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사변 후반기

신양리 형무소에 재수감

나체로 이동중인 인민군 포로들

대동군 치안대장시절 어느날, 미군 헌병이 지프차를 타고 와서 갑자기 권총을 들이대며 영어로 이 사람이 빨갱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당시 이 사람은 치안대장이라 소제(蘇制)권총을 두 정이나 차고 있었기 때문에, 차고 있던 권총을 꺼내어 재빨리 사격자세를 취하였다.

헌병은 치안대장이 빨갱이라는 정보가 들어와서 잡으러 왔다고 했다.

그래서 이 사람은 한 쪽 손으로 팔의 POLICE CHIEF라고 쓴 완장을 가리키며 빨갱이가 아니고 빨갱이를 잡아서 없애는 자라고 말하였다. 그러면 우리 대장에게로 가보자고 하여 이 사람은 지프차에 타고 미 헌병대 본부로 갔다.

그런데 미 헌병대장은 자초지종을 묻지도 않고 형무소에 보내라고 명령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사람은 다시 평양 신양리 형무소로 가게 되었다.

뒤에 알고보니 치안대장이라는 자가 빨갱이를 잡으면 죽이지 못하게 한다 하여 치안대원 중에 불만이 있던 몇 명이 헌병대에 이 사람이 빨갱이라고 신고를 한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이 사람은 이런 상황에 처하도록 해 주신 하나님께 깊이 감사하게 되었다. 얼마 안 있어 중공군이 인해 전술을 쓰면서 물밀듯이 밀고 내려 오게 되니 당시 대동군 치안대원 30여 명은 몰살당했으며, 내 생명의 은인이었던 이양숙이란 처녀도 그 때 죽음을 당하였다.

이 소식을 부산 가야 수용소에서 포로로 잡혀온 인민군들에게 듣고 동료들을 생각하며 슬피 운 적도 있었다. 이 신양리 형무소에는 전에 이 사람이 직접 포로로 잡아서 집어넣은 인민군 수천여 명이 수용되어 있는 고로, 이 사람이 들어가니 많은 포로들이 깜짝 놀라면서

“어떻게 해서 치안대장인 당신이 여기에 들어 왔느냐”고 물어왔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저 그렇게 되었노라고 담담하게 답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잡힌 포로들은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서 이 사람을 담요로 덮어 씌우고 때리며 발로 짓밟기도 하였다. 이 사람은 형무소 안에서 갖은 수모와 곤욕을 치르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향하여

압록강을 건너고 있는 중공군

며칠 있으니 신양리 형무소가 포로들로 넘쳐 동양방직 공장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는 밀을 주식(主食)으로 주는 고로 그걸 먹다가 그만 항문이 막혀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며칠을 고생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수용소 내의 길바닥에 쓰러져 의식불명이 되어 있었는데 마침 지나가던 어느 국군장교가 보고 주머니에서 하얀 알약(다이아찡)을 꺼내 입 안에다 두서너 알 넣어주고 갔다.

한참후 정신이 들어 깨어보니 온 전신이 설사로 인해 똥범벅이 되어 있었다. 어느새 가을이 되어 조석으로 서늘한 때였지만 다 벗어버리고 모포로 몸을 감고 식사를 타러 다녔다.

그렇게 해서 타온 밥을 먹지 않고 밥 한그릇으로 팬티 하나와 바꾸고, 또 이튿날 밥 한 그릇으로 런닝 하나와 바꾸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며칠이 지나서야 복장을 다 갖출 수 있었다.

포로로 수용되어 있는 자들이 한참 먹을 시기인 젊은 사람들이라 적은 급식량으로는 항상 배가 고픈 상태였기 때문에 옷과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몸은 회복되지 않고 곧 바로 이질로 밥을 먹기만 하면 계속 그대로 설사로 나와 버리는 고로 얼굴과 몸 전체는 뼈만 앙상히 남게 되었다.

철수직전 흥남부두

그런데 전황이 아군에게 불리하게 변해 국군은 중공군에 밀려 남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 사람은 포로들과 함께 인천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 사람의 고향이 김포라서 이 지역의 지리는 훤히 아는 고로 여기서 탈출을 시도하면 성공할 것 같아 시도해 보려 해도 너무 몸이 쇠약해져 있는데다 계속 이질이 낫지 않은 상태이므로 탈출을 할 수 가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사람의 탈출을 병고(病苦)로써 막은 것을 이 사람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 당시 탈출하게 된다 해도 국군이 계속 후퇴하며 밀려 내려오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도망을 못 가게 하였던 것이다.

전세(戰勢)는 점점 불리하여 후퇴 일로에 있었던 고로 또 다시 부산으로 가게 되었다. 화물열차에다 몸을 싣고 포로들과 함께 남으로 달리게 되니 고향 김포와는 점점 멀어지니 여기서 도망 못하면 앞으로는 더욱 불리할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감으로 달리는 화물열차에서 철길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피골(皮骨)이 상접하고 쇠약할 대로 쇠약한 몸인지라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한참 후 정신을 차려보니 포로 수용소 안의 의무실이었다.

곧 이어 부산 가야수용소로 가게 되었고 그 곳에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수용소를 건설하는 작업에 투입되어, 포로를 지키며 감독하는 미군들에게 설움도 많이 받았다.

상륙함

몸이 아픈 사람이나 성한 사람 상관 없이 포로들을 때리고 가혹하게 작업을 시키는데, 이 사람은 이질이 걸려 기운이 없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데도 그들은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행동이 민첩하지 못하다 하여 군화발에 채이고 총개머리판에 얻어 맞는 고통을 당하였던 것이다. ‘갓댐 (God Damn)’하고 소리지르며 가혹하게 일을 시키는데 몸이 아프다는 표시를 해도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쇠약한 몸을 끌고 무거운 돌을 운반하다가 넘어지고 쓰러지면 쫓아와서 매를 가하는 고로, 다시 그 돌을 짊어지고 가다가는 또 쓰러지고 하는 이런 비참한 상황은 당해 본 자가 아니면 말로만 들어서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가야 수용소에서 약소민족의 설움을 뼈속깊이 맛보았다. 후세에는 다시 이런 비참한 꼴을 당하지 않아야 되겠다는 굳은 각오와 결심을 하였다.

국력배양에 젊음을 불태을 것을 가슴깊이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이를 갈아부치고 참고 또 참았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전황은 점점 불리하다는 소문과 함께 음력 정월 초하룻날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앞으로 닥쳐을 운명앞에 초연(超然)한 자세로 상륙함에 몸을 실었다.

오끼나와로 간다, 하와이로 간다, 괌도로 간다, 바다에 몽땅 수장(水葬)시켜 버릴 것이다라는 등 구구한 소리와 억측들이 난무한 가운데 항해는 계속되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이 상륙함은 영화관, 교회 등의 시설을 갖춘 큰 군함이었는데, 5천여 명이 먹을 수 있는 밥이 나무로 제조된 둥근 밥통에 담겨 크레인에 의하여 밧줄로 윗층에서 아랫층으로 내려왔다.

여러 단계를 걸쳐 배식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 동안을 배고픔을 참지 못한 많은 포로들이 일시에 몰려 그 큰 밥통에 매달려 손으로 밥을 퍼서 먹는 고로 힘이 약한 자는 밑에 깔려서 죽어가고 힘이 강한 자는 밥을 실컷 먹는 일대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이 때 밑에 깔려 죽은 자가 수십 명이고 부상자는 수백 명에 이르는 큰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곳이 거제도였다.

도착한 곳이 어딘지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우리를 실은 상륙함이 닻을 내리며 정박하는 것을 보아 목적지에 도착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너무 날씨가 추워 작은 배로 옳겨 타는 구름다리 바닥이 얼어 붙어 몹시 미끄러워 내 바로 앞에 내리는 사람이 미끄러져 바다로 빠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구조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참으로 포로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이었다. 큰 배 밑에 떨어지면 배 밑에서 끌어 당기는 힘이 있어 빨려 들어가기 때문에 수영을 잘 하는 자도 살아 나오기 어려운 것이다.

조심조심하여 구름다리를 건너서 작은 배로, 작은 배에서 육지에 도착해 보니 거기가 바로 경상 남도 거제군 일운면 고현리의 거제도 포로수용소였다. 거제도는 우리 나라에서 제주도 다음 두 번째로 큰 섬이며, 부산, 진해, 마산, 충무와 인접하고 있다. 1970년 경에 육지인 통영군과 육교를 건설하였고, 면적은 389km2이다.

6.25당시에는 상주인구가 약 10만을 헤아렸으나, 근래는 삼성과 대우 두 조선소가 생겨, 인구가 많이 늘어난 지역인데, U.N군이 이 곳에서 포로수용소를 3년간 운영하였기 때문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의 3년

거제도 포로수용소내 급식장

이 곳에서 나는 포로 아닌 포로로서 연단과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3년을 지내게 되었다.

논바닥 위에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 한 사람이 누으면 그 다음 사람은 발쪽에 머리를 두고 눕고, 또 바로 누으면 그 다음은 거꾸로 눕고 하여, 수백 명이 전부 옆구리가 가마니에 닿게 모로 누워 잤다.

그리고 그 위에 담요를 한 장씩 덮고 잠을 자는데 몇 분만 지나면 체온에 의하여 가마니에 붙어있던 얼음이 녹아 가마니가 축축히 젖어 오는 고로 옷이 젖고 몸이 젖을 뿐만 아니라 옆에 누운 사람들의 발냄새가 코를 찔러오는 것이었다.

그러한 악취와 추위 속에서도 군소리하지 못하고 잠을 자는, 그야말로 인간으로서는 최하의 밑바닥 생활을 했다. 1개 수용소 포로 인원이 5천 명이었는데 이 사람이 소속된 수용소는 61포로수용소였다.

이 5천 명을 통솔하는 통솔책임자를 뽑는데, 처음 50명을 뽑는 중에 이 사람이 뽑히었고, 다음 10명을 뽑는 데도 이 사람이 뽑히었고, 나중엔 5명을, 다음은 2명을, 그리고 마지막 한 명에 바로 이 사람이 뽑히게 되었다.

5천 명을 울렸다 웃겼다 하며 손아귀에 쥐고 휘두르는 통솔책임자를 어떤 개인이 지명함도 아니요, 5천 명의 의사를 종합하여 투표와 거수 등으로 나이 20의 이 사람을 뽑았던 것이었다.

그 속에는 대학교수, 목사 등 사회에서 활약하던 지도급 인사들도 있었지만 그들을 물리치고 3년 동안 61포로수용소를 좌지우지했던 것이다. 다른 수용소는 책임자가 몇 개월 만에 바뀌었지만 이 사람이 맡은 61포로수용소만은 책임자가 3년 동안 바꿔지 않았다.

똥통을 운반중인 포로들: 인민군 포로들은 반공주의자를 인민재판을 통해 처형하고 토막낸 시체를 똥통으로 위장하여 바다에 버렸다.

그러나 이 61포로수용소 안에는 극좌익계에 물들은 사람들이 많아 어느 수용소보다 우익계 청년들이 학살을 당하고 보복을 받으며 가장 곤욕을 치룬 수용소였다.

수시로 빨갱이들이 난동을 일으켜 우익계 청년들을 숙청시켜 주도권을 잡고, 태극기를 내리고 빨갱이 깃발을 올렸다.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과 같이 죽이는 처참한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어떤 때는 이 사람을 모포로 뒤집어 씌워놓고 수십 명이 닥치는 대로 때리며 발로 밟아 짓이기기도 했다.

그런데도 갈비뼈 하나 상하지 않았으니, 하나님깨서 이 사람을 항상 지켜주셨던 것이다. 보통사람 같으면 골병이 들어서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수용소내에서 폭동이 일어나니까 미군들이 기관총을 연발로 난사하여 수많은 포로들이 총에 맞아 쓰러져 죽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앞사람, 옆사람, 뒷사람이 기관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는데도 이 사람만은 총에 맞지 않고 상한 데가 없는 것을 보고, 참으로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막사주변에 반공포로 희생자들을 암매장 했던 곳

그러던 어느 날 밤중에 잠을 자고 있는데 누가 와서 “조동지!, 조동지!” 하고 깨우는 고로 일어나니 잠간 천막 밖으로 나오라고 하기에 밖에 나가니 “잠시 후 조동지를 죽이기로 되어 있으니, 지금 속히 몸을 피하시요!” 하고 이북 말씨로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더니

“그건 알 필요 없다. 다만 내가 죽을 상황에 처하였을 때 당신의 도움으로 살아났으므로 당신은 나의 생명의 은인인데 당신이 죽게 되었으니, 그 은혜를 갚는 의미에서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니 생각을 고쳐 먹고 인민공화국으로 돌아오시오”라고 하며,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옆의 천막으로 피해 누워있으려니, 잠시 후 큰 돌을 가지고 사람 머리를 찧어 죽이는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이 사람 바로 옆에 누워있던 사람이 이 사람 대신 억울하게 희생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후부터 이 사람은 얼굴에다 검정칠을 하고 길게 내려쓰는 영국군 모자를 눌러쓰고 다녔다.

포로수용소내 인민군 최고위장교 이학구 대좌: 조희성님이 대동군 치안대장시절에 이 사람을 살려주었다는 사실 여부는 분명치 않습니다.

식당에서 밥을 먹기 위하여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으면 노출이 될까봐 밥을 타러 가지도 못하고, 김포 고향친구가 타온 밥을 둘이서 나눠먹곤 하다가 때로는 미안한 생각이 들어 계속 먹지 못하고 굶기도 하며 지냈으나 일주일만에 빨갱이 골수분자들에게 들키고 알았다.

이 빨갱이들은 우익 청년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버리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대동군 초대 치안대장을 지낸 바 있는 이 사람이 제 1차로 숙청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좌익청년들에게 잡혀서 빨갱이 본부로 끌려 가는데, 그들은 빨갱이 대장에게 “조희성이가 죽은 줄 알았는데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어 잡아왔습니다” 하고 보고하였다.

그 빨갱이 대장이 “그 놈은 독안에 든 쥐새끼니까 그 곳에 내버려 두고 너희들은 빨리 이쪽으로 집합해!” 하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일언지하에 빨갱이들은 이 사람을 내버려두고 돌아서서 건물 반대쪽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음성이 며칠 전 밤중에 죽음을 피하게 해 준 음성 인데다가 현재 취하는 행동도 도망가라는 신호로 느껴지는 고로, 있는 힘을 다하여 도망쳐 높이 막아놓은 철조망을 하나 기어 올랐다.

기어올라 넘고 또 한 철조망을 기어 올라갈 무렵 빨갱이들이 쫓아와 돌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 많은 돌들이 사정없이 날아오면서 몸에 맞기도 하였으나, 철조망 꼭대기에 올라 갔을 때 뒷통수에 정통으로 맞고 의식을 잃고 철조망 밖으로 떨어졌다.

 

수용소 정화작업을 마치고 반공포로 석방하라는 시위를 주도

조희성님이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반공영화 <철조망을 넘어서> 의 한 장면: 1970년대에 TV상영

철조망에서 떨어진 후 미군 앰브런스에 실려 야전병원으로 후송 되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머리와 몸에 붕대가 감겨 있고 옆에는 김아열 선교사가 앉아 있었다.

지금도 뒷통수에 흉터가 크게 있는데 바로 그 61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할 때 둘에 맞은 상처이다. 김아열 선교사는 전남 광주사람으로 포로수용소를 출입하며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상처를 완전히 회복한 다음 김아열 선교사의 협조로 200여 명의 우익청년을 대동하고 미군의 지원을 받아 좌익에 물든 빨갱이 골순분자들을 색출, 별도로 수용하고 반공주의 일색으로 만들어 버리는 혁명 작업을 개시하였다.

이 사람이 선두에 서서 먼저 61수용소를 완전히 뒤집어 엎고, 빨갱이 깃발을 내리고 대신 태극기를 달았으며 전 인원을 집합시켜 놓고 이 사람이 악질 빨갱이 들을 직접 지적하여 잡아내어 수용소안의 영창에 가두었다.

더 이상 빨갱이들이 난동을 부리지 못하게 정화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사람이 61수용소에 있었던 고로 사람들의 사상을 이미 파악해 놓았기 때문이다.

칼 도끼 철조망을 띁어서 만든 사제무기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62수용소에 들어가서 뒤집어 엎으려 하였으나 빨갱이들의 세력이 너무 강하고 더욱이 미군 장성 돗드 준장이 빨갱이들에게 납치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63수용소, 65수용소, 66수용소를 차례로 뒤집어 엎는데 성공 하였던 것이다. 수용소 정화작업을 성공리에 끝마치고 나서 이 사람은 ‘포로 아닌 포로를 석방하라’ ‘반공 포로 석방하라’ 하는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혈서를 써서 이승만 대통령과 국회의장, 유엔 등에 제출하였더니 이 건의가 관철되어 마침내 정부에서 반공포로를 석방키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반공포로 환영식이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요인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경북 영천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환영사에 이어 반공포로 12만 명의 대표로 이 사람이 답사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연설문을 손수 작성하 여 그 동안 생생히 체험했던 공산주의의 악랄함을 전 세계에 폭로하였다.

군인도 아닌 대학생 신분으로 포로생활에서 당한 기막힌 사정을 말하게 되니 만장한 청중도, 이승만 대통령도, 프란체스카 여사도, 각부 장관을 비룻한 정부요인도 모두 다 울어 눈물바다가 되었던 것이다.

포로가 아닌 20살 젊은 대학생이 인민군에게 죽을 때까지 매를 맞고 이북으로 끌려가면서 당한 고초와 설움, 총살 집행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거제도 포로수용소까지 가며 받은 약소민족의 설움, 수용소내에서 수없는 폭동과 아비규환 속에서 죽음의 고비고비를 당해야만 했던 기막힌 내용을 시간의 제약으로 대강만 열거하여 말했는 데도 온통 울음바다로 변했던 것이다.

이는 한 포로의 설움이면서, 또한 한국 민족 전체의 비극을 대변한 것으로서 지금도 그 연설문이 역사의 한 페이지로서 보존되어 있을 것이다. ‘철조망을 넘어서’ 라는 전쟁영화도 이사람을 주인공으로 하여 제작된 반공영화였던 것이다

 

*주: 「거제도 포로소요사건」 에 대하여 역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당시 수용소장 도트준장

1. 5월 7일 거제도 포로수용소장 돗드준장을 공산포로들이 납치하고 그 석방조건으로서, 공산포로에 대한 대우를 개선할 것.

2. 자유의사에 대한 포로송환 방침을 중지할 것.

3. 포로의 심사를 중지할 것.

4. 포로의 대표위원단을 인정할 것 등 4 항복을 요구하였다.

돗드 준장은 납치된 지 1개월 78시간 5분만인 6월 10일에 겨우 구출되었다.

그런데 5월 20일 부산 포로수용소에서 공산포로들이 경비병에 반항하다가 1명이 피살되자 거제도 수용소의 공산포로들은 또 다시 6월 7일에서 10일에 걸쳐 폭동을 일으켜 다수의 사상자(死傷者)를 내는 대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 폭동 중에 105명의 반공포로들이 공산포로들에게 무참하게 학살되었다.

-金 益達 發行 百科事典에서 발췌

6.25사변 전반기

죽음을 각오한 예배 인도

6.25전쟁 당시 전차를 앞세워 서울에 들어오는 인민군

이 사람이 20살 때 6.25 동란이 일어났다.

북괴군이 순식간에 쳐내려 오는 바람에 이 사람은 피난갈 생각을 못하고 고향으로 내려 갔는데 일요일이 되어서 김포읍에 있는 장로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목사님들이 모두 피신하여서 예배를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사람은 학생 신분이었지만 교회 종을 치고 예배를 인도하였다.

예배가 시작되고 조금 지나자 인민군이 나타나 출입구에서 이 사람을 향하여 사격자세를 하고는 총을 쏘려 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시간 반 정도 예배를 인도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하나님을 증거하다 죽으면 순교가 되어 천당가는 줄 알았던 고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예배를 마치고 그냥 집으로 갔으면 무사했을텐데 이 사람은 집집 마다 다니며 전도를 하고 다니니, 인민군이 옆에 다가와 대검을 꽂은 총으로 옆구리를 찌르며 이 사람을 연행하였다.

그래서 잡혀간 곳이 면사무소에 설치한 「인민군 환영 위원회」 라는 곳이었다.

마을사람들이 인민군들 앞에서 데모

인민재판 광경: 법에 기준한 재판이 아니라 참석한 사람들이 유무죄를 결정함. *사진은 특정 사실과 무관합니다.

이 사람이 인민군에게 끌려간 소문이 마을에 퍼지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면사무소에까지 와서 “이 청년은 모범적인 청년이니 죽이면 안된다”고 하며 인민군들 앞에서 데모를 하였다.

당시 인민군들이 점령하면서 많은 우국지사들을 잡아다 죽이면서 공포정치를 했을 때 마을 사람들이 이 사람이 인민군에게 붙들려 갔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와 데모를한 것은 공산 치하에서는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외쳤다. “그 청년은 우리 마을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없어서는 안 될 모범청년이다. 그 청년을 죽이려거든 우리를 먼저 죽여라!”

그런데 인민군 환영위원회 위원장이란 사람은 이사람의 국민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었던 김낙영씨였던 것이다.

김선생님은 이 사람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분이었다.

그는 이사람이 총살형을 당하게 될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사랑스런 제자를 석방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이 사람을 내보내게 되면 자신의 위치가 위태로와질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그 때 마을 사람들의 데모가 있자 이를 핑계거리로 삼아 김선생님은 이 사람을 풀어 주었다.

김낙영 선생님은 이 사람에게 조용히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지금이 어느 때인데 전도를 하고 다니느냐? 오늘 너는 내가 아니었다면 틀림 없이 죽을 터인데, 내가 살려줄 테니 앞으로는 절대 그런 행동을 하지 말고, 인민군에 들어와 일을 해라.” 하며 내보내 주었던 것이다.

지방 빨갱이에게 잡혀 죽을때 까지 매를 맞다

인민군

인민군으로부터 석방되어 집에와 있으니 이 사람이 유능한 청년이라는 것을 안 인민군은 무슨 대회다, 무슨 모임이다 하면서 이 사람 더러 나와서 자기네 일에 협조하라고 채근하였다.

자꾸 거절하다보니 도저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는 고로, 자전거에다 보리쌀 한 말을 싣고 김포를 떠나 서울 흑석동 하숙집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그런데 노량진쯤 오니까 유엔군 비행기가 무차별 폭격을 하는 것이었다.

폭격이 심하여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인데, 하늘을 보니 집체만한 포탄이 머리 너머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전봇대를 붙잡아야 산다’ 하는 생각이 들어 자전거를 버리고 도로변에 있는 전봇대를 부등켜 안아 구사일생로 살아났다.

포탄이 떨어진 자리는 큰 연못 정도의 웅덩이가 파였는데, 파편이 비오듯 하며 폭풍으로 가까운 건물이 파괴됨은 물론 멀리있는 건물의 유리창까지 다 깨지는 것이었다.

그 때 이 사람이 전봇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폭풍에 날아가 죽었을 것이다.

간신히 죽음의 위기를 모면하여 하숙집을 향해 오는데, 거의 다와서 흑석동 지방 빨갱이에게 잡히게 되었다.

뒤에서 총부리를 들이 대었다. “너, 조희성이지? 손들어!” 이 사람은 두 손을 들고 흑석동 인민군 본부로 끌려갔다.

빨갱이들이 볼 때, 이 사람은 집집마다 전도를 하고 다니는 열렬한 예수쟁이였으며 형은 경찰관이니 그들의 눈에는 가시 같은 반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빨갱이들에게 잡혀 끌려가는 이 사람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지방 빨갱이들에게 잡혀간 곳이 흑석동 인민군 본부 지하실이었다.

어두컴컴한 지하실 가운데에는 백열등이 달려 있고 밖으로 나 있는 조그만 창에선 희미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서늘하고 음습하여 공포 분위기가 풍겨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네모난 마차철주를 이 사람의 양쪽 무릎오금에 끼워 놓고 꿇어 앉혔다.

그낭 가만히 앉아 있어도 너무 아파 비명소리가 저절로 나오는데 그들은 이 사람이 못 일어서도록 한 사람이 팔 하나씩 양쪽에서 잡고 내리누르며 또 다른 사람은 구두발로 무릎과 허벅지를 짓 밟았다.

그러면서 너의 형이 있는 곳을 대라는 것이었다.

당시에 이 사람의 친형은 수도 경찰국에 근무하는 경찰관이었다.

이 사람이 말을 하지 않자 그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곡괭이 자루로 이 사람을 인정사정없이 개 패듯 하는 것이었다.

매질이 너무 아파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너무 혹독한 고문이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 때 형님은 김포 고향집에 숨어 있었는데 이 말을 하게 되면 온 가족이 몰살당할 것은 자명한 것이었다.

차라리 나 하나가 희생되어 죽는 것이 낫지 온 가족이 몰살당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자 말을 못하도록 혀를 깨물었다.

“윽” 하는 소리와 함께 입안에서 피가 터지자 빨갱이들은 “이 간나 새끼 악질 반동이구만” 하며 대여섯 명이 있는 힘을 다하여 사정없이 때리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매에 의식을 잃고 쓰러지면 양동이에 찬물을 떠 와서 끼얹어 붓고 꿈틀거리면 또 곡괭이 자루로 사정없이 때리고 또 찬물을 끼얹고 하여 이 사람이 죽을 때까지 매질을 가하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이 사람의 온 몸과 팔다리가 마치 개구리가 죽을 때 다리를 떨다가 잠시 후에 죽는 것처럼 그렇게 부들부들 떨다가 「푹」 하고 꺼지는 상태가 되니 그제서야 그들은 이 사람이 죽은 줄 알고 몽둥이질을 그치고 가마니를 가져다가 이 사람 위에다 덮었던 것이다.

이 사람이 그 때의 상황을 어떻게 알았는가 하면 그 당시에 흑석동 감리교회 이찬영목사 사모님께서 자기 교회 청년 지도교사가 인민군에게 끌려 가는 것을 보고 멀찌가니 따라와 이 사람이 인민군 본부 지하실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창틈으로 이 사람의 매맞는 광경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지켜 보고 돌아가 이찬영 목사님에게 말했던 것이다.

그 후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이찬영 목사님이 이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도 한편 반가와 이 사람의 손을 잡고 그렇게 매를 맞고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있느냐? 하나님을 열심히 믿더니 부활하셨나 보다고 하며 그 당시의 일을 세밀히 말씀해 주셨던 것이다.

이 사람은 한 시간 반 가량 인민군에게 뭍매를 맞았는데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중에도 하나님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꺼져가는 생명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부르며 이 생명과 몸과 모든 전체를 맡기며 하나님께 매달렸던 것이다.

마포 형무소로 이송

모시 옷: 모시 풀로 만든 까끌 까끌한 느낌의 옷, 주로 여름철에 헐렁하게 입음.

의식을 잃은 후 몇 시간이 지나 정신이 들기에 몸을 움직여 보려고 해도 도저히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 사람의 살이 매질에 얼마나 부었는지 헐렁한 여름 모시적삼이 꽉 끼였으며 옷이 터져 그 사이로 살이 여기 저기 튀어 나왔다.

한참 애를 쓰다가 간신히 몸을 뒤집는데 성공하여 조금씩 기어 계단을 올라가니 인민군 장교가 지나다가 이 사람을 보고 부하에게 물었다.

“이 간나 새끼는 뭐야?”

“이 새끼는 반동 아새끼입니다.”

“그럼, 마포 형무소로 이송하라우!”

이리하여 이 사람은 마포형무소로 끌려가게 되었다.

인민군에게 끌려 가는 도중 노량진 도로변에 서 있는 사람들 중에 고모부가 눈에 보이기에 소리쳐 부를 수도 없고 하여 이 사람이 인민군에게 끌려간다는 표시로 피투성이가 된 웃옷을 벗어서 도로변에 던졌다.

그 옷을 영등포에 살고 계셨던 고모부님이 주워서 김포집에 가져다 주었다.

그 옷은 이 사람이 방학 때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야학에서 공부를 가르쳤을 때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고마움의 표시로 나에게 선물한 길쌈모시 옷이 분명하므로 집에서 이 사람이 인민군에게 붙들려 갔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죽은 시체라도 찾으려는 사람들… *사진은 특정 사실과 무관할 수 있습니다.

그 후 부모님들께서는 이 사람의 소식이 전혀 없는 고로 죽은 줄 알고 젊은 사람들의 시신만 있으면 들쳐보며 이 사람의 시체를 찾곤 하였다.

한강 다리가 폭격에 파괴되어 버렸기 때문에 인민군들은 포로들을 노량진을 거쳐 영등포 염천교까지 끌고 갔다.

그런데 가는 도중 내가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한다고 구두발로 사정없이 걷어차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아무리 바르게 걸어 보려고 애를 써도 숨가쁘게 가해오는 고통에 몸의 균형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간신히 마포 형무소에 이르러보니 그 안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었다.

현직 국회의원, 경찰 간부, 대한 청년단장, 군인 등 저명인사들이 천여명 넘게 수감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이 사람이 가장 나이가 어렸지만 가장 처참하게 고문을 당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 사람의 사정을 듣고 난 후 이구동성으로 “어린 것이 죄를 지었으면 얼마나 지었다고 저 모양으로 만들어? 잔인한 놈들..” 하면서 같은 처지이지만 이 사람을 가여워해 주고 사랑해 주었다.

이 사람은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알 수 없는 암담한 현실 속에서 슬픔의 눈물을 안으로 삼키고 오직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텅 빈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갔던 것이다.

철사줄에 묶여 북으로 북으로

인민군에 끌려가다가 총살당해 길가에 널부러져 있는 국군포로들

공산당들은 마포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천여 명의 우국지사들을 모두 죽여 없애기로 계획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마포 형무소에서 4, 5일을 지나는 동안 쌀 한 톨,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던 것이다.

배가 고픈 것은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었으나 목이 타는 갈증은 해소 할 수 없어 밖에 있는 간수에게 “선생님! 목이 타서 견딜 수 없어요. 물 한 모금만 주세요” 하고 애원하니 그 간수가 한다는 말이 “이 반동 아새끼가 물은 무슨 물이야? 너희들은 곧 죽을 놈들이다” 하며 쌀쌀하게 면박을 주었던 것이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알 수 없는 가운데 며칠이 지났다.

하루는 인민군들이 모두 나오라 하여 밖으로 나갔더니 철사줄에 두 손을 꽁꽁 묶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다시 긴 쇠사슬로 앞사람과 뒷사람을 이어 일렬 종대로 만들어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낮에는 비행기의 폭격이 심하고 노출이 되기 때문에 이동을 하지 않고 어두워지기만 하면 북쪽으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유행가 가사 그대로 이 사람은 철사줄에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맨발로 절며 절며 미아리 고개를 넘었다.

그리고는 의정부, 동두천, 전곡, 연천, 평강을 거쳐 신고산을 돌아 원산까지 끌려갔던 것이다.

끌려가는 사람들이 모두 고문을 많이 당했기 때문에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므로 하루 밤에 10리 정도 가면 먼동이 트면서 날이 밝아오기 때문에 원산까지 가는 동안 무려 한 달이 걸렸다.

그들은 , 끌고 가는 중에도 쌀 한 톨, 물 한 모금을 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너무너무 배가 고파 풀을 뜯어 먹었다.

그것도 인민군 감시병에게 들키면 사정없이 총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후려치기 때문에 몰래 뜯어 먹어야 했다.

그래서 낮에 숨어있는 자리에는 풀이 남아나지 않았다.

이 사람은 풀을 뜯어 먹으면서 소가 풀을 맛있게 먹는 심정을 알 것 같았다.

풀의 종류가 여러가지 있지만 그 중에서 쑥을 뜯어 먹으면 흐릿한 정신이 좀 맑아지면서 좋은 요기가 되었다.

평강 쯤에 가니 누가 옥수수를 먹고 속배기를 버린 것이 눈에 띄었다.

감시병이 눈치채지 못하게 몰래 주워서 흙이 묻은 것을 옷에 털어 버리고 먹었더니 정신이 번쩍 났던 적도 있었다.

이 사람은 너무너무 목이 말라 오줌을 받아 마셔야 했다.

노랗다 못해 붉은 피색이 도는 텁텁한 오줌을 손에 받아서 입을 축였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오줌이 더럽다 냄새가 난다하는데 그것은 목이 마르지 않을 때의 소리이다.

이 사람에게는 오줌이 너무나 달고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것이었다.

인민군 개인화기 다발총: 개머리판은 사격시 어께에 붙이는 총구 반대쪽 납작한 부분.

또 어떤 사람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니 물이나 실컷 먹고 죽자하고 동료들 쇠사슬에 묶인 채 동료들을 끌어 당기며 논에 가서 물을 먹다 인민군의 총 개머리판에 머리를 맞아 죽는 것이었다.

그러면 인민군은 죽은 사람을 쇠사슬에서 풀어 논에다 버리고 다음 사람에게 쇠사슬을 연결해 끌고 가는 것이었다.

그들은 사람의 목숨을 파리보다도 못하게 여기는 집단이었다.

필사의 탈출

엄마는 죽었는데… 죽은 엄마 곁에서 울고 있는 아이들…

전쟁이라는 상황은 너무나 비참한 것이었다.

끌려가는 길목마다 죽은 시체가 즐비하게 늘려져 있는데, 그 모습은 너무도 참혹하였다.

아기를 업은 어미의 죽음은 끌려가는 사람 모두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어미는 죽었는데 아기는 엄마를 부르며 눈이 붓고 목이 쉰 상태로 울고 있는 것이었다.

비행기의 기관총에 맞아 죽은 군인들의 시체, 인민군들이 무차별 학살한 양민들의 시체, 그 죽음들은 형형색색으로 이 사람의 마음에 부딪쳐 오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루 이틀만 잠을 안 자도 피곤하여 비틀거리는 법이다.

그러나 놈들은 원산까지 가는 한 달 동안 잠을 한 숨도 재워주지 않는 고로 너무너무 졸려 견딜 수가 없어 철사줄에 매여 가면서도 졸았다.

졸면서 걷다가 걸음을 비틀거리든지 하면 따발총으로 쏘아 죽여 연결된 쇠줄에서 풀어버리는 것이었다.

나이 스무 살에 참으로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연단을 받았으며, 인간의 탈을 쓰고 그 이하가 없을 정도로 밑바닥 중의 밑바닥 생활을 했던 것이다.

원산에 도착하니 놈들은 일을 부려먹기 위하여 주먹밥을 주었다.

그 때부터는 살 만했으나 틀림없이 종래에는 죽일 것이 확실하게 느껴지므로 탈출을 생각하게 되었다.

같이 끌려간 분들이 대부분 정부의 요직에 계셨던 분과 사회 저명 인사로서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분들이지만 이 사람은 그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고 신분 또한 학생이었다.

끌려간 많은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공산주의 빨갱이 놈들이 참으로 지독하구나

너 같은 학생이 무엇을 안다고 또 무엇을 하였다고 이토록 모질게 고통을 주어 고생을 시키다 마지막에는 죽여 없앤단 말인가?

우리들은 그래도 반공을 해서 그러려니 하겠지만 이제 자라나는 젊은 학생까지 무참히 죽이는 공산주의는 참으로 비인도적이요 악질이구나하며 혀를 차고 탄식을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 놈들이 언제라도 필경은 죽이고 말테니, 비록 우리는 죽더라도 너는 이제 스무살 학생이니 청춘이 아까와서라도 한번 탈출해 보라” 조언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죽을 바에야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니까 이왕이면 탈출이라도 해보자 하여 도망가기로 결심을 하였다.

원산폭격: 인민군 보급시설에 대한 아군측 폭격, 이 폭격으로 포로들 전부 사망하였다고 전해들음. 조희성님은 폭격 이전에 탈출하여 죽음을 모면함.

인민군들은 우리들에게 전쟁 물자 옮기는 일을 시켰다. 밀가루 포대 같은 것을 고개 하나 넘어 저쪽으로 메어 나르는 운반작업이었다. 이 사람은 탈출을 결심하고 한 번 밀가루 포대를 메고 중간 고개를 지나 저쪽까지 운반해 보니, 그 곳에 보초 하나가 고갯마루에 서서 총을 들고 지키고 있었다.

경비가 허술한 편이었다. 놈들은 감히 포로들이 탈출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모양이었다. 이 보초 하나만 처치하면 탈출할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두 번째 포대를 메고 고개에 올라와서 그 인민군이 있는 곳을 향하여 마치 다리에 힘이 없어 비틀거리는 시늉을 하며 다가갔다.

그리고는 “어휴, 힘들어” 하면서 힘에 부쳐 포대를 떨어뜨리는 척하였다. 포대를 놓는 동시에 그 보초를 발길질로 힘껏 내질렀다. 이 사람의 발길질에 차인 보초의 총이 보초의 이마를 치자 그 보초는 뒤로 넘어지면서 입에 거품을 흘리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이 사람은 어림잡아 남쪽이라고 생각되는 곳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달음질을 쳤다. 그런데 남쪽으로 도망을 간다는 것이 그만 방향이 틀려 북쪽으로 가게 되었다.

그 당시는 아직 군에 입대하지 않았던 때라 방향을 알 수 있는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며칠간 무작정 도망을 가다가, 너무나 배가 고파 밥을 훔쳐 먹으려고 어떤 민가의 담을 넘어 부엌에 들어갔다.

평양 신양리 형무소로

여기저기 밥을 찾아 보았으나 밥은 없고 고구마 삶은 것이 있기에 막 먹으려고 하는데, 누가 뒤에서 “손들어!” 하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손을 들고 뒤를 돌아보니, 붉은 완장의 내무서원 – 우리 남한에선 경찰관 – 들이 총을 들이대고 있는 것이었다.

고구마는 입에 대보지도 못하고 내무서로 끌려갔다. 그 곳은 함경남도 고원군 탄광역전이었다. 원산에서 포로 한 명이 인민군을 해치고 탈출하였다는 긴급연락을 받은 원산 근처 백 사오십리는 완전 비상 상태였는데 이 사람은 그것도 모른 채 섣불리 행동하다 그만 잡히고 만 것이었다.

이 사람을 잡아서 밤새도록 고문을 가하는데 인간으로서는 차마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들은 이 사람에게 재미로 고통을 가하였으며 사람의 생명을 놓고 장난짓을 하였던 것이다.

이 사람을 발가벗겨 거꾸로 매달아 놓고 가죽 채찍으로 몇 사람이 돌아가면서 후려치며 고추가루물을 이 사람의 코에 집어 넣었으며 또 전기 고문을 가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밤새도록 고문을 한 다음 양손을 머리 뒤로 하여 묶어 놓고는 평양 신양리 형무소로 압송하였다.

서울에서 원산까지 한달동안 끌려간 후, 탈출, 방향을 잘못잡아 북쪽 고원군에서 체포됨. 이후 평양 신양리 형무소로 이송

신양리 형무소에는 한 사람이 들어가 앉아도 여유가 없는 작은 독방이었는데 그들은 거기에 6명을 집어 넣었다. 한 사람이 들어가도 꽉차는 독방에 6명을 집어 넣으니 몸을 움직일 수 없으므로 쥐가 나서 한 사람씩 죽어 나가는 것이었다. 쥐가 난 곳을 주물러 주면 주물러 주는사람의 손에 쥐가 나기 때문에 옆사람이 쥐가 나도 주물러 줄 수 조차 없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죽어 나가면 또 다른 사람을 집어 넣기 때문에 항상 6명이 꽉 찬 상태로 있었던 것이다. 밥이라고는 하루에 한 번씩 주는데 밀 삶은 것에 모래를 섞어 주는 것이었다.

그것을 주면서 하는 말이 “너희들은 이왕 죽을 놈들이니까 총살을 시키면 총알이 아까와. 그러니까 모래를 골라내지 말고 그냥 먹고, 맹장이나 걸려서 죽어”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니 빨리 죽자 하면서 모래째 먹고는 얼마 후에 참으로 고통스럽게 죽어나가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불안한 마음을 갖고 초초로 긴장 속에서 지내기 때문에 피가 썩어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 갔다.

그러나 이 사람만은 항상 마음이 태평한 상태에서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 뜻에 맡긴 채 한 번도 실망이나 낙심을 하지 않고 구원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얼굴이 환한 상태로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간수들도 “이 반동아 새끼는 먹는 것도 없는데 얼굴이 좋다”면서 때리기도 하였다.

이 사람은 모래밀밥을 입 안에 넣어도 모래는 골라내고 밀만 먹었다.

하루는 모래를 골라 내다가 간수에게 들켜 긴 막대기로 머리를 얻어 맞고 정신이 아찔한 적도 있었다.

이 사람은 감방안에서도 끊임없이 찬송을 불렀다.

「죄짐맡은 우리 구주」라는 찬송을 콧 노래로 부르니 같이 있던 사람들이 노래 곡조가 너무 좋다며 가르쳐 달라고 하기에 가르쳐 주어 같이 부르기도 하였다. 이 찬송을 부르니 하나님께서 폭포수와 같이 은혜를 주셨던 것이다.

또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라는 찬송을 콧노래로 부르며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이 독방에 들어온 죄수는 모두 중벌로 다스려 죽이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의 사정을 들어보니, 이 사람만큼 매를 맞은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다시는 그러지 않겠으니 봐달라고 하면서 놈들에게 항복 했기 때문에 매를 피할수 있었으나 이 사람만은 불의 앞에서 결코 굴하지 않고 항복을 하지 않았던 고로 죽을 때까지 그 모진 매를 맞았던 것이었다.

총살 집행

평안남도 대동군

한 달 반쯤 지난 어느 날 오후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다.

모두들 걸음을 걸을 수 없어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기어서 나오기도 하였다. 그들은 죄수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한 30분쯤 운동을 시킨 다음 트럭에 태웠다. 해가 넘어가는 오후에 어디로 데려가는 것일까?

모두들 불안한 심정으로 차에다 몸을 실었으나 차는 곧 출발하였다. 트럭에서 내려보니 도착한 곳은 평양 서포 뒷동산이었다. 그 곳은 서울의 망우리 공동묘지 같은 평양시 근교의 공동묘지인데, 동산 7부 능선쯤에 큰 구덩이가 파여져 있었다.

놈들은 우리들을 총살시킨 후 거기다 묻으려는 작정이었다. 500여 명을 모두 총살시키는데 한 번에 열 명씩 총살을 시키는 것이었다. 제일 마지막에 총살을 당하는 차례에는 여섯 명이 서게 되었는데 그 속에 이 사람도 끼게 되었다.

500명 집단 총살이 집행되었던 대동군 서천면내 서포, 주변에는 저모산, 봉수산, 소형제산, 대형제산이 표시되어 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오백 명이 죽는 광경을 끝까지 다 볼 수 있었다. 말뚝 앞의 큰 구덩이에는 시체가 가득 쌓여 있었고 총잡이는 불과 30m 전방에서 총구를 겨냥하며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덤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 이 영혼을 맡아 주옵소서하고 마음 속으로 기도를 하였다.

그 때는 예수를 증거하다 죽는것이 순교인 줄 알았을 때였다. 불현듯 부모님과 가족들 얼굴이 활동사진 필름처럼 스쳐 지나가는데, 순간 ‘탕! 탕!’ 하고 두 발의 총탄이 불을 뿜으면서 이 사람은 쓰러져 버렸다.

얼마가 지났는지 정신이 들기에 가만히 생각하니 조금 전에 총살을 당한 것까지 기억이 나, 여기가 천당인가 지옥인가 알 수 없어 살을 꼬집어 보니 아픈 고로 내가 다시 살았구나 하고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위에 시체 두 구가 내리 누르고 있고 그 위에 소나무 가지가 덮혀 있었으며 흙이 1∼5cm정도 덮였는데, 죄수복의 크고 넓은 칼라가 얼굴 일부와 코를 덮은 고로 질식사를 당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 시체더미 속에서 자세히 들어 보니 아직 죽지 않은 자의 신음 소리가 났으나 그 엄청난 500여 구의 시체 때문에 살릴 수가 없었다. 필사적인 힘을 다하여 시체 두 구를 헤치고 일어나서 상처가 있는지 온 몸을 점검하여 보니 다행히 상처는 한 군데도 없고 죄수복 칼라에 총탄이 지나간 흔적으로 구멍 두 개가 나 있을 뿐이었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신 것이 너무도 분명하여 이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였다.

500여 명을 총을 쏘아 죽였으니 총이 벌겋게 달아 총구의 끝이 약간 넓어져 총알이 빗나갈 수 있었으리라 하고 생각도 해 보았으나 불과 30m 전방에서 쏘았는데 명중이 되지 않은 것은 기적이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살려주시려니까 제일 마지막에 총살을 당하게 되었으리라 하고 생각되었다.

반공운동가의 도움

인민군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들

서포 뒷동산 꼭대기로 올라가 보니 저 아래 마을에서 불빛이 번쩍 하며 가슴에 와 닿고 하는 고로 하나님! 저 불빛나는 곳으로 가라는 말씀이십니까 하니 다시 번쩍하고 불빛이 다가와 가슴에 부딪히며 그래 그래하는 암시를 주었다.

그래서 그 불빛나는 곳으로 갔다. 가는 중에도 간간히 인민군이 지나가므로 인민군 기척이 나면 숲속에 몸을 감추었다가 지나가면 또 가고 하여 불빛나는 곳에 도착하였다.

그 불빛은 어떤 외딴 집 부엌에서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것이었으며 그 안을 들여다보니 한 처녀가 설겆이를 하고 있었다.

그 처녀의 이름은 이양숙이었고, 평양 여자 사범학교 출신으로 이 사람보다 한 살이 많았다. 부엌문을 열고 그 처녀에게 솔직하게 말을 하였다.

그 곳은 인민군의 점령하에 있는 지역이니 인민군에 관련된 주민이라면 영락없이 붙들려 죽을 운명인데도, 어린애같이 순진하게 나는 서울에서 온 대학생인데 인민군에게 붙들려 감옥살이를 하다가 500명을 죽이는 서포 뒷동산의 총살 집행장에서 인민군에게 총살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살려 주셔서 살아났습니다. 저를 살려주시면 생명의 은인으로 알고 그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그 처녀는 이 사람을 보고 기겁을 하고 놀랐다. 이 사람의 옷과 얼굴은 다른 시체에서 흘러 내린 피로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다. 또 오랫동안 옥중생활로 모발이 많이 길어 있었던 고로 누구든지 처음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 처녀는 인민군과 관련이 없는 교회목사의 외동 따님으로 기독교 신자였다.

그 처녀에게는 오빠가 셋 있었는데 큰 오빠와 셋째 오빠는 목사인 아버지와 함께 산 속으로 들어가 지하 반공 운동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U.N.군 비행기가 공습을 오면 근처 인민군의 무기고와 군수물자 창고, 군부대 위치 등을 무전으로 알려주는 일도 하였다. 그런데 둘째 오빠는 노동당 중앙위원으로 김일성의 총애를 받는 진짜 빨갱이다.

그런데 그 둘째 오빠가 조금 있으면 집에 온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식은 땀이 흐르며 입 안이 말라왔다. 조금 전까지 빨갱이들에게 붙잡혀 사형집행을 당하고 왔는데 또 빨갱이에게 잡힌다면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그래서 그 처녀가 먹으라고 가져 온 삶은 고구마 두 쪽이 목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이 사람은 “성의는 고맙지만 도저히 먹을 수가 없으니 빨리 숨겨주세요” 하고 애원하였다.

이양숙은 불안해 하는 이 사람을 데리고 마당 끝으로 갔다. 거기에는 댑싸리 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는데 그 중 가장 큰 것을 당기니 그 속에 굴이 있었다. 굴 속에는 요와 이불, 등잔불, 책상 등이 있었고 볼세비키 당사(黨史)등 공산 이념서적들도 많이 있었다. 공산치하에서 이런 날이 올 것을 예상하고 이 집 식구들이 미리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인천 월미도에 상륙하는 국군과 UN군: 1950년 9월 15일

이 사람은 굴 속에 있는 동안 공산 이념 서적들을 모조리 독파한 후 이 공산주의는 얼마 못 갈 것을 직감하였다.

부유한 사람의 재산을 빼앗아 못가진 사람들에게 공짜로 나눠주니 처음에는 공산주의를 좋아할지 모르지만 노력없이 얻은 것을 소중히 간직하지도 못할 뿐더러 밤잠 안 자고 땀흘려 노력해서 모은 재산을 빼앗기니 능력 있고 재주 있는 사람들도 구태여 힘써 일할 필요성을 못 느껴 일을 게을리 하게 되므로 이런 사회는 날이 갈수록 피폐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 이후 이 사람은 기회 있을 때마다 공산주의의 허구성과 모순을 논리적으로 설파 하여 많은 사람들을 민주 진영으로 전향시켰다. 이 사람이 굴 안에서 한 달 가량 생활하는 동안 이양숙이란 처녀는 매일 밤 12시만 되면 도시락 두 개씩을 가져다 주었다.

태극기를 흔들며 국군을 환영하는 시민들: 1950년 9월 27일 경인가도

그녀는 이 사람이 서울 사람이라 고구마를 못 먹는 줄 알고 비밀리에 주민들에게 연락하여 자기들도 잘 못 먹는 비싼 쌀을 거둬 쌀밥을 해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날 그날의 전황을 쪽지에 적어 같이 보내왔다.

그래서 이 사람은 굴 속에 있으면서도 9 · 15 인천 상륙과 9 · 28 서울 수복 그리고 평양 탈환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평양 탈환 소식을 전해 듣고 난 다음날 “조동지! 조동지! 해방됐시요! 나오시라요” 하며 부르기에 나가보니 인민군이 개미때 같이 새까맣게 북쪽으로 도망 가고 있었다.

평양시와 대동군 일대는 주민들이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걸고 국군이 입성하면 환호성을 지르며, 만세를 외치며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동군 치안대장

1950년 9월 28일 서울에 진입한 국군과 인민군간의 시가전

한 달 만에 굴에서 나오니 모발은 더욱 길어졌고 햇빛을 보지 못하여 피부가 하얗게 되어 있어 20세의 젊은 청년이 30대로 보였는 모양이었다. 구레나룻 수염이 무성하게 자란 것도 한 원인이 되었다.

대동군내에 있는 젊은 반공 청년들이 치안대를 조직하여서는 이 사람에게 대장을 하라 하였다. 극구 사양하였으나 빨갱이 때려 잡는데는 조동지가 총살 집행까지 당한 철저한 반공주의자니까 적합하다하여 억지로 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사람은 반공청년 30여 명을 데리고 대동군 치안대를 이끌고 인민군과 좌익에 물든 청년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집어 넣는 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치안대원들은 인민군을 포로로 잡기만 하면 죽이는 고로 “성경에도 살인하지 말라고 했고, 또 우리 민족이 일본에게 36년간 식민지 생활하다가 이제 해방을 맞아 독립국가를 세운지 몇 년이나 되었느냐? 이 얼마 안되는 동안에 동족상잔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먼 훗날 치욕의 역사가 될 것이므로 몇몇 위정자들에 의하여 우리가 꼭두각시 노릇을 할 수는 없으니 우리 국민들만이라도 서로 죽이는 일은 삼가하자. 사상이 잘못되어서 그런 것은 사상만 바로 잡으면 되는 것이 아니냐” 고 치안대 젊은 청년들을 모아 놓고 눈물을 흘리며 웅변을 하였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되찾은 국군이 중앙청에 태극기를 올리고 있다.

이에 2/3정도의 대원은 수긍을 하며 호응하는데 나머지 대원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이 안(案)은 다수결로 통과되었는데 삼분의 일 정도의 대원들은 “이 빨갱이 놈은 악질 중의 악질로서 우리 부모를 죽이고 형제 자매를 무참히 학살하고 죽인 고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하며 잡기만 하면 죽이는 고로 그 때마다 말려서 죽을 사람이 죽음을 모면하고 형무소로 넘겨진 사람이 많이 있었다.

치안대장 당시 한번은 밤 12시쯤 되어 어떤 사람으로부터 신고가 들어 왔는데 “저 산 너머 독립가옥 두 채에 인민군 군관단으로 조직된 특공대 2백 명이 이 곳 대동군 치안대를 해치려는 목적으로 독립 가옥 한 채에 100명씩 나뉘어 현재 식사중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 신고를 접하고 바로 치안대원을 모았으나 밤이 깊어선지 5명 밖에 없었다. 대원들 집에 연락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 5명을 데리고 전화 유선줄 꾸러미를 짊어지고 가면서 임무를 부여했는데,

너는 1소대장, 너는 2소대장하며 3, 4, 5소대장을 각각 임명했고 도착하자마자 공포를 쏘다가 내가 신호탄을 쏘며 사격중지! 하면 사격을 멈추고 3소대장! 한 댓 명만 데리고 와! 하면 다 오는 거다하는 작전계획을 지시하며 갔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하고 보니 기와집 두 채가 나란히 있는데, 밖과 안이 보이지 않도록 좁은 담이 있는 고로, 그 두 집 주위를 뺑 둘러서서 몇 분간에 걸쳐 공포를 일제히 쏘아대니 조용한 밤하늘이 뒤흔들릴 정도였다.

밖은 보이지 않는데다가 깜깜한 한밤중에 사방에서 갑자기 콩볶는 듯찬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므로 한참 식사중이던 인민군 특공대 200명 모두는 정신적으로 제압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 대문 쪽에 있는 이 사람이 노란 신호탄을 쏘며 “사격중지!” 명령을 큰 소리로 하게 되니 갑자기 사격이 중지되고 사방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우리 대한민국 국군 1개 중대는 인민군 군관단으로 구성된 특공대 200명을 완전 포위하였다. 목숨이 아깝거든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수류탄 세례를 받을 것이다” 하고 외치니 이 사람의 굵은 음성이 조용한 밤 하늘에 찌렁찌렁 울려 퍼졌다.

몇 초 있으니 안에서 “시키는 대로 하겠소. 목숨만 살려주시오” 하는 나이 듬직한 사람의 음성이 흘러 나왔다.

“알았소” 해 놓고 “3소대장 거기 한 댓 명만 이쪽으로 보내” 하니 대문 앞에 모인 5명이 전부였다.

뒤에 알고 보니 군에서는 4소대장은 없고 화기소대라고 부르며 5소대 라는 것도 편제상 없었는데, 그 당시 나이도 어리고 군 경험이 없었던 고로 그런 우(愚)를 범하였던 것이다.

“전원 무기를 버리고, 손을 들고 한 명씩 나와!” 하고 명령을 하니 우르르 손을 들고 대문 밖으로 나오는데, 그 순간 주머니에 무기가 있을 땐 곤란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고로 공포를 두 발 쏘며 “도로 들어가!” 해 놓고

“전부 옷을 벗고 팬티만 입고 나와! 만약 나오라는 명령이 없는 데도 나오면 사살하겠다! 명령이 떨어지면 한 사람씩 나와!” 해서 나오는 사람마다 가져갔던 유선줄로 두 손을 머리 뒤로 묶어서 200명 전원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포로 중에는 장성급도 몇 명 있고, 중국 팔로군 출신도 있었는데 대부분 군경력이 많은 자들이었다. 그 중 최고 높은 별 두개짜리 되는 사람은 이 사람이 제지할 새도 없이 치안대원이 총을 쏘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다.

다음은 별 하나짜리 차례가 되는데 이 사람이 총을 든 치안대원 앞을 가로막으며 죽이지 말라고 강력하게 명령하여 나머지 포로들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그들을 학교 교실에다 집결시켜 놓고 “나는 서울서 온 대학생으로서 군생활을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이 지역 치안 책임자다. 우리 여섯 명이 너희들 200명을 잡았는데, 이래 가지고 너희들이 뭘 하겠느냐”고 하니 저희들도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힌다는 눈치였다.

“우리는 다 한 형제요, 한 핏줄을 이어 받은 단군 할아버지 자손으로서, 동족끼리 서로 싸우고 죽이고 하는 짓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는 우리 민족사에 큰 오점을 남기는 일이다.

몇몇 위정자들이 시킨다 하여 동족을 살상한다는 것은 사람의 노릇이 아니다. 우리 민족이 일본놈 밑에서 식민지 생활을 하여 36년간이란 기나긴 세월에 언어도 뺏기고 재산도 뺏기고 모든 것을 유린당해 왔는데 무엇이 모자라서 해방된지 불과 몇 년 되지 않아 동족끼리 피를 흘려야 하느냐 이는 한치 앞도 못 내다 보는 인생의 발상인 것이다.

한 개인의 사리 사욕을 위해서 수 많은 동족이 고통을 당하고 피를 흘리고 수백만 명이 죽어가도 양심에 가책이 되지 않는 그런 폭군에게 더 이상 속아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끼리라도 서로 죽이고 싸우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국민 다수가 원하고 잘 살 수 있는 길을 찾아 나가자”고 즉석 연설을 하였다. 이에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도 긍정을 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그 때 이 사람은 아무리 공산주의에 물이 들은 자라도 양심은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미처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들을 잡아 계속 형무소로 보내고 군내 구석 구석을 뒤지며 철저히 멸공작업을 하는 고로, 주민들의 호응이 매우 좋아서 200명 군관단 특공대가 들었던 집에서도 그 집주인 아들이 다락을 통해 뒷담을 넘어 신고를 해 주어 큰 전공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6.25사변 이전

국민학교 5학년

우물 – 사진은 참고용일 뿐 특정 사실과 무관합니다

이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한번 마음을 먹고 뜻을 세우면 포기하지 않고 끝을 봐야 손을 떼는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이 사람의 집에는 우물이 없어 이 사람 어머니께서는 동네 공동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오곤 하였다.

집안의 온갖 궂은 일과 부엌일을 도맡아 하시는 어머니가 멀리까지 가서 물을 길어오는 것에 마음 아파하던 이 사람은 집 뒤란에서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그 때가 국민학교 5학년 때였다. 아침부터 땅을 파내려가 저녁이 지나고 하늘에 별이 초롱초롱 빛나는 한밤중이 되었다.

이 사람 키로 세 배가 넘는 5∼6m까지 파내려가자 이윽고 물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물이 나오는 것을 보고서야 땅위로 올라왔다.

물론 식사도 하지 않은채. 부모님은 몹시 안스러워 몇 번이고 와서 올라와서 식사하고 쉬었다 하라고 했지만 이 사람은 물이 나을 때까지는 올라가지 않겠다고 스스로 결심한 것을 지켰던 것이다.

물이 나오기 전에는 허리가 아프고 팔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어려운 상황도 많이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여 목적한 바를 성취하였던 것이다.

모품앗이

모내기 : 맨 앞에 보이는 못줄을 기준으로 모판에서 육성한 모(크면 쌀이 열리는 식물)를 하나 하나 논에 심는 일 *사진은 특정 사실과 무관합니다.

집에서 짓는 농사는 모두 소작이었고, 처음에는 그나마 40여 두락 되었으나, 아버지께서 농사일을 잘 돌보아 주시지 않으므로 20여 두락으로 농지가 줄어들게 되었다.

어머니는 될 수 있는 대로 가산이 줄어들지 않게 하시려고 추수가 끝나면 아버지 몰래 벼 가마니를 감추시는 등 살림에 무척 힘을 들이셨다.

어머니께서 농사일을 비롯한 자녀부양과 가사 전반에 걸친 일에 몹시 고생을 하심으로, 어린 나이에도 어머니가 너무나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국민학교 시절부터 농번기에 어머니께서 모 품앗이를 다니시는 것이 안타까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모 품앗이를 다니게 되었다.

모를 심다 보면 같이 일하는 어른들이 “야! 희성이, 모 참 잘 낸다” 하며 점점 모 심는 면적을 넓혀 주곤 했다.

그러나 어른들이 넓혀 주는 면적을 다 심기도 전에 못줄이 넘어가는 고로 허리 한번 제대로 펴 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모를 심어야만 했다.

허리가 끊어져 나가는 것 같고 팔 다리가 아프며, 고사리 같은 손끝이 닳아서 통증이 오고 피가 날 정도가 되어도, 해가 지고 어두워질 때까지 그 고통을 참고 견디었다가 끝내고 집에 오곤 하였다.

이러한 일을 매일 계속 반복하여 모내기 철이 끝날 무렵쯤 되어서는 온 몸이 떨려오는 말라리아병에 걸려 밤새도록 앓고 밤을 지새우다가 이튿날이면 또 아픈 몸을 이끌고 모를 내러 가곤 하였던 것이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일을 하였다. 부모님께서 “아픈데 무슨 일을 하느냐?” 하시며 만류를 하셔도, 내가 고통을 당하는 만큼 부모님이 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농번기의 모내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일을 하였던 것이다.

어른들이 짓궂게도 모심는 면적을 넓혀 주어도 이 한 몸은 희생하겠다는 마음이 있었기에, 군소리하지 않고 일을 하니까 동네 어른들이 칭찬을 하면서도 희성이는 좀 미련하고 고지식하다는 평을 하곤 하였다.

극에 달하는 고생을 참고 견디어

짚신 : 짚을 가늘게 꼬아서 만든 신발 *사진은 특정 사실과 무관합니다.

또, 겨울이면 산에 가서 나무를 하여 집뜰 안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장작을 읍내에 내다가 팔아 가계에 보탬이 되게 하였다.

장작을 힘에 겨울 정도로 짊어지고, 눈이 와서 무릎까지 발이 빠지는 상태에서도 2km가 넘는 눈길을 한 번도 쉬지 않고 읍내에까지 가서 팔고 오곤 하였다.

눈 덮힌 길을 끙끙거리며 고통을 참고 견디며 중간쯤 가면 메투리 짚신을 신은 발이 온통 눈에 젖어 발이 시려 깨어져 나가는 것 같고, 손은 손대로 시려워 손끝을 칼로 베어내는 듯한 고통이 가해오는 것이었다.

무거운 짐을 내려 좀 쉬어야겠는데, 온통 눈으로 덮힌 상태라 쉴 장소도, 쉴 수도 없어 이중 삼중으로 더해지는 고통에 엉엉 울면서도 기어이 읍에까지 가서 장작을 팔아 오곤 했던 것이다.

보통 아이들 같으면 그렇게 혼이 나면 그 다음날에는 안 가든지, 만약 가더라도 좀 가볍게 짊어지고 가겠지만, 그렇게 혼이 나고도 여전히 전날의 양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게 힘에 겹도록 짊어지고 울면서 가는 것이었다.

지게 : 개인 화물 운송 수단, 광주리에 짐을 싣고 가방메듯 어께에 짊어짐 *사진은 특정 사실과 무관함니다.

이와 같이 항상 극에 달하는 심한 고생을 하며 고통을 참고 견디는 훈련을 하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본인도 모르게 하였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하여도 남보다 많이 하여야 했고, 일을 하여도 다른 사람보다는 더 많이 더 열심히 하였으며, 짐을 짊어져도 언제나 힘에 겨울 정도로 짊어지고 끙끙거리며 오금을 제대로 옮기지 못할 정도로 지고 다니는 습성이 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스스로 나를 짓이기는 훈련을 했던 것이다.

비가 온다고 해서 나무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번 목표를 세우면 꾸준하게 하는 성품으로 잠시라도 집에서 드러누워 쉬지 않는 성품이었다.

중학교 시절

어린 시절에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배울 때는 배워도 금방 잊어버려 훈장님에게 매를 맞는 일도 많이 있었으나, 중학교 때부터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공부가 잘 되지 않아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저녁 6시에 잠을 자면서 어머니에게 9시에 꼭 깨워 달라고 하여 하루 3시간씩 자고 저녁 9시부터 시작하여 밤을 세워 공부를 하였던 것이다.

잠이 오면 나가서 찬물에 목욕을 하는 등 기를 쓰고 공부를 하므로 코피도 부지기수로 흘렸다.

길을 가면서도 영어단어를 외웠는데 단어 카드를 만들어 한 손에 쥐고 외운 것을 다른 손으로 옮기면서 노력에 노력을 하였던 것이다.

최종에는 영어사전을 한 장 한 장 뜯으면서 암기를 하여 기어이 사전을 다 외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학교에서 수석을 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 사람은 중학교 시절부터 인생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는 이런 일이 동기가 되었다.

섣달 그믐날 밤늦도록 윷놀이를 하면서 같이 놀던 친구가 이튿날 아침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어 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이 사람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불러 일으켰다.

어쩌다 그 친구의 어머님을 만나게 되면 자기 아들을 떠올리면서 이 사람을 붙잡고 엉엉 우시곤 하였다.

그래서 이사람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파헤치기 위하여 유명한 철학서적을 거의 다 읽어 보았다.

그러나 그 모든 철학 서적들이 수준 이하로 느껴졌다.

그 중에서 낫다는 것이 톨스토이의 저서였으나 그 속에도 모순이 있었다.

인간은 생각할 수 있는 동물이기에 세상 사람들은 흔히 ‘영적 동물’ 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마음먹는 대로 된다’는 평범한 말 가운데 진리가 있다는 것을 어린 시절에 깨달았다.

세상 모든 일들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일에 대해 생각을 하고 ‘하면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노력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생각이나 마음은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 마음, 마음 속에 죽음을 싫어하고 행복을 영위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우리의 조상들이 원래는 영생을 하였고, 행복하게 살았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 사람은 일찍이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틀림없이 사람은 영생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확신이 항상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밤중에 종종 마을 뒷동산 중구봉산 봉우리에 올라가 마을과 넓은 들판을 내려다 보고 “왜 사람은 고생 고생하다가 죽어가는가? 안 죽을 수는 없을까? 산에 풀과 잔디는 시들었다가 봄이 되면 다시 싹이 나고 꽃이 피는데, 죽은 내 친구는 왜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가? 어째서 인간의 생명은 죽으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이별을 해야만 하는가?” 하며 깊이 생각에 잠겨보곤 하였다.

사람이 해서는 안될 일이 없으며, 불가능이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솟구쳤다.

우리 인류들이 무수히 삶과 죽음의 문제를 놓고 많은 도전과 시련을 겪어 왔지만 죽음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로 남아 있었다.

이 사람에게는 기필코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여 전 인류를 사망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버리고 말리라 하는 마음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항상 마음의 움직임이 크고 대국적으로 움직였다.

그래서 친구들이 장래 국회의원이 된다, 장관이 된다, 대통령이 된다는 등의 희망을 말했을 때, 이 사람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시시하게 느껴졌다.

‘내가 만약 권력을 누린다면 전 세계를, 온 천하를 손아귀에 쥐고 휘두르리라’는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매사에 적극적이었고 희망적이었다.

평발의 마라톤 선수

평발 : 발바닥의 안쪽 아치가 없는 발, 쉽게 피로해지는 발구조로 군대면제 사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진은 참고용이며 특정 사실과 무관합니다.

이 사람은 학생시절에는 마라톤 선수였다. 운동을 하려면 어느 정도 신체적 조건이 갖추어져야 된다. 특히 마라톤선수는 발이 평발이면 선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체육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희성이, 너는 마당발이므로 마라톤을 할 수 없으니 하지 말아라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무엇이든지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기어이 마라톤을 하고야 말았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같이 3∼4년을 꾸준히 연습하여 나중에는 김포군내에서 1,2등을 다투기에 이르렀다.

경기도 시군대항 마라톤 시합에 참가하여 1등으로 들어와 테이프를 끊고 기절하여 병원에 실려간 적도 있었다.

깨어나니 체육선생님이 와서 “그것 봐, 내가 하지 말라고 하여도 하더니‥‥ 잘못하면 죽어” 하고 걱정을 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대견스러운 표정을 보이셨다.

당시에는 지금같이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이 없어서, 자갈투성이의 비포장 도로의 인도쪽, 자갈이 별로 없는 부분을 이용하여 맨발로 연습을 하였던 것이다.

당시에 운동화가 나오기도 했지만 너무 비싸고 또한 형편이 여의치 못하여 아예 생각도 못하였던 것이다.

당시 전국 마라톤 대회에서 3위 안에 들지 못한 조희성 선수를 제치고 보스톤 마라톤 대회 출전권을 획득한 서윤복 선수. 보스톤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하여 월계관을 쓰고 시상대에 서있습니다.

한 시간 정도만 뛰어도 정신이 몽롱한 상태인데 거기서 포기를 하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계속 뛰게 되면, 팔 다리의 감각이 무뎌지면서 숨이 차는 경지를 지나 무감각 상태에서 뛰게 된다.

백리 길을 두 시간이 넘도록 뛰게 되면 온 몸에 땀이 비오듯 하는데, 그 고통의 경지는 당해본 자가 아니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꾸준히 아침과 저녁 늦게, 또는 밤중에 연습을 하였는데 포기 하고 싶은 상태에서 포기 하지 않고 자신과 더불어 싸워 이기는 훈련을 하고 또 하였다.

하기 싫다고 쉬고 기분 내 키면 하고 하는 생활을 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전국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여, 1947년 미국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서윤복선수와도 같이 뛰어 본 적이 있었다.

국민학교 때에는 기운이 없어 다른 아이들에게 매를 맞고 자랐으나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이겨보려고, 궁리 끝에 기운을 내게 하려면 영양 보충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돈이 없어 고기는 사서 먹을 수 없고 하여, 밭에서 나는 콩을 가느다란 철사로 만든 망에다 넣고 불에 볶아 호주머니에 가득 넣고 길을 가며, 일을 하며 수시로 먹었더니 기운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중학교 2천명 학생중에 기운으로는 당할 자가 없을 정도로 힘이 세어 씨름판에서 항상 1등을 하곤 하였다.

그 당시에 쌀 두 가마니를 짊어지고 다니므로 김포 동네에서 ‘장사’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이가 60인데도 시멘트 여섯 포대(쌀 세 가마니 240kg)를 짊어지고 다닐 수 있다.

한창 젊은 나이 때보다 더욱 더 힘이 세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고학생(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마련하는 학생)

이 사람은 어린시절부터 외할아버지께서 “사람이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절대로 신세를 지지 말아야 한다. 어느 집에 가더라도 그냥 나오지말고 엽전 한 닢이라도 놓고 나와야 한다”고 하시던 말씀을 듣고 자랐다.

이 사람은 어린시절에도 한번 마음을 먹고 뜻을 세우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해 내고야 마는 성미였다.

또한 내 한 몸이 희생해서 될 일이라면 아무리 어렵고 험한 일이라도 가리거나 사양하지 않았으며, 자진해서 일을 찾아서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을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모든 일에서 항상 남보다 뒤지기를 싫어했다.

이 사람이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다니게 되었을 때, 요즘 같이 교통이 편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김포에서 서울시내에 있는 학교에 다닐 수가 없어 집을 떠나 서울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그 당시 성동경찰서 사찰계장으로 계시는 신당동 외삼촌댁에서 형님과 같이 신세를 지며 학교에 다녔다.

고향에서 추수를 하게 되면 쌀을 두 가마니씩 외삼촌댁에 갖다 주는데도 불구하고 외숙모님은 형님과 내가 식사하는 것을 꺼려하고 눈치를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외삼촌댁에서 나와 학교에서 자취를 하며 공부를 하였다.

형님은 몇 번이고 외삼촌집으로 다시 들어가자고 울며 권유하였으나, 나는 신세지는 것이 싫어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형님은 외삼촌댁에 계시고, 나는 고생스러워도 계속 학교 교실에서 생활하였다.

수업시간에는 열심히 공부하였고 방과 후에는 성냥과 비누 등의 물건을 들고 집집마다 팔러 다녔다.

처음에는 보따리를 들고 다니며 집집마다 물건을 파는 것이 부끄럽고 창피하였으나 “너 같은 놈은 이렇게 보따리를 들고 다니며 집집마다 물건을 파는 것이 마땅해! 이 보다 더한 일을 해야 하는데 이것도 네게는 수월한 것이야” 하는 생각을 하니 별 무리없이 다닐 수 있었다.

시일이 갈수록 장사하는 요령도 생기고 거래처도 많이 확보되었다.

한번은 물건을 들고 가는데, 어떤 아저씨가 “이발소에는 비누를 많이 사용하니까 이발소에 가 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발소에 찾아 갔더니 이 사람이 고학하는 학생이라고 하여 비누를 팔아 주었는데 이용사 협회의 간부로 있는 사람의 주선으로 서울 시내 이발소에 비누를 댈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서울 시내에 있는 이발소는 거의 다 이 사람이 비누를 대어 주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적지 않은 돈을 벌게 되어 고향에서 돈이 없어 공부를 하지 못하는 친구 세 사람을 데려다 학비를 대주며 같이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또 3만 원이라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돈을 삼보주식회사라는 회사에 투자하여 주주가 되기도 하였다.

이 회사는 대만에서 설탕을 수입하여 국내에 유통 시키는 무역회사였는데, 6.25사변 때 없어졌다.

장사를 하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생기는 것이었다.

서울 시내에서 일정한 구역 내에는 안 들어가 본 집이 없는데, 어떤 때는 담임선생님 댁인 줄도 모르고 들어간 적도 있었다.

그때 여선생님이 맨발로 뛰어 나오시며 “네가 이렇게 고생을 하는 줄 몰랐다. 내가 학비를 대 줄테니 제발 이런 장사는 하지 말아라” 하시며 손에 돈을 쥐어 주셨지만 기어이 뿌리치고 나오기도 하였다.

또 어떤 때는 부부싸움으로 기분이 상해 있는 집에 물건을 팔러 들어갔다가 어린 학생에게 화풀이를 해 대는데 꼼짝없이 당해야 했다.

화를 내기만 하면 괜찮은데 그 물건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 물건을 팔 수 없게 만드니, 그것을 하나씩 줍는 이 사람의 마음은 설움이 올라와 기가 막히는 것이었다.

추운 겨울에는 남들이 따뜻한 방안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이 사람은 찹쌀떡을 들고 골목마다 외치고 다니며 팔았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쉬지 않고 다녔다.

하지만 누가 시켜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서 했으며 자신을 짓이기기 위한 방편으로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얼마 후에는 흑석동에다 방을 얻어 놓고 외삼촌댁에 있던 형님을 불러와 같이 공부하였고, 고향 김포에서 여동생이 올라와 밥을 지어주었다.

학교에서는 항상 우등생이었고, 항상 희생과 봉사의 마음이 차고 넘치는 고로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이 사람은 공부를 해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교과서를 모두 외워 버렸다.

수업시간에 집중하여 듣고 집에 와서 공책에 필기하면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기침하는 것까지 정확하게 적을 수가 있을 정도였다.

잡념이 전혀 없고 피가 깨끗한 사람은 모든 것이 피속에 녹음이 되는 고로, 그 자체가 녹음기 테이프라서 다시 재생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19세 청년 시절

이 사람은 열아흡 살 때부터 마음으로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기를 쓰는 생활을 시작하였다.

여자 치맛자락만 봐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오는 고로 치맛자락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땅만 쳐다보고 다니다 어떤 때는 전봇대를 들이받아 정신이 가물가물한 적도 있었다.

기성 교회 부흥회에 참석하였을 때 감리교 부흥강사인 박재봉 목사가 하는 말이 마음으로나 눈길로나 음란죄를 짓지 않으려면 여자를 뱀같이 보라고 하여, 그 때부터 여자를 뱀같이 보았다.

그리하여 전차에서도 옆 좌석에 여자가 앉으면 질겁을 하고 일어나 다른 곳으로 피하곤 하였다.

그러면 어떤 짓궂은 여자는 이 사람을 따라와서 “나 때문에 학생이 일어났는가 본데 가서 앉으라”고 하면 이 사람은 “나는 서서 가는게 더 좋아요!” 하는 식으로 대답하거나 아예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정욕이 올라오면 ‘이 개 같은 마귀새끼’ 하고 자신에게 욕을 하면 정욕이 사라졌다.

또 정욕이 올라오면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땀이 날 정도로 달리기를 하거나, 심한 노동을 가하며 자신을 짓이기는 생활을 하니 정욕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대학생

당시에는 대학교에 다니면서 흑석동에 있는 감리교회에 나갔었다.

교회에서의 직책은 중.고등반 학생들과 청년들을 지도하는 책임교사였으며, 흑석동 일대에 집집마다 전도를 하며 철저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토요일이면 학생과 청년들을 데리고 전도를 하러 다니기도 했다.

남산

어느날 학생 60여 명과 같이 남산에 올라가 노방 전도를 하고 내려 오는데, 남산 교회입구 계단에서 당시 박태선 집사님께서 북을 치며 전도를 하고 계셨다.

그래서 우리 학생 전도팀과 합세하여 전도를 하였다.

그때 박태선 집사님께서 북을 치며 전도를 하셨는데, 북을 벗어 이 사람에게 주며 “쳐보라” 하여 이 사람이 북을 치며 전도를 하였다.

이 사람이 북을 치는 것을 보고 남산교회의 어떤 교인이 말하기를 박태선 집사님은 북을 딴 사람에게 절대 쳐 보게 한 사실이 없는데, 이상하게 청년에게만 북을 치게 하니 특별한 일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 이미 영모님 (박태선 집사님)께서는 이 사람을 알아보셨으나 이 사람은 전혀 영모님이라는 존재와 나의 앞길에 대하여도 몰랐다.

그러나, 박태선 집사님을 만난 후부터 입안에 꿀물과 같이 단물이 흐르며 뱃속까지 시원한 생수가 연결되기 시작하였다.

유년시절

김포읍에서 북쪽으로 포장된 국도를 따라 조금 가다 보면 서쪽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다시 좁은 농로를 따라 들판을 지나면 감정리에 들어선다.

거기 중구 봉산 나즈막한 야산 기슭을 타고 200여 세대가 웅기종기 모여 있는 구둣물 부락이 있다.

이 마을 입구쯤에 있는 조중봉(趙重峯)선생 사당을 지나면 좌측으로 l00m쯤 되는 곳에 40∼50년생 감나무 한 그루가 서있고 ‘다’ 자형 구조의 고옥이 한 채 있다.

바로 이 곳, 경기도 김포군 김포읍 감정리 구둣물 마을의 한 초가집이 온 인류에게 영생(永生)을 주러 온 조희성(曺熙星) 님의 생가인 것이다.

조희성님의 함자와 사주

이 사람은 1931년 8월 12일(음력 신미년 6월 28일 새벽 4시경), 농부이신 부친 조경남(曺慶男)과 모친 오지덕(吳只德) 사이에 9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증조부께서도 형제 두 분중 둘째였고, 조부와 부친께서도 둘째였고 이 사람대에 와서도 남자 5형제 중 두번째였으니, 4대를 계속해서 차자(次子)로 이어져 온 것이다.

*주:여기서 부터는 조희성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을 엮은 것임.

이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사람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외할아버지께 들어서 알고 있었다.

외가집이 부평 ‘덴말’이라는 동네에 있었는데, 어릴 적에 외갓집에 가면 외할아버지께서는 항상 어린 것을 업으시거나 손을 잡으시고 장능산 지름길을 다니시기 좋아하셨으며, 재미 있는 옛날 이야기와 필요한 세상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다.

그중에서도 “사람이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절대로 신세를 지지 말아야 한다. 어느 집에 가더라도 그냥 나오지 말고 엽전 한 닢이라도 놓고 나와야 한다.” 고 하시던 말씀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외할머니께서 “이 영감쟁이 매일 책만 들여다 보고 있으면 먹을 것이 나오느냐?”고 성화를 부리셔도 외할아버지께서는 대꾸하지 않고 여전히 책만 보며 잠자코 계시면서 언행을 흐트리지 않으셨다.

이것을 보면 참으로 우리 조상들은 성인(聖人)에 가까운 분들이셨다는 것을 알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이다는 인내천 사상을 주장하는 민족종교 천도교의 창시자 수운 최재우 선생의 동상

외할아버지께서는 책을 마차에 싣고 다니실 정도로 많은 서적을 보유하고 계셨으며 학문의 경지 또한 깊으셨는데, 이런 외할아버지께서 천도교인(天道敎人)이셨다는 것은 후에 가서야 알았다.

많은 이웃 주민에게서 칭송을 받으며 지내시던 외할아버지는 모처럼 다니러온 외손자를 애지중지하시고 같이 다니며 업어 주셨는데,

해질 무렵 집에 돌아오면 잡수시도록 마련된 석청(石淸: 옛날에는 아주 귀한 보약)을 아껴 두었다가 선반에서 꺼내어 어린 것에게 먹여 주시곤 하셨다.

그러시면서 “우리 희성(熙星)이가 장차 큰 일을 할 골상을 지녔어. 손에는 다이아몬드와 임금 왕자의 손금이 있고, 가슴에는 북두칠성에 해당하는 점이 있으니 큰 인물이 될 것이 틀림 없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시면서 “이 손금을 누구에게도 보여서는 안된다.”고 당부를 하시며 너무도 이 사람을 사랑해 주시고 귀여워해 주셨던 것이다.

모친께서 이 사람을 잉태하셨을 때 꾸셨던 태몽이 있는데, 다음은 모친에게서 들은 얘기이다.

조희성님이 태어나신 김포 감정리, 뒤로는 산이 병풍이 감싸는 듯 둘러 있고 앞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있는 지세

부평읍에서 서쪽으로 5리쯤 가면 계양산이 있는데, 이 산은 예로부터 명산으로서 많은 전설을 지니고 있는 산이다.

하루는 꿈에 계양산 정상에 올라 갔는데, 산봉우리가 셋이 있고 가운데 큰 봉우리의 정상에 우물이 하나 있었다.

거기 있는 맑은 물이 근원이 되어 옥수(玉水)같이 깨끗한 물이 끊임없이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마음 이 흡족하고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것에는 편편하고 넙적하게 생긴 바위가 하나 있고 그 위에는 깨끗한 물동이와 바가지가 놓여 있어서, 이 맑고 깨끗한 수정 같은 물을 바가지로 떠서 물동이에 가득 채워 놓으니, 어디선지 하얀 비둘기가 날아와 물동이 위에 앉아, 모친은 그대로 물동이를 이고 감정리 집으로 내려 왔다.

며칠 후에 다시 그 산을 올라가니 낮선 청년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저 쪽을 보라고 손가락질을 하였다.

그래서 가리키는 쪽을 쳐다보니 새하얀 옷으로 예쁘고 아름답게 치장한 처녀들이 30여명 줄을 지어 걸어 오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아름답고, 한편으로는 기이하기도 하여 그 청년에게 “저 처녀들은 무엇하는 사람들입니까?” 하고 물으니,

“당신을 하늘나라로 안내하기 위하여 환영나온 선녀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듣고 참으로 기분이 좋고 마음이 흡족함을 느끼며 산을 내려 왔다.

또 하루는 어느 동산에 올라 갔는데 큰 옥수수대가 둘 있고 잘 영글은 옥수수가 한 대에 한 개씩 열려 있었다.

옥수수를 모두 따 자루에 담으니 자루 두 개가 가득하여 그것을 또한 집으로 가지고 왔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꿈에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나타나 하시는 말씀이 장차 “이 아이가 태어나서 성공할 때까지 누구에게도 절대로 꿈에서 본 광경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래서 모친께서는 이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계시다가 이 사람이 밀실에서 연단을 받고 완성자가 되어 영생(永生)의 역사를 시작한 1981년도에 와서야 비로소 이 사람에게 말씀해 주셨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에게도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다.

구둣물마을 이야기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 한반도 중에서도 3면이 바다와 강으로 둘러싸인 김포

경기도의 북서쪽으로 가면 한강 하류와 임진강 하류가 만나는 한강(漢江) 하구언이 있다. 김포읍에서 서쪽으로 1차선 좁은 도로를 따라 2 Km쯤 가면 감정리(次井里)라는 큰 마을이 나오는데 이 마을은 내옹, 외옹, 구둣물, 나진교, 독작골이라고 불리우는 5개 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부락 중 구둣물이라고 불리우는 동네는 아흡 구(九)자에다 머리 두(頭)자를 써서 구둣물인데, 이는 감정리 내 에 장릉이라는 왕릉(王陵) (조선조 인조(1623∼1649) 부친의 묘)이 있어, 이 능(陵)을 중심으로 사방 팔방으로 돌아가면서 우물 아흡 개를 팠는데 그 아흡 우물 중 가장 처음 팠다 하여 ‘구두(九頭)물’이라고 하였다.

중봉 조헌 선생의 영정

지금도 그 우물터가 있으며, 이 마을을 ‘구둣물 동네’ 또는 ‘구둔말’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 마을 한 가운데에는 약 100여 평 되는 사당이 있는데, 이 사당은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 10호로서, 약 500년 전인 선조 때의 사람, 조중봉(호: 조헌) 선생이라는 분의 사당이다.

그는 시의 학자요, 예언가요, 장수로서 축지법을 써서 지맥을 이용하여 땅을 주름잡아 먼 길을 빨리갈 수 있는 능력을 행하던 분이요, 수많은 마을 사람들에게 인격과 덕망을 끼쳐 추앙을 받던 이 지방의 유지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왜놈들이 조선 땅을 점령하기 위하여 정탐군을 보냈는데, 그 중 한 정탐군이 이 마을까지 오게 되었다.

조중봉선생은 이때 초가 지붕을 이을려고 이엉을 엮고 있었다. 이때 정탐꾼이 와서 신분을 속이고 “이 마을에 조중봉 선생 댁이 어디 입니까?” 하고 물으니 선생은 그가 왜놈의 정탐군인 줄 미리 아시고 “저기 저 산 너머에 있다. “고 말하였다. 정탐군은 고맙다고 인사하고 나서 산고개를 향하여 아무리 열심히 걷고 걸어도 그 자리가 그 자리였다.

정탐군은 순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 있어 “선생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목숨만 살려주시고 무사히 돌아가게만 해 주세요.” 하고 백배사죄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조헌 선생이 도술을 행한다는 소문을 듣고 사실을 확인하러 왔는데 땅을 주름잡는 조헌 선생의 도술을 직접 대하게 되자 질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헌 선생은 이 정탐군을 죽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다가오는 국난을 어떻게 해서든지 막고 싶은 일념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소리쳤다. “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이 곳까지 와서 정탐을 하려느냐? 당장 그만 두고 너희 나라로 떠나가라. ” “그리고 본국에 돌아가거든 풍신수길에게 이렇게 전하라.

조선 땅에 이 조헌이가 살아 있는 한 감히 조선 땅을 침범할 수 없다.” “내가 왜놈들을 요절을 낼 것이라고, 알겠느냐 ! ” 하니 “예, 꼭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나으리.” 하며 정탐군은 식은 땀을 닦으면서 도망치듯 그 곳을 물러갔다.

선생께서는 임진왜란이 있기 십여 년 전부터 미리 앞 일을 내다보시고 당시 조정에다 왜놈들이 우리 조선을 침략하게 될 것이니 하루 바삐 양병(養兵)을 하여 적의 공격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쓸데없는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백성들을 혼란케 한다는 죄목을 씌워 함경도 길주로 귀양을 보냈다.

선생은 귀양에서 돌아와 다시 상소를 올리니 이번에는 충청도 옥천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왜놈이 쳐들어와 난리가 터질 날이 가까와지니 조중봉 선생은 사비(私費)로 청년들을 모아 무술을 가르치며 의병을 양성하여 왜란에 대비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조헌과 700여 의병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금산전투의 가상화

임진왜란 당시 조헌과 700여 의병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금산전투의 가상화

이윽고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생은 의병을 거느리고 몰려오는 왜군과 더불어 치열한 전투를 하여 청주성을 탈환하는 등 많은 전공 (戰功)을 세우며 여러 고을을 왜놈들의 손아귀에서 건져내셨다.

그러나 밀려오는 왜군을 막아내기엔 의병의 수가 너무 적으므로 금산까지 후퇴를 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셨다. 활을 너무 많이 쏘아 손톱이 다 빠져 버리니 발로 쏘아 열 발톱이 다 빠지도록 싸우다가 임진년 8월 18일에 49세의 젊은 나이로 금산에서 700여 의사(義士)와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지금도 그 사당에 가보면 조중봉선생의 영정과 함께 비문이 있다. 이 서원은 조선 선조때 학자이며, 의병장 중봉 조헌(1544∼1592) 선생의 학문과 충성심을 추모하기 위하여 인조 26년 (1648)에 창건되었으며, 숙종 원년 (1675)에 사액되었다. 이 동네에 살고 있는 이한철(61세) 씨의 말에 의하면 조헌 선생이 태어나신 생가 장소에 사당이 지어졌다고 하며,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돌아가신 음력 8월 18일을 기하여 매년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우리 마을에 이런 위대한 인물이 났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 라고 그는 말한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은 동학의 대가라 불리우는 이민제 선생이 기록한 예언서에, 한강 하구언에서 진인(眞人), 정도령(正道令)인 나온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김포가 바로 한강이 바다와 마주쳐서 합류하는 한강 하구언인 것이다.

또한 조중봉 선생의 말씀에 의하면, “이 구둣물 마을에서 앞으로 세계를 구원할 큰 인물이 날 것인데 그 사람이 나타나면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하셨다고 어르신들께서 늘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예언의 말씀 그대로, 김포군 김포면 감정리, 바로 구둣물 마을에서 사람 몸이 죽지 않는 전무후무한 비결을 가르쳐주시며, 인간이 행복하고 보람되게 살 수 있는 바른 길을 제시해 주시는 정도령 조희성님이 태어나셨다는 것은 수천 년 전부터 숨기고 숨겨서 완성해 낸 하늘의 예정임에 틀림없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