큰 오빠와 셋째 오빠는 목사인 아버지와 함께 산 속으로 들어가 지하 반공 운동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U.N.군 비행기가 공습을 오면 근처 인민군의 무기고와 군수물자 창고, 군부대 위치 등을 무전으로 알려주는 일도 하였다. 그런데 둘째 오빠는 노동당 중앙위원으로 김일성의 총애를 받는 진짜 빨갱이다.

그런데 그 둘째 오빠가 조금 있으면 집에 온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식은 땀이 흐르며 입 안이 말라왔다. 조금 전까지 빨갱이들에게 붙잡혀 사형집행을 당하고 왔는데 또 빨갱이에게 잡힌다면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그래서 그 처녀가 먹으라고 가져 온 삶은 고구마 두 쪽이 목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이 사람은 “성의는 고맙지만 도저히 먹을 수가 없으니 빨리 숨겨주세요” 하고 애원하였다.

이양숙은 불안해 하는 이 사람을 데리고 마당 끝으로 갔다. 거기에는 댑싸리 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는데 그 중 가장 큰 것을 당기니 그 속에 굴이 있었다. 굴 속에는 요와 이불, 등잔불, 책상 등이 있었고 볼세비키 당사(黨史)등 공산 이념서적들도 많이 있었다. 공산치하에서 이런 날이 올 것을 예상하고 이 집 식구들이 미리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인천 월미도에 상륙하는 국군과 UN군: 1950년 9월 15일

이 사람은 굴 속에 있는 동안 공산 이념 서적들을 모조리 독파한 후 이 공산주의는 얼마 못 갈 것을 직감하였다.

부유한 사람의 재산을 빼앗아 못가진 사람들에게 공짜로 나눠주니 처음에는 공산주의를 좋아할지 모르지만 노력없이 얻은 것을 소중히 간직하지도 못할 뿐더러 밤잠 안 자고 땀흘려 노력해서 모은 재산을 빼앗기니 능력 있고 재주 있는 사람들도 구태여 힘써 일할 필요성을 못 느껴 일을 게을리 하게 되므로 이런 사회는 날이 갈수록 피폐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 이후 이 사람은 기회 있을 때마다 공산주의의 허구성과 모순을 논리적으로 설파 하여 많은 사람들을 민주 진영으로 전향시켰다. 이 사람이 굴 안에서 한 달 가량 생활하는 동안 이양숙이란 처녀는 매일 밤 12시만 되면 도시락 두 개씩을 가져다 주었다.

태극기를 흔들며 국군을 환영하는 시민들: 1950년 9월 27일 경인가도

그녀는 이 사람이 서울 사람이라 고구마를 못 먹는 줄 알고 비밀리에 주민들에게 연락하여 자기들도 잘 못 먹는 비싼 쌀을 거둬 쌀밥을 해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날 그날의 전황을 쪽지에 적어 같이 보내왔다.

그래서 이 사람은 굴 속에 있으면서도 9 · 15 인천 상륙과 9 · 28 서울 수복 그리고 평양 탈환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평양 탈환 소식을 전해 듣고 난 다음날 “조동지! 조동지! 해방됐시요! 나오시라요” 하며 부르기에 나가보니 인민군이 개미때 같이 새까맣게 북쪽으로 도망 가고 있었다.

평양시와 대동군 일대는 주민들이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걸고 국군이 입성하면 환호성을 지르며, 만세를 외치며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동군 치안대장

1950년 9월 28일 서울에 진입한 국군과 인민군간의 시가전

한 달 만에 굴에서 나오니 모발은 더욱 길어졌고 햇빛을 보지 못하여 피부가 하얗게 되어 있어 20세의 젊은 청년이 30대로 보였는 모양이었다. 구레나룻 수염이 무성하게 자란 것도 한 원인이 되었다.

대동군내에 있는 젊은 반공 청년들이 치안대를 조직하여서는 이 사람에게 대장을 하라 하였다. 극구 사양하였으나 빨갱이 때려 잡는데는 조동지가 총살 집행까지 당한 철저한 반공주의자니까 적합하다하여 억지로 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사람은 반공청년 30여 명을 데리고 대동군 치안대를 이끌고 인민군과 좌익에 물든 청년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집어 넣는 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치안대원들은 인민군을 포로로 잡기만 하면 죽이는 고로 “성경에도 살인하지 말라고 했고, 또 우리 민족이 일본에게 36년간 식민지 생활하다가 이제 해방을 맞아 독립국가를 세운지 몇 년이나 되었느냐? 이 얼마 안되는 동안에 동족상잔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먼 훗날 치욕의 역사가 될 것이므로 몇몇 위정자들에 의하여 우리가 꼭두각시 노릇을 할 수는 없으니 우리 국민들만이라도 서로 죽이는 일은 삼가하자. 사상이 잘못되어서 그런 것은 사상만 바로 잡으면 되는 것이 아니냐” 고 치안대 젊은 청년들을 모아 놓고 눈물을 흘리며 웅변을 하였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되찾은 국군이 중앙청에 태극기를 올리고 있다.

이에 2/3정도의 대원은 수긍을 하며 호응하는데 나머지 대원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이 안(案)은 다수결로 통과되었는데 삼분의 일 정도의 대원들은 “이 빨갱이 놈은 악질 중의 악질로서 우리 부모를 죽이고 형제 자매를 무참히 학살하고 죽인 고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하며 잡기만 하면 죽이는 고로 그 때마다 말려서 죽을 사람이 죽음을 모면하고 형무소로 넘겨진 사람이 많이 있었다.

치안대장 당시 한번은 밤 12시쯤 되어 어떤 사람으로부터 신고가 들어 왔는데 “저 산 너머 독립가옥 두 채에 인민군 군관단으로 조직된 특공대 2백 명이 이 곳 대동군 치안대를 해치려는 목적으로 독립 가옥 한 채에 100명씩 나뉘어 현재 식사중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 신고를 접하고 바로 치안대원을 모았으나 밤이 깊어선지 5명 밖에 없었다. 대원들 집에 연락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 5명을 데리고 전화 유선줄 꾸러미를 짊어지고 가면서 임무를 부여했는데,

너는 1소대장, 너는 2소대장하며 3, 4, 5소대장을 각각 임명했고 도착하자마자 공포를 쏘다가 내가 신호탄을 쏘며 사격중지! 하면 사격을 멈추고 3소대장! 한 댓 명만 데리고 와! 하면 다 오는 거다하는 작전계획을 지시하며 갔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하고 보니 기와집 두 채가 나란히 있는데, 밖과 안이 보이지 않도록 좁은 담이 있는 고로, 그 두 집 주위를 뺑 둘러서서 몇 분간에 걸쳐 공포를 일제히 쏘아대니 조용한 밤하늘이 뒤흔들릴 정도였다.

밖은 보이지 않는데다가 깜깜한 한밤중에 사방에서 갑자기 콩볶는 듯찬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므로 한참 식사중이던 인민군 특공대 200명 모두는 정신적으로 제압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 대문 쪽에 있는 이 사람이 노란 신호탄을 쏘며 “사격중지!” 명령을 큰 소리로 하게 되니 갑자기 사격이 중지되고 사방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우리 대한민국 국군 1개 중대는 인민군 군관단으로 구성된 특공대 200명을 완전 포위하였다. 목숨이 아깝거든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수류탄 세례를 받을 것이다” 하고 외치니 이 사람의 굵은 음성이 조용한 밤 하늘에 찌렁찌렁 울려 퍼졌다.

몇 초 있으니 안에서 “시키는 대로 하겠소. 목숨만 살려주시오” 하는 나이 듬직한 사람의 음성이 흘러 나왔다.

“알았소” 해 놓고 “3소대장 거기 한 댓 명만 이쪽으로 보내” 하니 대문 앞에 모인 5명이 전부였다.

뒤에 알고 보니 군에서는 4소대장은 없고 화기소대라고 부르며 5소대 라는 것도 편제상 없었는데, 그 당시 나이도 어리고 군 경험이 없었던 고로 그런 우(愚)를 범하였던 것이다.

“전원 무기를 버리고, 손을 들고 한 명씩 나와!” 하고 명령을 하니 우르르 손을 들고 대문 밖으로 나오는데, 그 순간 주머니에 무기가 있을 땐 곤란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고로 공포를 두 발 쏘며 “도로 들어가!” 해 놓고

“전부 옷을 벗고 팬티만 입고 나와! 만약 나오라는 명령이 없는 데도 나오면 사살하겠다! 명령이 떨어지면 한 사람씩 나와!” 해서 나오는 사람마다 가져갔던 유선줄로 두 손을 머리 뒤로 묶어서 200명 전원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포로 중에는 장성급도 몇 명 있고, 중국 팔로군 출신도 있었는데 대부분 군경력이 많은 자들이었다. 그 중 최고 높은 별 두개짜리 되는 사람은 이 사람이 제지할 새도 없이 치안대원이 총을 쏘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다.

다음은 별 하나짜리 차례가 되는데 이 사람이 총을 든 치안대원 앞을 가로막으며 죽이지 말라고 강력하게 명령하여 나머지 포로들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그들을 학교 교실에다 집결시켜 놓고 “나는 서울서 온 대학생으로서 군생활을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이 지역 치안 책임자다. 우리 여섯 명이 너희들 200명을 잡았는데, 이래 가지고 너희들이 뭘 하겠느냐”고 하니 저희들도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힌다는 눈치였다.

“우리는 다 한 형제요, 한 핏줄을 이어 받은 단군 할아버지 자손으로서, 동족끼리 서로 싸우고 죽이고 하는 짓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는 우리 민족사에 큰 오점을 남기는 일이다.

몇몇 위정자들이 시킨다 하여 동족을 살상한다는 것은 사람의 노릇이 아니다. 우리 민족이 일본놈 밑에서 식민지 생활을 하여 36년간이란 기나긴 세월에 언어도 뺏기고 재산도 뺏기고 모든 것을 유린당해 왔는데 무엇이 모자라서 해방된지 불과 몇 년 되지 않아 동족끼리 피를 흘려야 하느냐 이는 한치 앞도 못 내다 보는 인생의 발상인 것이다.

한 개인의 사리 사욕을 위해서 수 많은 동족이 고통을 당하고 피를 흘리고 수백만 명이 죽어가도 양심에 가책이 되지 않는 그런 폭군에게 더 이상 속아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끼리라도 서로 죽이고 싸우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국민 다수가 원하고 잘 살 수 있는 길을 찾아 나가자”고 즉석 연설을 하였다. 이에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도 긍정을 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그 때 이 사람은 아무리 공산주의에 물이 들은 자라도 양심은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미처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들을 잡아 계속 형무소로 보내고 군내 구석 구석을 뒤지며 철저히 멸공작업을 하는 고로, 주민들의 호응이 매우 좋아서 200명 군관단 특공대가 들었던 집에서도 그 집주인 아들이 다락을 통해 뒷담을 넘어 신고를 해 주어 큰 전공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6.25사변 이전

국민학교 5학년

우물 – 사진은 참고용일 뿐 특정 사실과 무관합니다

이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한번 마음을 먹고 뜻을 세우면 포기하지 않고 끝을 봐야 손을 떼는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이 사람의 집에는 우물이 없어 이 사람 어머니께서는 동네 공동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오곤 하였다.

집안의 온갖 궂은 일과 부엌일을 도맡아 하시는 어머니가 멀리까지 가서 물을 길어오는 것에 마음 아파하던 이 사람은 집 뒤란에서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그 때가 국민학교 5학년 때였다. 아침부터 땅을 파내려가 저녁이 지나고 하늘에 별이 초롱초롱 빛나는 한밤중이 되었다.

이 사람 키로 세 배가 넘는 5∼6m까지 파내려가자 이윽고 물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물이 나오는 것을 보고서야 땅위로 올라왔다.

물론 식사도 하지 않은채. 부모님은 몹시 안스러워 몇 번이고 와서 올라와서 식사하고 쉬었다 하라고 했지만 이 사람은 물이 나을 때까지는 올라가지 않겠다고 스스로 결심한 것을 지켰던 것이다.

물이 나오기 전에는 허리가 아프고 팔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어려운 상황도 많이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여 목적한 바를 성취하였던 것이다.

모품앗이

모내기 : 맨 앞에 보이는 못줄을 기준으로 모판에서 육성한 모(크면 쌀이 열리는 식물)를 하나 하나 논에 심는 일 *사진은 특정 사실과 무관합니다.

집에서 짓는 농사는 모두 소작이었고, 처음에는 그나마 40여 두락 되었으나, 아버지께서 농사일을 잘 돌보아 주시지 않으므로 20여 두락으로 농지가 줄어들게 되었다.

어머니는 될 수 있는 대로 가산이 줄어들지 않게 하시려고 추수가 끝나면 아버지 몰래 벼 가마니를 감추시는 등 살림에 무척 힘을 들이셨다.

어머니께서 농사일을 비롯한 자녀부양과 가사 전반에 걸친 일에 몹시 고생을 하심으로, 어린 나이에도 어머니가 너무나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국민학교 시절부터 농번기에 어머니께서 모 품앗이를 다니시는 것이 안타까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모 품앗이를 다니게 되었다.

모를 심다 보면 같이 일하는 어른들이 “야! 희성이, 모 참 잘 낸다” 하며 점점 모 심는 면적을 넓혀 주곤 했다.

그러나 어른들이 넓혀 주는 면적을 다 심기도 전에 못줄이 넘어가는 고로 허리 한번 제대로 펴 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모를 심어야만 했다.

허리가 끊어져 나가는 것 같고 팔 다리가 아프며, 고사리 같은 손끝이 닳아서 통증이 오고 피가 날 정도가 되어도, 해가 지고 어두워질 때까지 그 고통을 참고 견디었다가 끝내고 집에 오곤 하였다.

이러한 일을 매일 계속 반복하여 모내기 철이 끝날 무렵쯤 되어서는 온 몸이 떨려오는 말라리아병에 걸려 밤새도록 앓고 밤을 지새우다가 이튿날이면 또 아픈 몸을 이끌고 모를 내러 가곤 하였던 것이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일을 하였다. 부모님께서 “아픈데 무슨 일을 하느냐?” 하시며 만류를 하셔도, 내가 고통을 당하는 만큼 부모님이 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농번기의 모내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일을 하였던 것이다.

어른들이 짓궂게도 모심는 면적을 넓혀 주어도 이 한 몸은 희생하겠다는 마음이 있었기에, 군소리하지 않고 일을 하니까 동네 어른들이 칭찬을 하면서도 희성이는 좀 미련하고 고지식하다는 평을 하곤 하였다.

극에 달하는 고생을 참고 견디어

짚신 : 짚을 가늘게 꼬아서 만든 신발 *사진은 특정 사실과 무관합니다.

또, 겨울이면 산에 가서 나무를 하여 집뜰 안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장작을 읍내에 내다가 팔아 가계에 보탬이 되게 하였다.

장작을 힘에 겨울 정도로 짊어지고, 눈이 와서 무릎까지 발이 빠지는 상태에서도 2km가 넘는 눈길을 한 번도 쉬지 않고 읍내에까지 가서 팔고 오곤 하였다.

눈 덮힌 길을 끙끙거리며 고통을 참고 견디며 중간쯤 가면 메투리 짚신을 신은 발이 온통 눈에 젖어 발이 시려 깨어져 나가는 것 같고, 손은 손대로 시려워 손끝을 칼로 베어내는 듯한 고통이 가해오는 것이었다.

무거운 짐을 내려 좀 쉬어야겠는데, 온통 눈으로 덮힌 상태라 쉴 장소도, 쉴 수도 없어 이중 삼중으로 더해지는 고통에 엉엉 울면서도 기어이 읍에까지 가서 장작을 팔아 오곤 했던 것이다.

보통 아이들 같으면 그렇게 혼이 나면 그 다음날에는 안 가든지, 만약 가더라도 좀 가볍게 짊어지고 가겠지만, 그렇게 혼이 나고도 여전히 전날의 양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게 힘에 겹도록 짊어지고 울면서 가는 것이었다.

지게 : 개인 화물 운송 수단, 광주리에 짐을 싣고 가방메듯 어께에 짊어짐 *사진은 특정 사실과 무관함니다.

이와 같이 항상 극에 달하는 심한 고생을 하며 고통을 참고 견디는 훈련을 하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본인도 모르게 하였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하여도 남보다 많이 하여야 했고, 일을 하여도 다른 사람보다는 더 많이 더 열심히 하였으며, 짐을 짊어져도 언제나 힘에 겨울 정도로 짊어지고 끙끙거리며 오금을 제대로 옮기지 못할 정도로 지고 다니는 습성이 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스스로 나를 짓이기는 훈련을 했던 것이다.

비가 온다고 해서 나무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번 목표를 세우면 꾸준하게 하는 성품으로 잠시라도 집에서 드러누워 쉬지 않는 성품이었다.

중학교 시절

어린 시절에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배울 때는 배워도 금방 잊어버려 훈장님에게 매를 맞는 일도 많이 있었으나, 중학교 때부터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공부가 잘 되지 않아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저녁 6시에 잠을 자면서 어머니에게 9시에 꼭 깨워 달라고 하여 하루 3시간씩 자고 저녁 9시부터 시작하여 밤을 세워 공부를 하였던 것이다.

잠이 오면 나가서 찬물에 목욕을 하는 등 기를 쓰고 공부를 하므로 코피도 부지기수로 흘렸다.

길을 가면서도 영어단어를 외웠는데 단어 카드를 만들어 한 손에 쥐고 외운 것을 다른 손으로 옮기면서 노력에 노력을 하였던 것이다.

최종에는 영어사전을 한 장 한 장 뜯으면서 암기를 하여 기어이 사전을 다 외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학교에서 수석을 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 사람은 중학교 시절부터 인생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는 이런 일이 동기가 되었다.

섣달 그믐날 밤늦도록 윷놀이를 하면서 같이 놀던 친구가 이튿날 아침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어 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이 사람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불러 일으켰다.

어쩌다 그 친구의 어머님을 만나게 되면 자기 아들을 떠올리면서 이 사람을 붙잡고 엉엉 우시곤 하였다.

그래서 이사람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파헤치기 위하여 유명한 철학서적을 거의 다 읽어 보았다.

그러나 그 모든 철학 서적들이 수준 이하로 느껴졌다.

그 중에서 낫다는 것이 톨스토이의 저서였으나 그 속에도 모순이 있었다.

인간은 생각할 수 있는 동물이기에 세상 사람들은 흔히 ‘영적 동물’ 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마음먹는 대로 된다’는 평범한 말 가운데 진리가 있다는 것을 어린 시절에 깨달았다.

세상 모든 일들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일에 대해 생각을 하고 ‘하면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노력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생각이나 마음은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 마음, 마음 속에 죽음을 싫어하고 행복을 영위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우리의 조상들이 원래는 영생을 하였고, 행복하게 살았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 사람은 일찍이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틀림없이 사람은 영생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확신이 항상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밤중에 종종 마을 뒷동산 중구봉산 봉우리에 올라가 마을과 넓은 들판을 내려다 보고 “왜 사람은 고생 고생하다가 죽어가는가? 안 죽을 수는 없을까? 산에 풀과 잔디는 시들었다가 봄이 되면 다시 싹이 나고 꽃이 피는데, 죽은 내 친구는 왜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가? 어째서 인간의 생명은 죽으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이별을 해야만 하는가?” 하며 깊이 생각에 잠겨보곤 하였다.

사람이 해서는 안될 일이 없으며, 불가능이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솟구쳤다.

우리 인류들이 무수히 삶과 죽음의 문제를 놓고 많은 도전과 시련을 겪어 왔지만 죽음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로 남아 있었다.

이 사람에게는 기필코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여 전 인류를 사망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버리고 말리라 하는 마음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항상 마음의 움직임이 크고 대국적으로 움직였다.

그래서 친구들이 장래 국회의원이 된다, 장관이 된다, 대통령이 된다는 등의 희망을 말했을 때, 이 사람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시시하게 느껴졌다.

‘내가 만약 권력을 누린다면 전 세계를, 온 천하를 손아귀에 쥐고 휘두르리라’는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매사에 적극적이었고 희망적이었다.

평발의 마라톤 선수

평발 : 발바닥의 안쪽 아치가 없는 발, 쉽게 피로해지는 발구조로 군대면제 사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진은 참고용이며 특정 사실과 무관합니다.

이 사람은 학생시절에는 마라톤 선수였다. 운동을 하려면 어느 정도 신체적 조건이 갖추어져야 된다. 특히 마라톤선수는 발이 평발이면 선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체육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희성이, 너는 마당발이므로 마라톤을 할 수 없으니 하지 말아라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무엇이든지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기어이 마라톤을 하고야 말았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같이 3∼4년을 꾸준히 연습하여 나중에는 김포군내에서 1,2등을 다투기에 이르렀다.

경기도 시군대항 마라톤 시합에 참가하여 1등으로 들어와 테이프를 끊고 기절하여 병원에 실려간 적도 있었다.

깨어나니 체육선생님이 와서 “그것 봐, 내가 하지 말라고 하여도 하더니‥‥ 잘못하면 죽어” 하고 걱정을 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대견스러운 표정을 보이셨다.

당시에는 지금같이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이 없어서, 자갈투성이의 비포장 도로의 인도쪽, 자갈이 별로 없는 부분을 이용하여 맨발로 연습을 하였던 것이다.

당시에 운동화가 나오기도 했지만 너무 비싸고 또한 형편이 여의치 못하여 아예 생각도 못하였던 것이다.

당시 전국 마라톤 대회에서 3위 안에 들지 못한 조희성 선수를 제치고 보스톤 마라톤 대회 출전권을 획득한 서윤복 선수. 보스톤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하여 월계관을 쓰고 시상대에 서있습니다.

한 시간 정도만 뛰어도 정신이 몽롱한 상태인데 거기서 포기를 하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계속 뛰게 되면, 팔 다리의 감각이 무뎌지면서 숨이 차는 경지를 지나 무감각 상태에서 뛰게 된다.

백리 길을 두 시간이 넘도록 뛰게 되면 온 몸에 땀이 비오듯 하는데, 그 고통의 경지는 당해본 자가 아니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꾸준히 아침과 저녁 늦게, 또는 밤중에 연습을 하였는데 포기 하고 싶은 상태에서 포기 하지 않고 자신과 더불어 싸워 이기는 훈련을 하고 또 하였다.

하기 싫다고 쉬고 기분 내 키면 하고 하는 생활을 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전국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여, 1947년 미국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서윤복선수와도 같이 뛰어 본 적이 있었다.

국민학교 때에는 기운이 없어 다른 아이들에게 매를 맞고 자랐으나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이겨보려고, 궁리 끝에 기운을 내게 하려면 영양 보충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돈이 없어 고기는 사서 먹을 수 없고 하여, 밭에서 나는 콩을 가느다란 철사로 만든 망에다 넣고 불에 볶아 호주머니에 가득 넣고 길을 가며, 일을 하며 수시로 먹었더니 기운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중학교 2천명 학생중에 기운으로는 당할 자가 없을 정도로 힘이 세어 씨름판에서 항상 1등을 하곤 하였다.

그 당시에 쌀 두 가마니를 짊어지고 다니므로 김포 동네에서 ‘장사’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이가 60인데도 시멘트 여섯 포대(쌀 세 가마니 240kg)를 짊어지고 다닐 수 있다.

한창 젊은 나이 때보다 더욱 더 힘이 세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고학생(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마련하는 학생)

이 사람은 어린시절부터 외할아버지께서 “사람이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절대로 신세를 지지 말아야 한다. 어느 집에 가더라도 그냥 나오지말고 엽전 한 닢이라도 놓고 나와야 한다”고 하시던 말씀을 듣고 자랐다.

이 사람은 어린시절에도 한번 마음을 먹고 뜻을 세우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해 내고야 마는 성미였다.

또한 내 한 몸이 희생해서 될 일이라면 아무리 어렵고 험한 일이라도 가리거나 사양하지 않았으며, 자진해서 일을 찾아서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을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모든 일에서 항상 남보다 뒤지기를 싫어했다.

이 사람이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다니게 되었을 때, 요즘 같이 교통이 편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김포에서 서울시내에 있는 학교에 다닐 수가 없어 집을 떠나 서울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그 당시 성동경찰서 사찰계장으로 계시는 신당동 외삼촌댁에서 형님과 같이 신세를 지며 학교에 다녔다.

고향에서 추수를 하게 되면 쌀을 두 가마니씩 외삼촌댁에 갖다 주는데도 불구하고 외숙모님은 형님과 내가 식사하는 것을 꺼려하고 눈치를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외삼촌댁에서 나와 학교에서 자취를 하며 공부를 하였다.

형님은 몇 번이고 외삼촌집으로 다시 들어가자고 울며 권유하였으나, 나는 신세지는 것이 싫어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형님은 외삼촌댁에 계시고, 나는 고생스러워도 계속 학교 교실에서 생활하였다.

수업시간에는 열심히 공부하였고 방과 후에는 성냥과 비누 등의 물건을 들고 집집마다 팔러 다녔다.

처음에는 보따리를 들고 다니며 집집마다 물건을 파는 것이 부끄럽고 창피하였으나 “너 같은 놈은 이렇게 보따리를 들고 다니며 집집마다 물건을 파는 것이 마땅해! 이 보다 더한 일을 해야 하는데 이것도 네게는 수월한 것이야” 하는 생각을 하니 별 무리없이 다닐 수 있었다.

시일이 갈수록 장사하는 요령도 생기고 거래처도 많이 확보되었다.

한번은 물건을 들고 가는데, 어떤 아저씨가 “이발소에는 비누를 많이 사용하니까 이발소에 가 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발소에 찾아 갔더니 이 사람이 고학하는 학생이라고 하여 비누를 팔아 주었는데 이용사 협회의 간부로 있는 사람의 주선으로 서울 시내 이발소에 비누를 댈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서울 시내에 있는 이발소는 거의 다 이 사람이 비누를 대어 주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적지 않은 돈을 벌게 되어 고향에서 돈이 없어 공부를 하지 못하는 친구 세 사람을 데려다 학비를 대주며 같이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또 3만 원이라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돈을 삼보주식회사라는 회사에 투자하여 주주가 되기도 하였다.

이 회사는 대만에서 설탕을 수입하여 국내에 유통 시키는 무역회사였는데, 6.25사변 때 없어졌다.

장사를 하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생기는 것이었다.

서울 시내에서 일정한 구역 내에는 안 들어가 본 집이 없는데, 어떤 때는 담임선생님 댁인 줄도 모르고 들어간 적도 있었다.

그때 여선생님이 맨발로 뛰어 나오시며 “네가 이렇게 고생을 하는 줄 몰랐다. 내가 학비를 대 줄테니 제발 이런 장사는 하지 말아라” 하시며 손에 돈을 쥐어 주셨지만 기어이 뿌리치고 나오기도 하였다.

또 어떤 때는 부부싸움으로 기분이 상해 있는 집에 물건을 팔러 들어갔다가 어린 학생에게 화풀이를 해 대는데 꼼짝없이 당해야 했다.

화를 내기만 하면 괜찮은데 그 물건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 물건을 팔 수 없게 만드니, 그것을 하나씩 줍는 이 사람의 마음은 설움이 올라와 기가 막히는 것이었다.

추운 겨울에는 남들이 따뜻한 방안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이 사람은 찹쌀떡을 들고 골목마다 외치고 다니며 팔았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쉬지 않고 다녔다.

하지만 누가 시켜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서 했으며 자신을 짓이기기 위한 방편으로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얼마 후에는 흑석동에다 방을 얻어 놓고 외삼촌댁에 있던 형님을 불러와 같이 공부하였고, 고향 김포에서 여동생이 올라와 밥을 지어주었다.

학교에서는 항상 우등생이었고, 항상 희생과 봉사의 마음이 차고 넘치는 고로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이 사람은 공부를 해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교과서를 모두 외워 버렸다.

수업시간에 집중하여 듣고 집에 와서 공책에 필기하면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기침하는 것까지 정확하게 적을 수가 있을 정도였다.

잡념이 전혀 없고 피가 깨끗한 사람은 모든 것이 피속에 녹음이 되는 고로, 그 자체가 녹음기 테이프라서 다시 재생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19세 청년 시절

이 사람은 열아흡 살 때부터 마음으로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기를 쓰는 생활을 시작하였다.

여자 치맛자락만 봐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오는 고로 치맛자락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땅만 쳐다보고 다니다 어떤 때는 전봇대를 들이받아 정신이 가물가물한 적도 있었다.

기성 교회 부흥회에 참석하였을 때 감리교 부흥강사인 박재봉 목사가 하는 말이 마음으로나 눈길로나 음란죄를 짓지 않으려면 여자를 뱀같이 보라고 하여, 그 때부터 여자를 뱀같이 보았다.

그리하여 전차에서도 옆 좌석에 여자가 앉으면 질겁을 하고 일어나 다른 곳으로 피하곤 하였다.

그러면 어떤 짓궂은 여자는 이 사람을 따라와서 “나 때문에 학생이 일어났는가 본데 가서 앉으라”고 하면 이 사람은 “나는 서서 가는게 더 좋아요!” 하는 식으로 대답하거나 아예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정욕이 올라오면 ‘이 개 같은 마귀새끼’ 하고 자신에게 욕을 하면 정욕이 사라졌다.

또 정욕이 올라오면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땀이 날 정도로 달리기를 하거나, 심한 노동을 가하며 자신을 짓이기는 생활을 하니 정욕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대학생

당시에는 대학교에 다니면서 흑석동에 있는 감리교회에 나갔었다.

교회에서의 직책은 중.고등반 학생들과 청년들을 지도하는 책임교사였으며, 흑석동 일대에 집집마다 전도를 하며 철저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토요일이면 학생과 청년들을 데리고 전도를 하러 다니기도 했다.

남산

어느날 학생 60여 명과 같이 남산에 올라가 노방 전도를 하고 내려 오는데, 남산 교회입구 계단에서 당시 박태선 집사님께서 북을 치며 전도를 하고 계셨다.

그래서 우리 학생 전도팀과 합세하여 전도를 하였다.

그때 박태선 집사님께서 북을 치며 전도를 하셨는데, 북을 벗어 이 사람에게 주며 “쳐보라” 하여 이 사람이 북을 치며 전도를 하였다.

이 사람이 북을 치는 것을 보고 남산교회의 어떤 교인이 말하기를 박태선 집사님은 북을 딴 사람에게 절대 쳐 보게 한 사실이 없는데, 이상하게 청년에게만 북을 치게 하니 특별한 일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 이미 영모님 (박태선 집사님)께서는 이 사람을 알아보셨으나 이 사람은 전혀 영모님이라는 존재와 나의 앞길에 대하여도 몰랐다.

그러나, 박태선 집사님을 만난 후부터 입안에 꿀물과 같이 단물이 흐르며 뱃속까지 시원한 생수가 연결되기 시작하였다.

유년시절

김포읍에서 북쪽으로 포장된 국도를 따라 조금 가다 보면 서쪽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다시 좁은 농로를 따라 들판을 지나면 감정리에 들어선다.

거기 중구 봉산 나즈막한 야산 기슭을 타고 200여 세대가 웅기종기 모여 있는 구둣물 부락이 있다.

이 마을 입구쯤에 있는 조중봉(趙重峯)선생 사당을 지나면 좌측으로 l00m쯤 되는 곳에 40∼50년생 감나무 한 그루가 서있고 ‘다’ 자형 구조의 고옥이 한 채 있다.

바로 이 곳, 경기도 김포군 김포읍 감정리 구둣물 마을의 한 초가집이 온 인류에게 영생(永生)을 주러 온 조희성(曺熙星) 님의 생가인 것이다.

조희성님의 함자와 사주

이 사람은 1931년 8월 12일(음력 신미년 6월 28일 새벽 4시경), 농부이신 부친 조경남(曺慶男)과 모친 오지덕(吳只德) 사이에 9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증조부께서도 형제 두 분중 둘째였고, 조부와 부친께서도 둘째였고 이 사람대에 와서도 남자 5형제 중 두번째였으니, 4대를 계속해서 차자(次子)로 이어져 온 것이다.

*주:여기서 부터는 조희성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을 엮은 것임.

이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사람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외할아버지께 들어서 알고 있었다.

외가집이 부평 ‘덴말’이라는 동네에 있었는데, 어릴 적에 외갓집에 가면 외할아버지께서는 항상 어린 것을 업으시거나 손을 잡으시고 장능산 지름길을 다니시기 좋아하셨으며, 재미 있는 옛날 이야기와 필요한 세상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다.

그중에서도 “사람이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절대로 신세를 지지 말아야 한다. 어느 집에 가더라도 그냥 나오지 말고 엽전 한 닢이라도 놓고 나와야 한다.” 고 하시던 말씀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외할머니께서 “이 영감쟁이 매일 책만 들여다 보고 있으면 먹을 것이 나오느냐?”고 성화를 부리셔도 외할아버지께서는 대꾸하지 않고 여전히 책만 보며 잠자코 계시면서 언행을 흐트리지 않으셨다.

이것을 보면 참으로 우리 조상들은 성인(聖人)에 가까운 분들이셨다는 것을 알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이다는 인내천 사상을 주장하는 민족종교 천도교의 창시자 수운 최재우 선생의 동상

외할아버지께서는 책을 마차에 싣고 다니실 정도로 많은 서적을 보유하고 계셨으며 학문의 경지 또한 깊으셨는데, 이런 외할아버지께서 천도교인(天道敎人)이셨다는 것은 후에 가서야 알았다.

많은 이웃 주민에게서 칭송을 받으며 지내시던 외할아버지는 모처럼 다니러온 외손자를 애지중지하시고 같이 다니며 업어 주셨는데,

해질 무렵 집에 돌아오면 잡수시도록 마련된 석청(石淸: 옛날에는 아주 귀한 보약)을 아껴 두었다가 선반에서 꺼내어 어린 것에게 먹여 주시곤 하셨다.

그러시면서 “우리 희성(熙星)이가 장차 큰 일을 할 골상을 지녔어. 손에는 다이아몬드와 임금 왕자의 손금이 있고, 가슴에는 북두칠성에 해당하는 점이 있으니 큰 인물이 될 것이 틀림 없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시면서 “이 손금을 누구에게도 보여서는 안된다.”고 당부를 하시며 너무도 이 사람을 사랑해 주시고 귀여워해 주셨던 것이다.

모친께서 이 사람을 잉태하셨을 때 꾸셨던 태몽이 있는데, 다음은 모친에게서 들은 얘기이다.

조희성님이 태어나신 김포 감정리, 뒤로는 산이 병풍이 감싸는 듯 둘러 있고 앞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있는 지세

부평읍에서 서쪽으로 5리쯤 가면 계양산이 있는데, 이 산은 예로부터 명산으로서 많은 전설을 지니고 있는 산이다.

하루는 꿈에 계양산 정상에 올라 갔는데, 산봉우리가 셋이 있고 가운데 큰 봉우리의 정상에 우물이 하나 있었다.

거기 있는 맑은 물이 근원이 되어 옥수(玉水)같이 깨끗한 물이 끊임없이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마음 이 흡족하고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것에는 편편하고 넙적하게 생긴 바위가 하나 있고 그 위에는 깨끗한 물동이와 바가지가 놓여 있어서, 이 맑고 깨끗한 수정 같은 물을 바가지로 떠서 물동이에 가득 채워 놓으니, 어디선지 하얀 비둘기가 날아와 물동이 위에 앉아, 모친은 그대로 물동이를 이고 감정리 집으로 내려 왔다.

며칠 후에 다시 그 산을 올라가니 낮선 청년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저 쪽을 보라고 손가락질을 하였다.

그래서 가리키는 쪽을 쳐다보니 새하얀 옷으로 예쁘고 아름답게 치장한 처녀들이 30여명 줄을 지어 걸어 오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아름답고, 한편으로는 기이하기도 하여 그 청년에게 “저 처녀들은 무엇하는 사람들입니까?” 하고 물으니,

“당신을 하늘나라로 안내하기 위하여 환영나온 선녀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듣고 참으로 기분이 좋고 마음이 흡족함을 느끼며 산을 내려 왔다.

또 하루는 어느 동산에 올라 갔는데 큰 옥수수대가 둘 있고 잘 영글은 옥수수가 한 대에 한 개씩 열려 있었다.

옥수수를 모두 따 자루에 담으니 자루 두 개가 가득하여 그것을 또한 집으로 가지고 왔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꿈에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나타나 하시는 말씀이 장차 “이 아이가 태어나서 성공할 때까지 누구에게도 절대로 꿈에서 본 광경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래서 모친께서는 이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계시다가 이 사람이 밀실에서 연단을 받고 완성자가 되어 영생(永生)의 역사를 시작한 1981년도에 와서야 비로소 이 사람에게 말씀해 주셨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에게도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다.

구둣물마을 이야기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 한반도 중에서도 3면이 바다와 강으로 둘러싸인 김포

경기도의 북서쪽으로 가면 한강 하류와 임진강 하류가 만나는 한강(漢江) 하구언이 있다. 김포읍에서 서쪽으로 1차선 좁은 도로를 따라 2 Km쯤 가면 감정리(次井里)라는 큰 마을이 나오는데 이 마을은 내옹, 외옹, 구둣물, 나진교, 독작골이라고 불리우는 5개 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부락 중 구둣물이라고 불리우는 동네는 아흡 구(九)자에다 머리 두(頭)자를 써서 구둣물인데, 이는 감정리 내 에 장릉이라는 왕릉(王陵) (조선조 인조(1623∼1649) 부친의 묘)이 있어, 이 능(陵)을 중심으로 사방 팔방으로 돌아가면서 우물 아흡 개를 팠는데 그 아흡 우물 중 가장 처음 팠다 하여 ‘구두(九頭)물’이라고 하였다.

중봉 조헌 선생의 영정

지금도 그 우물터가 있으며, 이 마을을 ‘구둣물 동네’ 또는 ‘구둔말’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 마을 한 가운데에는 약 100여 평 되는 사당이 있는데, 이 사당은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 10호로서, 약 500년 전인 선조 때의 사람, 조중봉(호: 조헌) 선생이라는 분의 사당이다.

그는 시의 학자요, 예언가요, 장수로서 축지법을 써서 지맥을 이용하여 땅을 주름잡아 먼 길을 빨리갈 수 있는 능력을 행하던 분이요, 수많은 마을 사람들에게 인격과 덕망을 끼쳐 추앙을 받던 이 지방의 유지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왜놈들이 조선 땅을 점령하기 위하여 정탐군을 보냈는데, 그 중 한 정탐군이 이 마을까지 오게 되었다.

조중봉선생은 이때 초가 지붕을 이을려고 이엉을 엮고 있었다. 이때 정탐꾼이 와서 신분을 속이고 “이 마을에 조중봉 선생 댁이 어디 입니까?” 하고 물으니 선생은 그가 왜놈의 정탐군인 줄 미리 아시고 “저기 저 산 너머에 있다. “고 말하였다. 정탐군은 고맙다고 인사하고 나서 산고개를 향하여 아무리 열심히 걷고 걸어도 그 자리가 그 자리였다.

정탐군은 순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 있어 “선생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목숨만 살려주시고 무사히 돌아가게만 해 주세요.” 하고 백배사죄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조헌 선생이 도술을 행한다는 소문을 듣고 사실을 확인하러 왔는데 땅을 주름잡는 조헌 선생의 도술을 직접 대하게 되자 질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헌 선생은 이 정탐군을 죽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다가오는 국난을 어떻게 해서든지 막고 싶은 일념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소리쳤다. “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이 곳까지 와서 정탐을 하려느냐? 당장 그만 두고 너희 나라로 떠나가라. ” “그리고 본국에 돌아가거든 풍신수길에게 이렇게 전하라.

조선 땅에 이 조헌이가 살아 있는 한 감히 조선 땅을 침범할 수 없다.” “내가 왜놈들을 요절을 낼 것이라고, 알겠느냐 ! ” 하니 “예, 꼭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나으리.” 하며 정탐군은 식은 땀을 닦으면서 도망치듯 그 곳을 물러갔다.

선생께서는 임진왜란이 있기 십여 년 전부터 미리 앞 일을 내다보시고 당시 조정에다 왜놈들이 우리 조선을 침략하게 될 것이니 하루 바삐 양병(養兵)을 하여 적의 공격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쓸데없는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백성들을 혼란케 한다는 죄목을 씌워 함경도 길주로 귀양을 보냈다.

선생은 귀양에서 돌아와 다시 상소를 올리니 이번에는 충청도 옥천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왜놈이 쳐들어와 난리가 터질 날이 가까와지니 조중봉 선생은 사비(私費)로 청년들을 모아 무술을 가르치며 의병을 양성하여 왜란에 대비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조헌과 700여 의병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금산전투의 가상화

임진왜란 당시 조헌과 700여 의병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금산전투의 가상화

이윽고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생은 의병을 거느리고 몰려오는 왜군과 더불어 치열한 전투를 하여 청주성을 탈환하는 등 많은 전공 (戰功)을 세우며 여러 고을을 왜놈들의 손아귀에서 건져내셨다.

그러나 밀려오는 왜군을 막아내기엔 의병의 수가 너무 적으므로 금산까지 후퇴를 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셨다. 활을 너무 많이 쏘아 손톱이 다 빠져 버리니 발로 쏘아 열 발톱이 다 빠지도록 싸우다가 임진년 8월 18일에 49세의 젊은 나이로 금산에서 700여 의사(義士)와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지금도 그 사당에 가보면 조중봉선생의 영정과 함께 비문이 있다. 이 서원은 조선 선조때 학자이며, 의병장 중봉 조헌(1544∼1592) 선생의 학문과 충성심을 추모하기 위하여 인조 26년 (1648)에 창건되었으며, 숙종 원년 (1675)에 사액되었다. 이 동네에 살고 있는 이한철(61세) 씨의 말에 의하면 조헌 선생이 태어나신 생가 장소에 사당이 지어졌다고 하며,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돌아가신 음력 8월 18일을 기하여 매년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우리 마을에 이런 위대한 인물이 났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 라고 그는 말한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은 동학의 대가라 불리우는 이민제 선생이 기록한 예언서에, 한강 하구언에서 진인(眞人), 정도령(正道令)인 나온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김포가 바로 한강이 바다와 마주쳐서 합류하는 한강 하구언인 것이다.

또한 조중봉 선생의 말씀에 의하면, “이 구둣물 마을에서 앞으로 세계를 구원할 큰 인물이 날 것인데 그 사람이 나타나면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하셨다고 어르신들께서 늘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예언의 말씀 그대로, 김포군 김포면 감정리, 바로 구둣물 마을에서 사람 몸이 죽지 않는 전무후무한 비결을 가르쳐주시며, 인간이 행복하고 보람되게 살 수 있는 바른 길을 제시해 주시는 정도령 조희성님이 태어나셨다는 것은 수천 년 전부터 숨기고 숨겨서 완성해 낸 하늘의 예정임에 틀림없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