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사변 후반기

신양리 형무소에 재수감

나체로 이동중인 인민군 포로들

대동군 치안대장시절 어느날, 미군 헌병이 지프차를 타고 와서 갑자기 권총을 들이대며 영어로 이 사람이 빨갱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당시 이 사람은 치안대장이라 소제(蘇制)권총을 두 정이나 차고 있었기 때문에, 차고 있던 권총을 꺼내어 재빨리 사격자세를 취하였다.

헌병은 치안대장이 빨갱이라는 정보가 들어와서 잡으러 왔다고 했다.

그래서 이 사람은 한 쪽 손으로 팔의 POLICE CHIEF라고 쓴 완장을 가리키며 빨갱이가 아니고 빨갱이를 잡아서 없애는 자라고 말하였다. 그러면 우리 대장에게로 가보자고 하여 이 사람은 지프차에 타고 미 헌병대 본부로 갔다.

그런데 미 헌병대장은 자초지종을 묻지도 않고 형무소에 보내라고 명령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사람은 다시 평양 신양리 형무소로 가게 되었다.

뒤에 알고보니 치안대장이라는 자가 빨갱이를 잡으면 죽이지 못하게 한다 하여 치안대원 중에 불만이 있던 몇 명이 헌병대에 이 사람이 빨갱이라고 신고를 한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이 사람은 이런 상황에 처하도록 해 주신 하나님께 깊이 감사하게 되었다. 얼마 안 있어 중공군이 인해 전술을 쓰면서 물밀듯이 밀고 내려 오게 되니 당시 대동군 치안대원 30여 명은 몰살당했으며, 내 생명의 은인이었던 이양숙이란 처녀도 그 때 죽음을 당하였다.

이 소식을 부산 가야 수용소에서 포로로 잡혀온 인민군들에게 듣고 동료들을 생각하며 슬피 운 적도 있었다. 이 신양리 형무소에는 전에 이 사람이 직접 포로로 잡아서 집어넣은 인민군 수천여 명이 수용되어 있는 고로, 이 사람이 들어가니 많은 포로들이 깜짝 놀라면서

“어떻게 해서 치안대장인 당신이 여기에 들어 왔느냐”고 물어왔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저 그렇게 되었노라고 담담하게 답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잡힌 포로들은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서 이 사람을 담요로 덮어 씌우고 때리며 발로 짓밟기도 하였다. 이 사람은 형무소 안에서 갖은 수모와 곤욕을 치르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향하여

압록강을 건너고 있는 중공군

며칠 있으니 신양리 형무소가 포로들로 넘쳐 동양방직 공장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는 밀을 주식(主食)으로 주는 고로 그걸 먹다가 그만 항문이 막혀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며칠을 고생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수용소 내의 길바닥에 쓰러져 의식불명이 되어 있었는데 마침 지나가던 어느 국군장교가 보고 주머니에서 하얀 알약(다이아찡)을 꺼내 입 안에다 두서너 알 넣어주고 갔다.

한참후 정신이 들어 깨어보니 온 전신이 설사로 인해 똥범벅이 되어 있었다. 어느새 가을이 되어 조석으로 서늘한 때였지만 다 벗어버리고 모포로 몸을 감고 식사를 타러 다녔다.

그렇게 해서 타온 밥을 먹지 않고 밥 한그릇으로 팬티 하나와 바꾸고, 또 이튿날 밥 한 그릇으로 런닝 하나와 바꾸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며칠이 지나서야 복장을 다 갖출 수 있었다.

포로로 수용되어 있는 자들이 한참 먹을 시기인 젊은 사람들이라 적은 급식량으로는 항상 배가 고픈 상태였기 때문에 옷과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몸은 회복되지 않고 곧 바로 이질로 밥을 먹기만 하면 계속 그대로 설사로 나와 버리는 고로 얼굴과 몸 전체는 뼈만 앙상히 남게 되었다.

철수직전 흥남부두

그런데 전황이 아군에게 불리하게 변해 국군은 중공군에 밀려 남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 사람은 포로들과 함께 인천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 사람의 고향이 김포라서 이 지역의 지리는 훤히 아는 고로 여기서 탈출을 시도하면 성공할 것 같아 시도해 보려 해도 너무 몸이 쇠약해져 있는데다 계속 이질이 낫지 않은 상태이므로 탈출을 할 수 가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사람의 탈출을 병고(病苦)로써 막은 것을 이 사람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 당시 탈출하게 된다 해도 국군이 계속 후퇴하며 밀려 내려오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도망을 못 가게 하였던 것이다.

전세(戰勢)는 점점 불리하여 후퇴 일로에 있었던 고로 또 다시 부산으로 가게 되었다. 화물열차에다 몸을 싣고 포로들과 함께 남으로 달리게 되니 고향 김포와는 점점 멀어지니 여기서 도망 못하면 앞으로는 더욱 불리할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감으로 달리는 화물열차에서 철길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피골(皮骨)이 상접하고 쇠약할 대로 쇠약한 몸인지라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한참 후 정신을 차려보니 포로 수용소 안의 의무실이었다.

곧 이어 부산 가야수용소로 가게 되었고 그 곳에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수용소를 건설하는 작업에 투입되어, 포로를 지키며 감독하는 미군들에게 설움도 많이 받았다.

상륙함

몸이 아픈 사람이나 성한 사람 상관 없이 포로들을 때리고 가혹하게 작업을 시키는데, 이 사람은 이질이 걸려 기운이 없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데도 그들은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행동이 민첩하지 못하다 하여 군화발에 채이고 총개머리판에 얻어 맞는 고통을 당하였던 것이다. ‘갓댐 (God Damn)’하고 소리지르며 가혹하게 일을 시키는데 몸이 아프다는 표시를 해도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쇠약한 몸을 끌고 무거운 돌을 운반하다가 넘어지고 쓰러지면 쫓아와서 매를 가하는 고로, 다시 그 돌을 짊어지고 가다가는 또 쓰러지고 하는 이런 비참한 상황은 당해 본 자가 아니면 말로만 들어서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가야 수용소에서 약소민족의 설움을 뼈속깊이 맛보았다. 후세에는 다시 이런 비참한 꼴을 당하지 않아야 되겠다는 굳은 각오와 결심을 하였다.

국력배양에 젊음을 불태을 것을 가슴깊이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이를 갈아부치고 참고 또 참았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전황은 점점 불리하다는 소문과 함께 음력 정월 초하룻날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앞으로 닥쳐을 운명앞에 초연(超然)한 자세로 상륙함에 몸을 실었다.

오끼나와로 간다, 하와이로 간다, 괌도로 간다, 바다에 몽땅 수장(水葬)시켜 버릴 것이다라는 등 구구한 소리와 억측들이 난무한 가운데 항해는 계속되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이 상륙함은 영화관, 교회 등의 시설을 갖춘 큰 군함이었는데, 5천여 명이 먹을 수 있는 밥이 나무로 제조된 둥근 밥통에 담겨 크레인에 의하여 밧줄로 윗층에서 아랫층으로 내려왔다.

여러 단계를 걸쳐 배식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 동안을 배고픔을 참지 못한 많은 포로들이 일시에 몰려 그 큰 밥통에 매달려 손으로 밥을 퍼서 먹는 고로 힘이 약한 자는 밑에 깔려서 죽어가고 힘이 강한 자는 밥을 실컷 먹는 일대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이 때 밑에 깔려 죽은 자가 수십 명이고 부상자는 수백 명에 이르는 큰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곳이 거제도였다.

도착한 곳이 어딘지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우리를 실은 상륙함이 닻을 내리며 정박하는 것을 보아 목적지에 도착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너무 날씨가 추워 작은 배로 옳겨 타는 구름다리 바닥이 얼어 붙어 몹시 미끄러워 내 바로 앞에 내리는 사람이 미끄러져 바다로 빠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구조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참으로 포로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이었다. 큰 배 밑에 떨어지면 배 밑에서 끌어 당기는 힘이 있어 빨려 들어가기 때문에 수영을 잘 하는 자도 살아 나오기 어려운 것이다.

조심조심하여 구름다리를 건너서 작은 배로, 작은 배에서 육지에 도착해 보니 거기가 바로 경상 남도 거제군 일운면 고현리의 거제도 포로수용소였다. 거제도는 우리 나라에서 제주도 다음 두 번째로 큰 섬이며, 부산, 진해, 마산, 충무와 인접하고 있다. 1970년 경에 육지인 통영군과 육교를 건설하였고, 면적은 389km2이다.

6.25당시에는 상주인구가 약 10만을 헤아렸으나, 근래는 삼성과 대우 두 조선소가 생겨, 인구가 많이 늘어난 지역인데, U.N군이 이 곳에서 포로수용소를 3년간 운영하였기 때문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의 3년

거제도 포로수용소내 급식장

이 곳에서 나는 포로 아닌 포로로서 연단과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3년을 지내게 되었다.

논바닥 위에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 한 사람이 누으면 그 다음 사람은 발쪽에 머리를 두고 눕고, 또 바로 누으면 그 다음은 거꾸로 눕고 하여, 수백 명이 전부 옆구리가 가마니에 닿게 모로 누워 잤다.

그리고 그 위에 담요를 한 장씩 덮고 잠을 자는데 몇 분만 지나면 체온에 의하여 가마니에 붙어있던 얼음이 녹아 가마니가 축축히 젖어 오는 고로 옷이 젖고 몸이 젖을 뿐만 아니라 옆에 누운 사람들의 발냄새가 코를 찔러오는 것이었다.

그러한 악취와 추위 속에서도 군소리하지 못하고 잠을 자는, 그야말로 인간으로서는 최하의 밑바닥 생활을 했다. 1개 수용소 포로 인원이 5천 명이었는데 이 사람이 소속된 수용소는 61포로수용소였다.

이 5천 명을 통솔하는 통솔책임자를 뽑는데, 처음 50명을 뽑는 중에 이 사람이 뽑히었고, 다음 10명을 뽑는 데도 이 사람이 뽑히었고, 나중엔 5명을, 다음은 2명을, 그리고 마지막 한 명에 바로 이 사람이 뽑히게 되었다.

5천 명을 울렸다 웃겼다 하며 손아귀에 쥐고 휘두르는 통솔책임자를 어떤 개인이 지명함도 아니요, 5천 명의 의사를 종합하여 투표와 거수 등으로 나이 20의 이 사람을 뽑았던 것이었다.

그 속에는 대학교수, 목사 등 사회에서 활약하던 지도급 인사들도 있었지만 그들을 물리치고 3년 동안 61포로수용소를 좌지우지했던 것이다. 다른 수용소는 책임자가 몇 개월 만에 바뀌었지만 이 사람이 맡은 61포로수용소만은 책임자가 3년 동안 바꿔지 않았다.

똥통을 운반중인 포로들: 인민군 포로들은 반공주의자를 인민재판을 통해 처형하고 토막낸 시체를 똥통으로 위장하여 바다에 버렸다.

그러나 이 61포로수용소 안에는 극좌익계에 물들은 사람들이 많아 어느 수용소보다 우익계 청년들이 학살을 당하고 보복을 받으며 가장 곤욕을 치룬 수용소였다.

수시로 빨갱이들이 난동을 일으켜 우익계 청년들을 숙청시켜 주도권을 잡고, 태극기를 내리고 빨갱이 깃발을 올렸다.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과 같이 죽이는 처참한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어떤 때는 이 사람을 모포로 뒤집어 씌워놓고 수십 명이 닥치는 대로 때리며 발로 밟아 짓이기기도 했다.

그런데도 갈비뼈 하나 상하지 않았으니, 하나님깨서 이 사람을 항상 지켜주셨던 것이다. 보통사람 같으면 골병이 들어서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수용소내에서 폭동이 일어나니까 미군들이 기관총을 연발로 난사하여 수많은 포로들이 총에 맞아 쓰러져 죽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앞사람, 옆사람, 뒷사람이 기관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는데도 이 사람만은 총에 맞지 않고 상한 데가 없는 것을 보고, 참으로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막사주변에 반공포로 희생자들을 암매장 했던 곳

그러던 어느 날 밤중에 잠을 자고 있는데 누가 와서 “조동지!, 조동지!” 하고 깨우는 고로 일어나니 잠간 천막 밖으로 나오라고 하기에 밖에 나가니 “잠시 후 조동지를 죽이기로 되어 있으니, 지금 속히 몸을 피하시요!” 하고 이북 말씨로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더니

“그건 알 필요 없다. 다만 내가 죽을 상황에 처하였을 때 당신의 도움으로 살아났으므로 당신은 나의 생명의 은인인데 당신이 죽게 되었으니, 그 은혜를 갚는 의미에서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니 생각을 고쳐 먹고 인민공화국으로 돌아오시오”라고 하며,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옆의 천막으로 피해 누워있으려니, 잠시 후 큰 돌을 가지고 사람 머리를 찧어 죽이는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이 사람 바로 옆에 누워있던 사람이 이 사람 대신 억울하게 희생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후부터 이 사람은 얼굴에다 검정칠을 하고 길게 내려쓰는 영국군 모자를 눌러쓰고 다녔다.

포로수용소내 인민군 최고위장교 이학구 대좌: 조희성님이 대동군 치안대장시절에 이 사람을 살려주었다는 사실 여부는 분명치 않습니다.

식당에서 밥을 먹기 위하여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으면 노출이 될까봐 밥을 타러 가지도 못하고, 김포 고향친구가 타온 밥을 둘이서 나눠먹곤 하다가 때로는 미안한 생각이 들어 계속 먹지 못하고 굶기도 하며 지냈으나 일주일만에 빨갱이 골수분자들에게 들키고 알았다.

이 빨갱이들은 우익 청년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버리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대동군 초대 치안대장을 지낸 바 있는 이 사람이 제 1차로 숙청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좌익청년들에게 잡혀서 빨갱이 본부로 끌려 가는데, 그들은 빨갱이 대장에게 “조희성이가 죽은 줄 알았는데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어 잡아왔습니다” 하고 보고하였다.

그 빨갱이 대장이 “그 놈은 독안에 든 쥐새끼니까 그 곳에 내버려 두고 너희들은 빨리 이쪽으로 집합해!” 하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일언지하에 빨갱이들은 이 사람을 내버려두고 돌아서서 건물 반대쪽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음성이 며칠 전 밤중에 죽음을 피하게 해 준 음성 인데다가 현재 취하는 행동도 도망가라는 신호로 느껴지는 고로, 있는 힘을 다하여 도망쳐 높이 막아놓은 철조망을 하나 기어 올랐다.

기어올라 넘고 또 한 철조망을 기어 올라갈 무렵 빨갱이들이 쫓아와 돌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 많은 돌들이 사정없이 날아오면서 몸에 맞기도 하였으나, 철조망 꼭대기에 올라 갔을 때 뒷통수에 정통으로 맞고 의식을 잃고 철조망 밖으로 떨어졌다.

 

수용소 정화작업을 마치고 반공포로 석방하라는 시위를 주도

조희성님이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반공영화 <철조망을 넘어서> 의 한 장면: 1970년대에 TV상영

철조망에서 떨어진 후 미군 앰브런스에 실려 야전병원으로 후송 되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머리와 몸에 붕대가 감겨 있고 옆에는 김아열 선교사가 앉아 있었다.

지금도 뒷통수에 흉터가 크게 있는데 바로 그 61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할 때 둘에 맞은 상처이다. 김아열 선교사는 전남 광주사람으로 포로수용소를 출입하며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상처를 완전히 회복한 다음 김아열 선교사의 협조로 200여 명의 우익청년을 대동하고 미군의 지원을 받아 좌익에 물든 빨갱이 골순분자들을 색출, 별도로 수용하고 반공주의 일색으로 만들어 버리는 혁명 작업을 개시하였다.

이 사람이 선두에 서서 먼저 61수용소를 완전히 뒤집어 엎고, 빨갱이 깃발을 내리고 대신 태극기를 달았으며 전 인원을 집합시켜 놓고 이 사람이 악질 빨갱이 들을 직접 지적하여 잡아내어 수용소안의 영창에 가두었다.

더 이상 빨갱이들이 난동을 부리지 못하게 정화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사람이 61수용소에 있었던 고로 사람들의 사상을 이미 파악해 놓았기 때문이다.

칼 도끼 철조망을 띁어서 만든 사제무기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62수용소에 들어가서 뒤집어 엎으려 하였으나 빨갱이들의 세력이 너무 강하고 더욱이 미군 장성 돗드 준장이 빨갱이들에게 납치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63수용소, 65수용소, 66수용소를 차례로 뒤집어 엎는데 성공 하였던 것이다. 수용소 정화작업을 성공리에 끝마치고 나서 이 사람은 ‘포로 아닌 포로를 석방하라’ ‘반공 포로 석방하라’ 하는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혈서를 써서 이승만 대통령과 국회의장, 유엔 등에 제출하였더니 이 건의가 관철되어 마침내 정부에서 반공포로를 석방키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반공포로 환영식이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요인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경북 영천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환영사에 이어 반공포로 12만 명의 대표로 이 사람이 답사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연설문을 손수 작성하 여 그 동안 생생히 체험했던 공산주의의 악랄함을 전 세계에 폭로하였다.

군인도 아닌 대학생 신분으로 포로생활에서 당한 기막힌 사정을 말하게 되니 만장한 청중도, 이승만 대통령도, 프란체스카 여사도, 각부 장관을 비룻한 정부요인도 모두 다 울어 눈물바다가 되었던 것이다.

포로가 아닌 20살 젊은 대학생이 인민군에게 죽을 때까지 매를 맞고 이북으로 끌려가면서 당한 고초와 설움, 총살 집행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거제도 포로수용소까지 가며 받은 약소민족의 설움, 수용소내에서 수없는 폭동과 아비규환 속에서 죽음의 고비고비를 당해야만 했던 기막힌 내용을 시간의 제약으로 대강만 열거하여 말했는 데도 온통 울음바다로 변했던 것이다.

이는 한 포로의 설움이면서, 또한 한국 민족 전체의 비극을 대변한 것으로서 지금도 그 연설문이 역사의 한 페이지로서 보존되어 있을 것이다. ‘철조망을 넘어서’ 라는 전쟁영화도 이사람을 주인공으로 하여 제작된 반공영화였던 것이다

 

*주: 「거제도 포로소요사건」 에 대하여 역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당시 수용소장 도트준장

1. 5월 7일 거제도 포로수용소장 돗드준장을 공산포로들이 납치하고 그 석방조건으로서, 공산포로에 대한 대우를 개선할 것.

2. 자유의사에 대한 포로송환 방침을 중지할 것.

3. 포로의 심사를 중지할 것.

4. 포로의 대표위원단을 인정할 것 등 4 항복을 요구하였다.

돗드 준장은 납치된 지 1개월 78시간 5분만인 6월 10일에 겨우 구출되었다.

그런데 5월 20일 부산 포로수용소에서 공산포로들이 경비병에 반항하다가 1명이 피살되자 거제도 수용소의 공산포로들은 또 다시 6월 7일에서 10일에 걸쳐 폭동을 일으켜 다수의 사상자(死傷者)를 내는 대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 폭동 중에 105명의 반공포로들이 공산포로들에게 무참하게 학살되었다.

-金 益達 發行 百科事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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