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사변 전반기

죽음을 각오한 예배 인도

6.25전쟁 당시 전차를 앞세워 서울에 들어오는 인민군

이 사람이 20살 때 6.25 동란이 일어났다.

북괴군이 순식간에 쳐내려 오는 바람에 이 사람은 피난갈 생각을 못하고 고향으로 내려 갔는데 일요일이 되어서 김포읍에 있는 장로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목사님들이 모두 피신하여서 예배를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사람은 학생 신분이었지만 교회 종을 치고 예배를 인도하였다.

예배가 시작되고 조금 지나자 인민군이 나타나 출입구에서 이 사람을 향하여 사격자세를 하고는 총을 쏘려 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시간 반 정도 예배를 인도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하나님을 증거하다 죽으면 순교가 되어 천당가는 줄 알았던 고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예배를 마치고 그냥 집으로 갔으면 무사했을텐데 이 사람은 집집 마다 다니며 전도를 하고 다니니, 인민군이 옆에 다가와 대검을 꽂은 총으로 옆구리를 찌르며 이 사람을 연행하였다.

그래서 잡혀간 곳이 면사무소에 설치한 「인민군 환영 위원회」 라는 곳이었다.

마을사람들이 인민군들 앞에서 데모

인민재판 광경: 법에 기준한 재판이 아니라 참석한 사람들이 유무죄를 결정함. *사진은 특정 사실과 무관합니다.

이 사람이 인민군에게 끌려간 소문이 마을에 퍼지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면사무소에까지 와서 “이 청년은 모범적인 청년이니 죽이면 안된다”고 하며 인민군들 앞에서 데모를 하였다.

당시 인민군들이 점령하면서 많은 우국지사들을 잡아다 죽이면서 공포정치를 했을 때 마을 사람들이 이 사람이 인민군에게 붙들려 갔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와 데모를한 것은 공산 치하에서는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외쳤다. “그 청년은 우리 마을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없어서는 안 될 모범청년이다. 그 청년을 죽이려거든 우리를 먼저 죽여라!”

그런데 인민군 환영위원회 위원장이란 사람은 이사람의 국민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었던 김낙영씨였던 것이다.

김선생님은 이 사람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분이었다.

그는 이사람이 총살형을 당하게 될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사랑스런 제자를 석방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이 사람을 내보내게 되면 자신의 위치가 위태로와질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그 때 마을 사람들의 데모가 있자 이를 핑계거리로 삼아 김선생님은 이 사람을 풀어 주었다.

김낙영 선생님은 이 사람에게 조용히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지금이 어느 때인데 전도를 하고 다니느냐? 오늘 너는 내가 아니었다면 틀림 없이 죽을 터인데, 내가 살려줄 테니 앞으로는 절대 그런 행동을 하지 말고, 인민군에 들어와 일을 해라.” 하며 내보내 주었던 것이다.

지방 빨갱이에게 잡혀 죽을때 까지 매를 맞다

인민군

인민군으로부터 석방되어 집에와 있으니 이 사람이 유능한 청년이라는 것을 안 인민군은 무슨 대회다, 무슨 모임이다 하면서 이 사람 더러 나와서 자기네 일에 협조하라고 채근하였다.

자꾸 거절하다보니 도저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는 고로, 자전거에다 보리쌀 한 말을 싣고 김포를 떠나 서울 흑석동 하숙집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그런데 노량진쯤 오니까 유엔군 비행기가 무차별 폭격을 하는 것이었다.

폭격이 심하여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인데, 하늘을 보니 집체만한 포탄이 머리 너머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전봇대를 붙잡아야 산다’ 하는 생각이 들어 자전거를 버리고 도로변에 있는 전봇대를 부등켜 안아 구사일생로 살아났다.

포탄이 떨어진 자리는 큰 연못 정도의 웅덩이가 파였는데, 파편이 비오듯 하며 폭풍으로 가까운 건물이 파괴됨은 물론 멀리있는 건물의 유리창까지 다 깨지는 것이었다.

그 때 이 사람이 전봇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폭풍에 날아가 죽었을 것이다.

간신히 죽음의 위기를 모면하여 하숙집을 향해 오는데, 거의 다와서 흑석동 지방 빨갱이에게 잡히게 되었다.

뒤에서 총부리를 들이 대었다. “너, 조희성이지? 손들어!” 이 사람은 두 손을 들고 흑석동 인민군 본부로 끌려갔다.

빨갱이들이 볼 때, 이 사람은 집집마다 전도를 하고 다니는 열렬한 예수쟁이였으며 형은 경찰관이니 그들의 눈에는 가시 같은 반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빨갱이들에게 잡혀 끌려가는 이 사람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지방 빨갱이들에게 잡혀간 곳이 흑석동 인민군 본부 지하실이었다.

어두컴컴한 지하실 가운데에는 백열등이 달려 있고 밖으로 나 있는 조그만 창에선 희미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서늘하고 음습하여 공포 분위기가 풍겨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네모난 마차철주를 이 사람의 양쪽 무릎오금에 끼워 놓고 꿇어 앉혔다.

그낭 가만히 앉아 있어도 너무 아파 비명소리가 저절로 나오는데 그들은 이 사람이 못 일어서도록 한 사람이 팔 하나씩 양쪽에서 잡고 내리누르며 또 다른 사람은 구두발로 무릎과 허벅지를 짓 밟았다.

그러면서 너의 형이 있는 곳을 대라는 것이었다.

당시에 이 사람의 친형은 수도 경찰국에 근무하는 경찰관이었다.

이 사람이 말을 하지 않자 그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곡괭이 자루로 이 사람을 인정사정없이 개 패듯 하는 것이었다.

매질이 너무 아파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너무 혹독한 고문이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 때 형님은 김포 고향집에 숨어 있었는데 이 말을 하게 되면 온 가족이 몰살당할 것은 자명한 것이었다.

차라리 나 하나가 희생되어 죽는 것이 낫지 온 가족이 몰살당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자 말을 못하도록 혀를 깨물었다.

“윽” 하는 소리와 함께 입안에서 피가 터지자 빨갱이들은 “이 간나 새끼 악질 반동이구만” 하며 대여섯 명이 있는 힘을 다하여 사정없이 때리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매에 의식을 잃고 쓰러지면 양동이에 찬물을 떠 와서 끼얹어 붓고 꿈틀거리면 또 곡괭이 자루로 사정없이 때리고 또 찬물을 끼얹고 하여 이 사람이 죽을 때까지 매질을 가하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이 사람의 온 몸과 팔다리가 마치 개구리가 죽을 때 다리를 떨다가 잠시 후에 죽는 것처럼 그렇게 부들부들 떨다가 「푹」 하고 꺼지는 상태가 되니 그제서야 그들은 이 사람이 죽은 줄 알고 몽둥이질을 그치고 가마니를 가져다가 이 사람 위에다 덮었던 것이다.

이 사람이 그 때의 상황을 어떻게 알았는가 하면 그 당시에 흑석동 감리교회 이찬영목사 사모님께서 자기 교회 청년 지도교사가 인민군에게 끌려 가는 것을 보고 멀찌가니 따라와 이 사람이 인민군 본부 지하실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창틈으로 이 사람의 매맞는 광경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지켜 보고 돌아가 이찬영 목사님에게 말했던 것이다.

그 후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이찬영 목사님이 이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도 한편 반가와 이 사람의 손을 잡고 그렇게 매를 맞고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있느냐? 하나님을 열심히 믿더니 부활하셨나 보다고 하며 그 당시의 일을 세밀히 말씀해 주셨던 것이다.

이 사람은 한 시간 반 가량 인민군에게 뭍매를 맞았는데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중에도 하나님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꺼져가는 생명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부르며 이 생명과 몸과 모든 전체를 맡기며 하나님께 매달렸던 것이다.

마포 형무소로 이송

모시 옷: 모시 풀로 만든 까끌 까끌한 느낌의 옷, 주로 여름철에 헐렁하게 입음.

의식을 잃은 후 몇 시간이 지나 정신이 들기에 몸을 움직여 보려고 해도 도저히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 사람의 살이 매질에 얼마나 부었는지 헐렁한 여름 모시적삼이 꽉 끼였으며 옷이 터져 그 사이로 살이 여기 저기 튀어 나왔다.

한참 애를 쓰다가 간신히 몸을 뒤집는데 성공하여 조금씩 기어 계단을 올라가니 인민군 장교가 지나다가 이 사람을 보고 부하에게 물었다.

“이 간나 새끼는 뭐야?”

“이 새끼는 반동 아새끼입니다.”

“그럼, 마포 형무소로 이송하라우!”

이리하여 이 사람은 마포형무소로 끌려가게 되었다.

인민군에게 끌려 가는 도중 노량진 도로변에 서 있는 사람들 중에 고모부가 눈에 보이기에 소리쳐 부를 수도 없고 하여 이 사람이 인민군에게 끌려간다는 표시로 피투성이가 된 웃옷을 벗어서 도로변에 던졌다.

그 옷을 영등포에 살고 계셨던 고모부님이 주워서 김포집에 가져다 주었다.

그 옷은 이 사람이 방학 때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야학에서 공부를 가르쳤을 때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고마움의 표시로 나에게 선물한 길쌈모시 옷이 분명하므로 집에서 이 사람이 인민군에게 붙들려 갔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죽은 시체라도 찾으려는 사람들… *사진은 특정 사실과 무관할 수 있습니다.

그 후 부모님들께서는 이 사람의 소식이 전혀 없는 고로 죽은 줄 알고 젊은 사람들의 시신만 있으면 들쳐보며 이 사람의 시체를 찾곤 하였다.

한강 다리가 폭격에 파괴되어 버렸기 때문에 인민군들은 포로들을 노량진을 거쳐 영등포 염천교까지 끌고 갔다.

그런데 가는 도중 내가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한다고 구두발로 사정없이 걷어차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아무리 바르게 걸어 보려고 애를 써도 숨가쁘게 가해오는 고통에 몸의 균형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간신히 마포 형무소에 이르러보니 그 안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었다.

현직 국회의원, 경찰 간부, 대한 청년단장, 군인 등 저명인사들이 천여명 넘게 수감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이 사람이 가장 나이가 어렸지만 가장 처참하게 고문을 당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 사람의 사정을 듣고 난 후 이구동성으로 “어린 것이 죄를 지었으면 얼마나 지었다고 저 모양으로 만들어? 잔인한 놈들..” 하면서 같은 처지이지만 이 사람을 가여워해 주고 사랑해 주었다.

이 사람은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알 수 없는 암담한 현실 속에서 슬픔의 눈물을 안으로 삼키고 오직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텅 빈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갔던 것이다.

철사줄에 묶여 북으로 북으로

인민군에 끌려가다가 총살당해 길가에 널부러져 있는 국군포로들

공산당들은 마포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천여 명의 우국지사들을 모두 죽여 없애기로 계획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마포 형무소에서 4, 5일을 지나는 동안 쌀 한 톨,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던 것이다.

배가 고픈 것은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었으나 목이 타는 갈증은 해소 할 수 없어 밖에 있는 간수에게 “선생님! 목이 타서 견딜 수 없어요. 물 한 모금만 주세요” 하고 애원하니 그 간수가 한다는 말이 “이 반동 아새끼가 물은 무슨 물이야? 너희들은 곧 죽을 놈들이다” 하며 쌀쌀하게 면박을 주었던 것이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알 수 없는 가운데 며칠이 지났다.

하루는 인민군들이 모두 나오라 하여 밖으로 나갔더니 철사줄에 두 손을 꽁꽁 묶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다시 긴 쇠사슬로 앞사람과 뒷사람을 이어 일렬 종대로 만들어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낮에는 비행기의 폭격이 심하고 노출이 되기 때문에 이동을 하지 않고 어두워지기만 하면 북쪽으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유행가 가사 그대로 이 사람은 철사줄에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맨발로 절며 절며 미아리 고개를 넘었다.

그리고는 의정부, 동두천, 전곡, 연천, 평강을 거쳐 신고산을 돌아 원산까지 끌려갔던 것이다.

끌려가는 사람들이 모두 고문을 많이 당했기 때문에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므로 하루 밤에 10리 정도 가면 먼동이 트면서 날이 밝아오기 때문에 원산까지 가는 동안 무려 한 달이 걸렸다.

그들은 , 끌고 가는 중에도 쌀 한 톨, 물 한 모금을 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너무너무 배가 고파 풀을 뜯어 먹었다.

그것도 인민군 감시병에게 들키면 사정없이 총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후려치기 때문에 몰래 뜯어 먹어야 했다.

그래서 낮에 숨어있는 자리에는 풀이 남아나지 않았다.

이 사람은 풀을 뜯어 먹으면서 소가 풀을 맛있게 먹는 심정을 알 것 같았다.

풀의 종류가 여러가지 있지만 그 중에서 쑥을 뜯어 먹으면 흐릿한 정신이 좀 맑아지면서 좋은 요기가 되었다.

평강 쯤에 가니 누가 옥수수를 먹고 속배기를 버린 것이 눈에 띄었다.

감시병이 눈치채지 못하게 몰래 주워서 흙이 묻은 것을 옷에 털어 버리고 먹었더니 정신이 번쩍 났던 적도 있었다.

이 사람은 너무너무 목이 말라 오줌을 받아 마셔야 했다.

노랗다 못해 붉은 피색이 도는 텁텁한 오줌을 손에 받아서 입을 축였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오줌이 더럽다 냄새가 난다하는데 그것은 목이 마르지 않을 때의 소리이다.

이 사람에게는 오줌이 너무나 달고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것이었다.

인민군 개인화기 다발총: 개머리판은 사격시 어께에 붙이는 총구 반대쪽 납작한 부분.

또 어떤 사람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니 물이나 실컷 먹고 죽자하고 동료들 쇠사슬에 묶인 채 동료들을 끌어 당기며 논에 가서 물을 먹다 인민군의 총 개머리판에 머리를 맞아 죽는 것이었다.

그러면 인민군은 죽은 사람을 쇠사슬에서 풀어 논에다 버리고 다음 사람에게 쇠사슬을 연결해 끌고 가는 것이었다.

그들은 사람의 목숨을 파리보다도 못하게 여기는 집단이었다.

필사의 탈출

엄마는 죽었는데… 죽은 엄마 곁에서 울고 있는 아이들…

전쟁이라는 상황은 너무나 비참한 것이었다.

끌려가는 길목마다 죽은 시체가 즐비하게 늘려져 있는데, 그 모습은 너무도 참혹하였다.

아기를 업은 어미의 죽음은 끌려가는 사람 모두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어미는 죽었는데 아기는 엄마를 부르며 눈이 붓고 목이 쉰 상태로 울고 있는 것이었다.

비행기의 기관총에 맞아 죽은 군인들의 시체, 인민군들이 무차별 학살한 양민들의 시체, 그 죽음들은 형형색색으로 이 사람의 마음에 부딪쳐 오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루 이틀만 잠을 안 자도 피곤하여 비틀거리는 법이다.

그러나 놈들은 원산까지 가는 한 달 동안 잠을 한 숨도 재워주지 않는 고로 너무너무 졸려 견딜 수가 없어 철사줄에 매여 가면서도 졸았다.

졸면서 걷다가 걸음을 비틀거리든지 하면 따발총으로 쏘아 죽여 연결된 쇠줄에서 풀어버리는 것이었다.

나이 스무 살에 참으로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연단을 받았으며, 인간의 탈을 쓰고 그 이하가 없을 정도로 밑바닥 중의 밑바닥 생활을 했던 것이다.

원산에 도착하니 놈들은 일을 부려먹기 위하여 주먹밥을 주었다.

그 때부터는 살 만했으나 틀림없이 종래에는 죽일 것이 확실하게 느껴지므로 탈출을 생각하게 되었다.

같이 끌려간 분들이 대부분 정부의 요직에 계셨던 분과 사회 저명 인사로서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분들이지만 이 사람은 그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고 신분 또한 학생이었다.

끌려간 많은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공산주의 빨갱이 놈들이 참으로 지독하구나

너 같은 학생이 무엇을 안다고 또 무엇을 하였다고 이토록 모질게 고통을 주어 고생을 시키다 마지막에는 죽여 없앤단 말인가?

우리들은 그래도 반공을 해서 그러려니 하겠지만 이제 자라나는 젊은 학생까지 무참히 죽이는 공산주의는 참으로 비인도적이요 악질이구나하며 혀를 차고 탄식을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 놈들이 언제라도 필경은 죽이고 말테니, 비록 우리는 죽더라도 너는 이제 스무살 학생이니 청춘이 아까와서라도 한번 탈출해 보라” 조언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죽을 바에야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니까 이왕이면 탈출이라도 해보자 하여 도망가기로 결심을 하였다.

원산폭격: 인민군 보급시설에 대한 아군측 폭격, 이 폭격으로 포로들 전부 사망하였다고 전해들음. 조희성님은 폭격 이전에 탈출하여 죽음을 모면함.

인민군들은 우리들에게 전쟁 물자 옮기는 일을 시켰다. 밀가루 포대 같은 것을 고개 하나 넘어 저쪽으로 메어 나르는 운반작업이었다. 이 사람은 탈출을 결심하고 한 번 밀가루 포대를 메고 중간 고개를 지나 저쪽까지 운반해 보니, 그 곳에 보초 하나가 고갯마루에 서서 총을 들고 지키고 있었다.

경비가 허술한 편이었다. 놈들은 감히 포로들이 탈출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모양이었다. 이 보초 하나만 처치하면 탈출할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두 번째 포대를 메고 고개에 올라와서 그 인민군이 있는 곳을 향하여 마치 다리에 힘이 없어 비틀거리는 시늉을 하며 다가갔다.

그리고는 “어휴, 힘들어” 하면서 힘에 부쳐 포대를 떨어뜨리는 척하였다. 포대를 놓는 동시에 그 보초를 발길질로 힘껏 내질렀다. 이 사람의 발길질에 차인 보초의 총이 보초의 이마를 치자 그 보초는 뒤로 넘어지면서 입에 거품을 흘리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이 사람은 어림잡아 남쪽이라고 생각되는 곳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달음질을 쳤다. 그런데 남쪽으로 도망을 간다는 것이 그만 방향이 틀려 북쪽으로 가게 되었다.

그 당시는 아직 군에 입대하지 않았던 때라 방향을 알 수 있는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며칠간 무작정 도망을 가다가, 너무나 배가 고파 밥을 훔쳐 먹으려고 어떤 민가의 담을 넘어 부엌에 들어갔다.

평양 신양리 형무소로

여기저기 밥을 찾아 보았으나 밥은 없고 고구마 삶은 것이 있기에 막 먹으려고 하는데, 누가 뒤에서 “손들어!” 하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손을 들고 뒤를 돌아보니, 붉은 완장의 내무서원 – 우리 남한에선 경찰관 – 들이 총을 들이대고 있는 것이었다.

고구마는 입에 대보지도 못하고 내무서로 끌려갔다. 그 곳은 함경남도 고원군 탄광역전이었다. 원산에서 포로 한 명이 인민군을 해치고 탈출하였다는 긴급연락을 받은 원산 근처 백 사오십리는 완전 비상 상태였는데 이 사람은 그것도 모른 채 섣불리 행동하다 그만 잡히고 만 것이었다.

이 사람을 잡아서 밤새도록 고문을 가하는데 인간으로서는 차마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들은 이 사람에게 재미로 고통을 가하였으며 사람의 생명을 놓고 장난짓을 하였던 것이다.

이 사람을 발가벗겨 거꾸로 매달아 놓고 가죽 채찍으로 몇 사람이 돌아가면서 후려치며 고추가루물을 이 사람의 코에 집어 넣었으며 또 전기 고문을 가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밤새도록 고문을 한 다음 양손을 머리 뒤로 하여 묶어 놓고는 평양 신양리 형무소로 압송하였다.

서울에서 원산까지 한달동안 끌려간 후, 탈출, 방향을 잘못잡아 북쪽 고원군에서 체포됨. 이후 평양 신양리 형무소로 이송

신양리 형무소에는 한 사람이 들어가 앉아도 여유가 없는 작은 독방이었는데 그들은 거기에 6명을 집어 넣었다. 한 사람이 들어가도 꽉차는 독방에 6명을 집어 넣으니 몸을 움직일 수 없으므로 쥐가 나서 한 사람씩 죽어 나가는 것이었다. 쥐가 난 곳을 주물러 주면 주물러 주는사람의 손에 쥐가 나기 때문에 옆사람이 쥐가 나도 주물러 줄 수 조차 없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죽어 나가면 또 다른 사람을 집어 넣기 때문에 항상 6명이 꽉 찬 상태로 있었던 것이다. 밥이라고는 하루에 한 번씩 주는데 밀 삶은 것에 모래를 섞어 주는 것이었다.

그것을 주면서 하는 말이 “너희들은 이왕 죽을 놈들이니까 총살을 시키면 총알이 아까와. 그러니까 모래를 골라내지 말고 그냥 먹고, 맹장이나 걸려서 죽어”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니 빨리 죽자 하면서 모래째 먹고는 얼마 후에 참으로 고통스럽게 죽어나가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불안한 마음을 갖고 초초로 긴장 속에서 지내기 때문에 피가 썩어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 갔다.

그러나 이 사람만은 항상 마음이 태평한 상태에서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 뜻에 맡긴 채 한 번도 실망이나 낙심을 하지 않고 구원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얼굴이 환한 상태로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간수들도 “이 반동아 새끼는 먹는 것도 없는데 얼굴이 좋다”면서 때리기도 하였다.

이 사람은 모래밀밥을 입 안에 넣어도 모래는 골라내고 밀만 먹었다.

하루는 모래를 골라 내다가 간수에게 들켜 긴 막대기로 머리를 얻어 맞고 정신이 아찔한 적도 있었다.

이 사람은 감방안에서도 끊임없이 찬송을 불렀다.

「죄짐맡은 우리 구주」라는 찬송을 콧 노래로 부르니 같이 있던 사람들이 노래 곡조가 너무 좋다며 가르쳐 달라고 하기에 가르쳐 주어 같이 부르기도 하였다. 이 찬송을 부르니 하나님께서 폭포수와 같이 은혜를 주셨던 것이다.

또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라는 찬송을 콧노래로 부르며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이 독방에 들어온 죄수는 모두 중벌로 다스려 죽이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의 사정을 들어보니, 이 사람만큼 매를 맞은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다시는 그러지 않겠으니 봐달라고 하면서 놈들에게 항복 했기 때문에 매를 피할수 있었으나 이 사람만은 불의 앞에서 결코 굴하지 않고 항복을 하지 않았던 고로 죽을 때까지 그 모진 매를 맞았던 것이었다.

총살 집행

평안남도 대동군

한 달 반쯤 지난 어느 날 오후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다.

모두들 걸음을 걸을 수 없어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기어서 나오기도 하였다. 그들은 죄수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한 30분쯤 운동을 시킨 다음 트럭에 태웠다. 해가 넘어가는 오후에 어디로 데려가는 것일까?

모두들 불안한 심정으로 차에다 몸을 실었으나 차는 곧 출발하였다. 트럭에서 내려보니 도착한 곳은 평양 서포 뒷동산이었다. 그 곳은 서울의 망우리 공동묘지 같은 평양시 근교의 공동묘지인데, 동산 7부 능선쯤에 큰 구덩이가 파여져 있었다.

놈들은 우리들을 총살시킨 후 거기다 묻으려는 작정이었다. 500여 명을 모두 총살시키는데 한 번에 열 명씩 총살을 시키는 것이었다. 제일 마지막에 총살을 당하는 차례에는 여섯 명이 서게 되었는데 그 속에 이 사람도 끼게 되었다.

500명 집단 총살이 집행되었던 대동군 서천면내 서포, 주변에는 저모산, 봉수산, 소형제산, 대형제산이 표시되어 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오백 명이 죽는 광경을 끝까지 다 볼 수 있었다. 말뚝 앞의 큰 구덩이에는 시체가 가득 쌓여 있었고 총잡이는 불과 30m 전방에서 총구를 겨냥하며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덤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 이 영혼을 맡아 주옵소서하고 마음 속으로 기도를 하였다.

그 때는 예수를 증거하다 죽는것이 순교인 줄 알았을 때였다. 불현듯 부모님과 가족들 얼굴이 활동사진 필름처럼 스쳐 지나가는데, 순간 ‘탕! 탕!’ 하고 두 발의 총탄이 불을 뿜으면서 이 사람은 쓰러져 버렸다.

얼마가 지났는지 정신이 들기에 가만히 생각하니 조금 전에 총살을 당한 것까지 기억이 나, 여기가 천당인가 지옥인가 알 수 없어 살을 꼬집어 보니 아픈 고로 내가 다시 살았구나 하고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위에 시체 두 구가 내리 누르고 있고 그 위에 소나무 가지가 덮혀 있었으며 흙이 1∼5cm정도 덮였는데, 죄수복의 크고 넓은 칼라가 얼굴 일부와 코를 덮은 고로 질식사를 당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 시체더미 속에서 자세히 들어 보니 아직 죽지 않은 자의 신음 소리가 났으나 그 엄청난 500여 구의 시체 때문에 살릴 수가 없었다. 필사적인 힘을 다하여 시체 두 구를 헤치고 일어나서 상처가 있는지 온 몸을 점검하여 보니 다행히 상처는 한 군데도 없고 죄수복 칼라에 총탄이 지나간 흔적으로 구멍 두 개가 나 있을 뿐이었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신 것이 너무도 분명하여 이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였다.

500여 명을 총을 쏘아 죽였으니 총이 벌겋게 달아 총구의 끝이 약간 넓어져 총알이 빗나갈 수 있었으리라 하고 생각도 해 보았으나 불과 30m 전방에서 쏘았는데 명중이 되지 않은 것은 기적이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살려주시려니까 제일 마지막에 총살을 당하게 되었으리라 하고 생각되었다.

반공운동가의 도움

인민군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들

서포 뒷동산 꼭대기로 올라가 보니 저 아래 마을에서 불빛이 번쩍 하며 가슴에 와 닿고 하는 고로 하나님! 저 불빛나는 곳으로 가라는 말씀이십니까 하니 다시 번쩍하고 불빛이 다가와 가슴에 부딪히며 그래 그래하는 암시를 주었다.

그래서 그 불빛나는 곳으로 갔다. 가는 중에도 간간히 인민군이 지나가므로 인민군 기척이 나면 숲속에 몸을 감추었다가 지나가면 또 가고 하여 불빛나는 곳에 도착하였다.

그 불빛은 어떤 외딴 집 부엌에서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것이었으며 그 안을 들여다보니 한 처녀가 설겆이를 하고 있었다.

그 처녀의 이름은 이양숙이었고, 평양 여자 사범학교 출신으로 이 사람보다 한 살이 많았다. 부엌문을 열고 그 처녀에게 솔직하게 말을 하였다.

그 곳은 인민군의 점령하에 있는 지역이니 인민군에 관련된 주민이라면 영락없이 붙들려 죽을 운명인데도, 어린애같이 순진하게 나는 서울에서 온 대학생인데 인민군에게 붙들려 감옥살이를 하다가 500명을 죽이는 서포 뒷동산의 총살 집행장에서 인민군에게 총살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살려 주셔서 살아났습니다. 저를 살려주시면 생명의 은인으로 알고 그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그 처녀는 이 사람을 보고 기겁을 하고 놀랐다. 이 사람의 옷과 얼굴은 다른 시체에서 흘러 내린 피로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다. 또 오랫동안 옥중생활로 모발이 많이 길어 있었던 고로 누구든지 처음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 처녀는 인민군과 관련이 없는 교회목사의 외동 따님으로 기독교 신자였다.

그 처녀에게는 오빠가 셋 있었는데 큰 오빠와 셋째 오빠는 목사인 아버지와 함께 산 속으로 들어가 지하 반공 운동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U.N.군 비행기가 공습을 오면 근처 인민군의 무기고와 군수물자 창고, 군부대 위치 등을 무전으로 알려주는 일도 하였다. 그런데 둘째 오빠는 노동당 중앙위원으로 김일성의 총애를 받는 진짜 빨갱이다.

그런데 그 둘째 오빠가 조금 있으면 집에 온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식은 땀이 흐르며 입 안이 말라왔다. 조금 전까지 빨갱이들에게 붙잡혀 사형집행을 당하고 왔는데 또 빨갱이에게 잡힌다면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그래서 그 처녀가 먹으라고 가져 온 삶은 고구마 두 쪽이 목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이 사람은 “성의는 고맙지만 도저히 먹을 수가 없으니 빨리 숨겨주세요” 하고 애원하였다.

이양숙은 불안해 하는 이 사람을 데리고 마당 끝으로 갔다. 거기에는 댑싸리 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는데 그 중 가장 큰 것을 당기니 그 속에 굴이 있었다. 굴 속에는 요와 이불, 등잔불, 책상 등이 있었고 볼세비키 당사(黨史)등 공산 이념서적들도 많이 있었다. 공산치하에서 이런 날이 올 것을 예상하고 이 집 식구들이 미리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인천 월미도에 상륙하는 국군과 UN군: 1950년 9월 15일

이 사람은 굴 속에 있는 동안 공산 이념 서적들을 모조리 독파한 후 이 공산주의는 얼마 못 갈 것을 직감하였다.

부유한 사람의 재산을 빼앗아 못가진 사람들에게 공짜로 나눠주니 처음에는 공산주의를 좋아할지 모르지만 노력없이 얻은 것을 소중히 간직하지도 못할 뿐더러 밤잠 안 자고 땀흘려 노력해서 모은 재산을 빼앗기니 능력 있고 재주 있는 사람들도 구태여 힘써 일할 필요성을 못 느껴 일을 게을리 하게 되므로 이런 사회는 날이 갈수록 피폐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 이후 이 사람은 기회 있을 때마다 공산주의의 허구성과 모순을 논리적으로 설파 하여 많은 사람들을 민주 진영으로 전향시켰다. 이 사람이 굴 안에서 한 달 가량 생활하는 동안 이양숙이란 처녀는 매일 밤 12시만 되면 도시락 두 개씩을 가져다 주었다.

태극기를 흔들며 국군을 환영하는 시민들: 1950년 9월 27일 경인가도

그녀는 이 사람이 서울 사람이라 고구마를 못 먹는 줄 알고 비밀리에 주민들에게 연락하여 자기들도 잘 못 먹는 비싼 쌀을 거둬 쌀밥을 해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날 그날의 전황을 쪽지에 적어 같이 보내왔다.

그래서 이 사람은 굴 속에 있으면서도 9 · 15 인천 상륙과 9 · 28 서울 수복 그리고 평양 탈환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평양 탈환 소식을 전해 듣고 난 다음날 “조동지! 조동지! 해방됐시요! 나오시라요” 하며 부르기에 나가보니 인민군이 개미때 같이 새까맣게 북쪽으로 도망 가고 있었다.

평양시와 대동군 일대는 주민들이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걸고 국군이 입성하면 환호성을 지르며, 만세를 외치며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동군 치안대장

1950년 9월 28일 서울에 진입한 국군과 인민군간의 시가전

한 달 만에 굴에서 나오니 모발은 더욱 길어졌고 햇빛을 보지 못하여 피부가 하얗게 되어 있어 20세의 젊은 청년이 30대로 보였는 모양이었다. 구레나룻 수염이 무성하게 자란 것도 한 원인이 되었다.

대동군내에 있는 젊은 반공 청년들이 치안대를 조직하여서는 이 사람에게 대장을 하라 하였다. 극구 사양하였으나 빨갱이 때려 잡는데는 조동지가 총살 집행까지 당한 철저한 반공주의자니까 적합하다하여 억지로 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사람은 반공청년 30여 명을 데리고 대동군 치안대를 이끌고 인민군과 좌익에 물든 청년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집어 넣는 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치안대원들은 인민군을 포로로 잡기만 하면 죽이는 고로 “성경에도 살인하지 말라고 했고, 또 우리 민족이 일본에게 36년간 식민지 생활하다가 이제 해방을 맞아 독립국가를 세운지 몇 년이나 되었느냐? 이 얼마 안되는 동안에 동족상잔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먼 훗날 치욕의 역사가 될 것이므로 몇몇 위정자들에 의하여 우리가 꼭두각시 노릇을 할 수는 없으니 우리 국민들만이라도 서로 죽이는 일은 삼가하자. 사상이 잘못되어서 그런 것은 사상만 바로 잡으면 되는 것이 아니냐” 고 치안대 젊은 청년들을 모아 놓고 눈물을 흘리며 웅변을 하였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되찾은 국군이 중앙청에 태극기를 올리고 있다.

이에 2/3정도의 대원은 수긍을 하며 호응하는데 나머지 대원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이 안(案)은 다수결로 통과되었는데 삼분의 일 정도의 대원들은 “이 빨갱이 놈은 악질 중의 악질로서 우리 부모를 죽이고 형제 자매를 무참히 학살하고 죽인 고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하며 잡기만 하면 죽이는 고로 그 때마다 말려서 죽을 사람이 죽음을 모면하고 형무소로 넘겨진 사람이 많이 있었다.

치안대장 당시 한번은 밤 12시쯤 되어 어떤 사람으로부터 신고가 들어 왔는데 “저 산 너머 독립가옥 두 채에 인민군 군관단으로 조직된 특공대 2백 명이 이 곳 대동군 치안대를 해치려는 목적으로 독립 가옥 한 채에 100명씩 나뉘어 현재 식사중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 신고를 접하고 바로 치안대원을 모았으나 밤이 깊어선지 5명 밖에 없었다. 대원들 집에 연락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 5명을 데리고 전화 유선줄 꾸러미를 짊어지고 가면서 임무를 부여했는데,

너는 1소대장, 너는 2소대장하며 3, 4, 5소대장을 각각 임명했고 도착하자마자 공포를 쏘다가 내가 신호탄을 쏘며 사격중지! 하면 사격을 멈추고 3소대장! 한 댓 명만 데리고 와! 하면 다 오는 거다하는 작전계획을 지시하며 갔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하고 보니 기와집 두 채가 나란히 있는데, 밖과 안이 보이지 않도록 좁은 담이 있는 고로, 그 두 집 주위를 뺑 둘러서서 몇 분간에 걸쳐 공포를 일제히 쏘아대니 조용한 밤하늘이 뒤흔들릴 정도였다.

밖은 보이지 않는데다가 깜깜한 한밤중에 사방에서 갑자기 콩볶는 듯찬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므로 한참 식사중이던 인민군 특공대 200명 모두는 정신적으로 제압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 대문 쪽에 있는 이 사람이 노란 신호탄을 쏘며 “사격중지!” 명령을 큰 소리로 하게 되니 갑자기 사격이 중지되고 사방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우리 대한민국 국군 1개 중대는 인민군 군관단으로 구성된 특공대 200명을 완전 포위하였다. 목숨이 아깝거든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수류탄 세례를 받을 것이다” 하고 외치니 이 사람의 굵은 음성이 조용한 밤 하늘에 찌렁찌렁 울려 퍼졌다.

몇 초 있으니 안에서 “시키는 대로 하겠소. 목숨만 살려주시오” 하는 나이 듬직한 사람의 음성이 흘러 나왔다.

“알았소” 해 놓고 “3소대장 거기 한 댓 명만 이쪽으로 보내” 하니 대문 앞에 모인 5명이 전부였다.

뒤에 알고 보니 군에서는 4소대장은 없고 화기소대라고 부르며 5소대 라는 것도 편제상 없었는데, 그 당시 나이도 어리고 군 경험이 없었던 고로 그런 우(愚)를 범하였던 것이다.

“전원 무기를 버리고, 손을 들고 한 명씩 나와!” 하고 명령을 하니 우르르 손을 들고 대문 밖으로 나오는데, 그 순간 주머니에 무기가 있을 땐 곤란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고로 공포를 두 발 쏘며 “도로 들어가!” 해 놓고

“전부 옷을 벗고 팬티만 입고 나와! 만약 나오라는 명령이 없는 데도 나오면 사살하겠다! 명령이 떨어지면 한 사람씩 나와!” 해서 나오는 사람마다 가져갔던 유선줄로 두 손을 머리 뒤로 묶어서 200명 전원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포로 중에는 장성급도 몇 명 있고, 중국 팔로군 출신도 있었는데 대부분 군경력이 많은 자들이었다. 그 중 최고 높은 별 두개짜리 되는 사람은 이 사람이 제지할 새도 없이 치안대원이 총을 쏘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다.

다음은 별 하나짜리 차례가 되는데 이 사람이 총을 든 치안대원 앞을 가로막으며 죽이지 말라고 강력하게 명령하여 나머지 포로들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그들을 학교 교실에다 집결시켜 놓고 “나는 서울서 온 대학생으로서 군생활을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이 지역 치안 책임자다. 우리 여섯 명이 너희들 200명을 잡았는데, 이래 가지고 너희들이 뭘 하겠느냐”고 하니 저희들도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힌다는 눈치였다.

“우리는 다 한 형제요, 한 핏줄을 이어 받은 단군 할아버지 자손으로서, 동족끼리 서로 싸우고 죽이고 하는 짓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는 우리 민족사에 큰 오점을 남기는 일이다.

몇몇 위정자들이 시킨다 하여 동족을 살상한다는 것은 사람의 노릇이 아니다. 우리 민족이 일본놈 밑에서 식민지 생활을 하여 36년간이란 기나긴 세월에 언어도 뺏기고 재산도 뺏기고 모든 것을 유린당해 왔는데 무엇이 모자라서 해방된지 불과 몇 년 되지 않아 동족끼리 피를 흘려야 하느냐 이는 한치 앞도 못 내다 보는 인생의 발상인 것이다.

한 개인의 사리 사욕을 위해서 수 많은 동족이 고통을 당하고 피를 흘리고 수백만 명이 죽어가도 양심에 가책이 되지 않는 그런 폭군에게 더 이상 속아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끼리라도 서로 죽이고 싸우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국민 다수가 원하고 잘 살 수 있는 길을 찾아 나가자”고 즉석 연설을 하였다. 이에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도 긍정을 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그 때 이 사람은 아무리 공산주의에 물이 들은 자라도 양심은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미처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들을 잡아 계속 형무소로 보내고 군내 구석 구석을 뒤지며 철저히 멸공작업을 하는 고로, 주민들의 호응이 매우 좋아서 200명 군관단 특공대가 들었던 집에서도 그 집주인 아들이 다락을 통해 뒷담을 넘어 신고를 해 주어 큰 전공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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