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사변 이전

국민학교 5학년

우물 – 사진은 참고용일 뿐 특정 사실과 무관합니다

이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한번 마음을 먹고 뜻을 세우면 포기하지 않고 끝을 봐야 손을 떼는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이 사람의 집에는 우물이 없어 이 사람 어머니께서는 동네 공동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오곤 하였다.

집안의 온갖 궂은 일과 부엌일을 도맡아 하시는 어머니가 멀리까지 가서 물을 길어오는 것에 마음 아파하던 이 사람은 집 뒤란에서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그 때가 국민학교 5학년 때였다. 아침부터 땅을 파내려가 저녁이 지나고 하늘에 별이 초롱초롱 빛나는 한밤중이 되었다.

이 사람 키로 세 배가 넘는 5∼6m까지 파내려가자 이윽고 물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물이 나오는 것을 보고서야 땅위로 올라왔다.

물론 식사도 하지 않은채. 부모님은 몹시 안스러워 몇 번이고 와서 올라와서 식사하고 쉬었다 하라고 했지만 이 사람은 물이 나을 때까지는 올라가지 않겠다고 스스로 결심한 것을 지켰던 것이다.

물이 나오기 전에는 허리가 아프고 팔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어려운 상황도 많이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여 목적한 바를 성취하였던 것이다.

모품앗이

모내기 : 맨 앞에 보이는 못줄을 기준으로 모판에서 육성한 모(크면 쌀이 열리는 식물)를 하나 하나 논에 심는 일 *사진은 특정 사실과 무관합니다.

집에서 짓는 농사는 모두 소작이었고, 처음에는 그나마 40여 두락 되었으나, 아버지께서 농사일을 잘 돌보아 주시지 않으므로 20여 두락으로 농지가 줄어들게 되었다.

어머니는 될 수 있는 대로 가산이 줄어들지 않게 하시려고 추수가 끝나면 아버지 몰래 벼 가마니를 감추시는 등 살림에 무척 힘을 들이셨다.

어머니께서 농사일을 비롯한 자녀부양과 가사 전반에 걸친 일에 몹시 고생을 하심으로, 어린 나이에도 어머니가 너무나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국민학교 시절부터 농번기에 어머니께서 모 품앗이를 다니시는 것이 안타까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모 품앗이를 다니게 되었다.

모를 심다 보면 같이 일하는 어른들이 “야! 희성이, 모 참 잘 낸다” 하며 점점 모 심는 면적을 넓혀 주곤 했다.

그러나 어른들이 넓혀 주는 면적을 다 심기도 전에 못줄이 넘어가는 고로 허리 한번 제대로 펴 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모를 심어야만 했다.

허리가 끊어져 나가는 것 같고 팔 다리가 아프며, 고사리 같은 손끝이 닳아서 통증이 오고 피가 날 정도가 되어도, 해가 지고 어두워질 때까지 그 고통을 참고 견디었다가 끝내고 집에 오곤 하였다.

이러한 일을 매일 계속 반복하여 모내기 철이 끝날 무렵쯤 되어서는 온 몸이 떨려오는 말라리아병에 걸려 밤새도록 앓고 밤을 지새우다가 이튿날이면 또 아픈 몸을 이끌고 모를 내러 가곤 하였던 것이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일을 하였다. 부모님께서 “아픈데 무슨 일을 하느냐?” 하시며 만류를 하셔도, 내가 고통을 당하는 만큼 부모님이 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농번기의 모내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일을 하였던 것이다.

어른들이 짓궂게도 모심는 면적을 넓혀 주어도 이 한 몸은 희생하겠다는 마음이 있었기에, 군소리하지 않고 일을 하니까 동네 어른들이 칭찬을 하면서도 희성이는 좀 미련하고 고지식하다는 평을 하곤 하였다.

극에 달하는 고생을 참고 견디어

짚신 : 짚을 가늘게 꼬아서 만든 신발 *사진은 특정 사실과 무관합니다.

또, 겨울이면 산에 가서 나무를 하여 집뜰 안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장작을 읍내에 내다가 팔아 가계에 보탬이 되게 하였다.

장작을 힘에 겨울 정도로 짊어지고, 눈이 와서 무릎까지 발이 빠지는 상태에서도 2km가 넘는 눈길을 한 번도 쉬지 않고 읍내에까지 가서 팔고 오곤 하였다.

눈 덮힌 길을 끙끙거리며 고통을 참고 견디며 중간쯤 가면 메투리 짚신을 신은 발이 온통 눈에 젖어 발이 시려 깨어져 나가는 것 같고, 손은 손대로 시려워 손끝을 칼로 베어내는 듯한 고통이 가해오는 것이었다.

무거운 짐을 내려 좀 쉬어야겠는데, 온통 눈으로 덮힌 상태라 쉴 장소도, 쉴 수도 없어 이중 삼중으로 더해지는 고통에 엉엉 울면서도 기어이 읍에까지 가서 장작을 팔아 오곤 했던 것이다.

보통 아이들 같으면 그렇게 혼이 나면 그 다음날에는 안 가든지, 만약 가더라도 좀 가볍게 짊어지고 가겠지만, 그렇게 혼이 나고도 여전히 전날의 양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게 힘에 겹도록 짊어지고 울면서 가는 것이었다.

지게 : 개인 화물 운송 수단, 광주리에 짐을 싣고 가방메듯 어께에 짊어짐 *사진은 특정 사실과 무관함니다.

이와 같이 항상 극에 달하는 심한 고생을 하며 고통을 참고 견디는 훈련을 하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본인도 모르게 하였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하여도 남보다 많이 하여야 했고, 일을 하여도 다른 사람보다는 더 많이 더 열심히 하였으며, 짐을 짊어져도 언제나 힘에 겨울 정도로 짊어지고 끙끙거리며 오금을 제대로 옮기지 못할 정도로 지고 다니는 습성이 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스스로 나를 짓이기는 훈련을 했던 것이다.

비가 온다고 해서 나무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번 목표를 세우면 꾸준하게 하는 성품으로 잠시라도 집에서 드러누워 쉬지 않는 성품이었다.

중학교 시절

어린 시절에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배울 때는 배워도 금방 잊어버려 훈장님에게 매를 맞는 일도 많이 있었으나, 중학교 때부터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공부가 잘 되지 않아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저녁 6시에 잠을 자면서 어머니에게 9시에 꼭 깨워 달라고 하여 하루 3시간씩 자고 저녁 9시부터 시작하여 밤을 세워 공부를 하였던 것이다.

잠이 오면 나가서 찬물에 목욕을 하는 등 기를 쓰고 공부를 하므로 코피도 부지기수로 흘렸다.

길을 가면서도 영어단어를 외웠는데 단어 카드를 만들어 한 손에 쥐고 외운 것을 다른 손으로 옮기면서 노력에 노력을 하였던 것이다.

최종에는 영어사전을 한 장 한 장 뜯으면서 암기를 하여 기어이 사전을 다 외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학교에서 수석을 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 사람은 중학교 시절부터 인생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는 이런 일이 동기가 되었다.

섣달 그믐날 밤늦도록 윷놀이를 하면서 같이 놀던 친구가 이튿날 아침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어 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이 사람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불러 일으켰다.

어쩌다 그 친구의 어머님을 만나게 되면 자기 아들을 떠올리면서 이 사람을 붙잡고 엉엉 우시곤 하였다.

그래서 이사람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파헤치기 위하여 유명한 철학서적을 거의 다 읽어 보았다.

그러나 그 모든 철학 서적들이 수준 이하로 느껴졌다.

그 중에서 낫다는 것이 톨스토이의 저서였으나 그 속에도 모순이 있었다.

인간은 생각할 수 있는 동물이기에 세상 사람들은 흔히 ‘영적 동물’ 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마음먹는 대로 된다’는 평범한 말 가운데 진리가 있다는 것을 어린 시절에 깨달았다.

세상 모든 일들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일에 대해 생각을 하고 ‘하면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노력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생각이나 마음은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 마음, 마음 속에 죽음을 싫어하고 행복을 영위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우리의 조상들이 원래는 영생을 하였고, 행복하게 살았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 사람은 일찍이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틀림없이 사람은 영생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확신이 항상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밤중에 종종 마을 뒷동산 중구봉산 봉우리에 올라가 마을과 넓은 들판을 내려다 보고 “왜 사람은 고생 고생하다가 죽어가는가? 안 죽을 수는 없을까? 산에 풀과 잔디는 시들었다가 봄이 되면 다시 싹이 나고 꽃이 피는데, 죽은 내 친구는 왜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가? 어째서 인간의 생명은 죽으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이별을 해야만 하는가?” 하며 깊이 생각에 잠겨보곤 하였다.

사람이 해서는 안될 일이 없으며, 불가능이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솟구쳤다.

우리 인류들이 무수히 삶과 죽음의 문제를 놓고 많은 도전과 시련을 겪어 왔지만 죽음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로 남아 있었다.

이 사람에게는 기필코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여 전 인류를 사망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버리고 말리라 하는 마음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항상 마음의 움직임이 크고 대국적으로 움직였다.

그래서 친구들이 장래 국회의원이 된다, 장관이 된다, 대통령이 된다는 등의 희망을 말했을 때, 이 사람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시시하게 느껴졌다.

‘내가 만약 권력을 누린다면 전 세계를, 온 천하를 손아귀에 쥐고 휘두르리라’는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매사에 적극적이었고 희망적이었다.

평발의 마라톤 선수

평발 : 발바닥의 안쪽 아치가 없는 발, 쉽게 피로해지는 발구조로 군대면제 사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진은 참고용이며 특정 사실과 무관합니다.

이 사람은 학생시절에는 마라톤 선수였다. 운동을 하려면 어느 정도 신체적 조건이 갖추어져야 된다. 특히 마라톤선수는 발이 평발이면 선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체육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희성이, 너는 마당발이므로 마라톤을 할 수 없으니 하지 말아라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무엇이든지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기어이 마라톤을 하고야 말았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같이 3∼4년을 꾸준히 연습하여 나중에는 김포군내에서 1,2등을 다투기에 이르렀다.

경기도 시군대항 마라톤 시합에 참가하여 1등으로 들어와 테이프를 끊고 기절하여 병원에 실려간 적도 있었다.

깨어나니 체육선생님이 와서 “그것 봐, 내가 하지 말라고 하여도 하더니‥‥ 잘못하면 죽어” 하고 걱정을 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대견스러운 표정을 보이셨다.

당시에는 지금같이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이 없어서, 자갈투성이의 비포장 도로의 인도쪽, 자갈이 별로 없는 부분을 이용하여 맨발로 연습을 하였던 것이다.

당시에 운동화가 나오기도 했지만 너무 비싸고 또한 형편이 여의치 못하여 아예 생각도 못하였던 것이다.

당시 전국 마라톤 대회에서 3위 안에 들지 못한 조희성 선수를 제치고 보스톤 마라톤 대회 출전권을 획득한 서윤복 선수. 보스톤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하여 월계관을 쓰고 시상대에 서있습니다.

한 시간 정도만 뛰어도 정신이 몽롱한 상태인데 거기서 포기를 하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계속 뛰게 되면, 팔 다리의 감각이 무뎌지면서 숨이 차는 경지를 지나 무감각 상태에서 뛰게 된다.

백리 길을 두 시간이 넘도록 뛰게 되면 온 몸에 땀이 비오듯 하는데, 그 고통의 경지는 당해본 자가 아니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꾸준히 아침과 저녁 늦게, 또는 밤중에 연습을 하였는데 포기 하고 싶은 상태에서 포기 하지 않고 자신과 더불어 싸워 이기는 훈련을 하고 또 하였다.

하기 싫다고 쉬고 기분 내 키면 하고 하는 생활을 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전국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여, 1947년 미국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서윤복선수와도 같이 뛰어 본 적이 있었다.

국민학교 때에는 기운이 없어 다른 아이들에게 매를 맞고 자랐으나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이겨보려고, 궁리 끝에 기운을 내게 하려면 영양 보충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돈이 없어 고기는 사서 먹을 수 없고 하여, 밭에서 나는 콩을 가느다란 철사로 만든 망에다 넣고 불에 볶아 호주머니에 가득 넣고 길을 가며, 일을 하며 수시로 먹었더니 기운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중학교 2천명 학생중에 기운으로는 당할 자가 없을 정도로 힘이 세어 씨름판에서 항상 1등을 하곤 하였다.

그 당시에 쌀 두 가마니를 짊어지고 다니므로 김포 동네에서 ‘장사’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이가 60인데도 시멘트 여섯 포대(쌀 세 가마니 240kg)를 짊어지고 다닐 수 있다.

한창 젊은 나이 때보다 더욱 더 힘이 세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고학생(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마련하는 학생)

이 사람은 어린시절부터 외할아버지께서 “사람이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절대로 신세를 지지 말아야 한다. 어느 집에 가더라도 그냥 나오지말고 엽전 한 닢이라도 놓고 나와야 한다”고 하시던 말씀을 듣고 자랐다.

이 사람은 어린시절에도 한번 마음을 먹고 뜻을 세우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해 내고야 마는 성미였다.

또한 내 한 몸이 희생해서 될 일이라면 아무리 어렵고 험한 일이라도 가리거나 사양하지 않았으며, 자진해서 일을 찾아서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을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모든 일에서 항상 남보다 뒤지기를 싫어했다.

이 사람이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다니게 되었을 때, 요즘 같이 교통이 편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김포에서 서울시내에 있는 학교에 다닐 수가 없어 집을 떠나 서울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그 당시 성동경찰서 사찰계장으로 계시는 신당동 외삼촌댁에서 형님과 같이 신세를 지며 학교에 다녔다.

고향에서 추수를 하게 되면 쌀을 두 가마니씩 외삼촌댁에 갖다 주는데도 불구하고 외숙모님은 형님과 내가 식사하는 것을 꺼려하고 눈치를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외삼촌댁에서 나와 학교에서 자취를 하며 공부를 하였다.

형님은 몇 번이고 외삼촌집으로 다시 들어가자고 울며 권유하였으나, 나는 신세지는 것이 싫어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형님은 외삼촌댁에 계시고, 나는 고생스러워도 계속 학교 교실에서 생활하였다.

수업시간에는 열심히 공부하였고 방과 후에는 성냥과 비누 등의 물건을 들고 집집마다 팔러 다녔다.

처음에는 보따리를 들고 다니며 집집마다 물건을 파는 것이 부끄럽고 창피하였으나 “너 같은 놈은 이렇게 보따리를 들고 다니며 집집마다 물건을 파는 것이 마땅해! 이 보다 더한 일을 해야 하는데 이것도 네게는 수월한 것이야” 하는 생각을 하니 별 무리없이 다닐 수 있었다.

시일이 갈수록 장사하는 요령도 생기고 거래처도 많이 확보되었다.

한번은 물건을 들고 가는데, 어떤 아저씨가 “이발소에는 비누를 많이 사용하니까 이발소에 가 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발소에 찾아 갔더니 이 사람이 고학하는 학생이라고 하여 비누를 팔아 주었는데 이용사 협회의 간부로 있는 사람의 주선으로 서울 시내 이발소에 비누를 댈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서울 시내에 있는 이발소는 거의 다 이 사람이 비누를 대어 주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적지 않은 돈을 벌게 되어 고향에서 돈이 없어 공부를 하지 못하는 친구 세 사람을 데려다 학비를 대주며 같이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또 3만 원이라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돈을 삼보주식회사라는 회사에 투자하여 주주가 되기도 하였다.

이 회사는 대만에서 설탕을 수입하여 국내에 유통 시키는 무역회사였는데, 6.25사변 때 없어졌다.

장사를 하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생기는 것이었다.

서울 시내에서 일정한 구역 내에는 안 들어가 본 집이 없는데, 어떤 때는 담임선생님 댁인 줄도 모르고 들어간 적도 있었다.

그때 여선생님이 맨발로 뛰어 나오시며 “네가 이렇게 고생을 하는 줄 몰랐다. 내가 학비를 대 줄테니 제발 이런 장사는 하지 말아라” 하시며 손에 돈을 쥐어 주셨지만 기어이 뿌리치고 나오기도 하였다.

또 어떤 때는 부부싸움으로 기분이 상해 있는 집에 물건을 팔러 들어갔다가 어린 학생에게 화풀이를 해 대는데 꼼짝없이 당해야 했다.

화를 내기만 하면 괜찮은데 그 물건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 물건을 팔 수 없게 만드니, 그것을 하나씩 줍는 이 사람의 마음은 설움이 올라와 기가 막히는 것이었다.

추운 겨울에는 남들이 따뜻한 방안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이 사람은 찹쌀떡을 들고 골목마다 외치고 다니며 팔았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쉬지 않고 다녔다.

하지만 누가 시켜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서 했으며 자신을 짓이기기 위한 방편으로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얼마 후에는 흑석동에다 방을 얻어 놓고 외삼촌댁에 있던 형님을 불러와 같이 공부하였고, 고향 김포에서 여동생이 올라와 밥을 지어주었다.

학교에서는 항상 우등생이었고, 항상 희생과 봉사의 마음이 차고 넘치는 고로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이 사람은 공부를 해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교과서를 모두 외워 버렸다.

수업시간에 집중하여 듣고 집에 와서 공책에 필기하면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기침하는 것까지 정확하게 적을 수가 있을 정도였다.

잡념이 전혀 없고 피가 깨끗한 사람은 모든 것이 피속에 녹음이 되는 고로, 그 자체가 녹음기 테이프라서 다시 재생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19세 청년 시절

이 사람은 열아흡 살 때부터 마음으로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기를 쓰는 생활을 시작하였다.

여자 치맛자락만 봐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오는 고로 치맛자락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땅만 쳐다보고 다니다 어떤 때는 전봇대를 들이받아 정신이 가물가물한 적도 있었다.

기성 교회 부흥회에 참석하였을 때 감리교 부흥강사인 박재봉 목사가 하는 말이 마음으로나 눈길로나 음란죄를 짓지 않으려면 여자를 뱀같이 보라고 하여, 그 때부터 여자를 뱀같이 보았다.

그리하여 전차에서도 옆 좌석에 여자가 앉으면 질겁을 하고 일어나 다른 곳으로 피하곤 하였다.

그러면 어떤 짓궂은 여자는 이 사람을 따라와서 “나 때문에 학생이 일어났는가 본데 가서 앉으라”고 하면 이 사람은 “나는 서서 가는게 더 좋아요!” 하는 식으로 대답하거나 아예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정욕이 올라오면 ‘이 개 같은 마귀새끼’ 하고 자신에게 욕을 하면 정욕이 사라졌다.

또 정욕이 올라오면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땀이 날 정도로 달리기를 하거나, 심한 노동을 가하며 자신을 짓이기는 생활을 하니 정욕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대학생

당시에는 대학교에 다니면서 흑석동에 있는 감리교회에 나갔었다.

교회에서의 직책은 중.고등반 학생들과 청년들을 지도하는 책임교사였으며, 흑석동 일대에 집집마다 전도를 하며 철저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토요일이면 학생과 청년들을 데리고 전도를 하러 다니기도 했다.

남산

어느날 학생 60여 명과 같이 남산에 올라가 노방 전도를 하고 내려 오는데, 남산 교회입구 계단에서 당시 박태선 집사님께서 북을 치며 전도를 하고 계셨다.

그래서 우리 학생 전도팀과 합세하여 전도를 하였다.

그때 박태선 집사님께서 북을 치며 전도를 하셨는데, 북을 벗어 이 사람에게 주며 “쳐보라” 하여 이 사람이 북을 치며 전도를 하였다.

이 사람이 북을 치는 것을 보고 남산교회의 어떤 교인이 말하기를 박태선 집사님은 북을 딴 사람에게 절대 쳐 보게 한 사실이 없는데, 이상하게 청년에게만 북을 치게 하니 특별한 일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 이미 영모님 (박태선 집사님)께서는 이 사람을 알아보셨으나 이 사람은 전혀 영모님이라는 존재와 나의 앞길에 대하여도 몰랐다.

그러나, 박태선 집사님을 만난 후부터 입안에 꿀물과 같이 단물이 흐르며 뱃속까지 시원한 생수가 연결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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