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테타 리더를 쫒아내고 고르바쵸프를 석방

“… 이 사람이 거대한 몸을 하고 무서운 얼굴을 하고 그 방 안에 갑자기 나타났던 것이다. 그래서 무시무시한 소리를 치니까 그 놈들이 혼비백산해서 뛰쳐 나갔던 것이다.”

고르바쵸프를 연금한 쿠테타의 주역들. 왼쪽에서부터 보리스 푸고 내무장관, 겐나디 야나예프 부통령, 올레그 바클라노프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1년 8월 23일 쿠테타 주도세력에 의해 감금 상태에 있던 고르바쵸프가 총살 당할 위급한 순간에 이긴자 구세주가 홀연히 나타나서 고르바쵸프를 구하였습니다.

그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셨는데; “쿠테타 일으킨 놈들이 고르바쵸프 머리에 총을 겨누고 막 쏘려고 할 때 이 사람이 거대한 몸을 하고 무서운 얼굴을 하고 그 방 안에 갑자기 나타났던 것이다. 그래서 무시무시한 소리를 치니까 그 놈들이 혼비백산해서 뛰쳐 나갔던 것이다.”

쿠테타군을 끌어내리고 있는 시민

당사자인 고르바쵸프는 그 순간의 이 한국말을 기억할 것으로 믿으며 그 뜻과 주인공을 알면 기뻐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7절 “이사람이 한국말로 했을까 러시아말로 했을까?”
이 질문에 어떤 성도들은 ‘러시아말로 했습니다’ 라고 대답할 때 다른 성도들은 ‘한국말로 했습니다’ 고 대답했는데. 이 글을 쓰고 있는 본인은 한국말로 하신 것 같아서 본인이 직접 녹음을 하여 올렸습니다. 공산주의 제국의 핵심부에서 이처럼 믿어지지 않는 평화적 자발적 개혁의 결과로 냉전시대가 종식될 때 그 전 과정에 과연 어떤 존재가 힘써서 된것인지 그 실상을 알게 될 것입니다.
 

조희성님 법정 최후진술 일부

“승리제단이 한창 부흥하던 때에 미국의 한 교민신문에 여의도 순XX교회의 조XX 목사가 프랑스 창녀와 애정행각을 벌이고 매독에 걸렸는데 부인에게도 매독을 전염시켜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는 기사를 게재했습니다.

그 신문을 우리 제단 청년들이 복사를 해서 여의도 순XX교회 앞에서 나눠 주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서 우리 승리제단에 앙심을 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조XX 목사의 부인과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부인 손여사와는 이화여자대학교 동기 동창으로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김영삼 대통령도 기독교 장로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마귀시 하는 승리제단을 아예 없애 버리려고 이 사람을 먼저 없애버리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구세주를 억울하게 하면 나라가 망합니다. 한국만 망하는게 아니라 전 세계가 망합니다.

구세주가 억울하게 사형 당하면 나라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폭발합니다.”

감람나무 우리엄마

1. 감람나무 우리엄마 발자욱마다 피땀냄새
천번만번 곤두박질 갖은포학 당하셨네

공중권세 잡은마귀 소탕하여 박멸하고
육천년간 고대하던 시온성을 찾으셨네

2. 이길만은 우리인생 엄마없인 못오는길
감람나무 우리엄마 우리위해 통곡했네

애걸복걸 피투성이 밤새도록 마귀죽여
죽을인생 구원하신 고마우신 우리엄마

3. 사망권세 잡은마귀 피속에서 육천년간
인생들은 더러워져 잔악하게 물들었고

슬픈탄식 괴롬속에 참혹하게 죽어갔네
완성엄마 따라오면 영생복락 누리리라

4. 좁고험한 가시밭길 외로워도 주님함께
자신속의 옛사람을 짓이겨서 죽이는길

천번만번 죽고죽여 최후까지 견디는길
구세주의 우리엄마 따라가면 영생하리

5. 엄마께서 그얼마나 외쳤던가 우셨던가
노염타는 어린심령 빗대시고 나무라시네

때리시고 얼리시는 위대하신 장한엄마
대신울고 죄를담당 우리들을 영생주네

6. 천대멸시 받으면서 참고이기신 우리엄마
감람나무 명령따라 황무지에 18년간

굻주림에 몸부림쳐 해산수고하신엄마
피눈물로 물들여서 에덴동산 회복했네

7. 최후까지 참을수없는 순간에도 견뎌야해
마귀공격 빗발쳐도 쉬지않는 기도공격

의식잃어 죽어가도 낙심않고 맡기면은
엄마께서 담당하여 우리들을 살려주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 해요.

험한 이 길 가도 가도 끝은 없고 곤해요.
우리 주님 팔내미사 내 손 잡아 주옵소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 일도 몰라요.
어머니여 날 붙드사 평탄한 길 주옵소서.

좁은 이 길 진리의 길 주님오신 그 옛 길.
힘이 들고 어려워도 맡기면서 옵니다.

주님이여 그 음성을 항상 들려 주옵소서.
내 마음은 정했어요 변치말게 하옵소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 일도 몰라요.
어머니여 날 붙드사 주신 소명 이루소서.

1980년 이긴자가 배출될 당시와 승리제단을 세울까지의 행적

네가 이제는 이긴자가 되었다!

인간이 하나님이 되는 과정은 말로서는 완전히 표현할 수 없으며,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인간의 말은 표현에 제한이 있고 사망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 범주의 것이기 때문에 영생의 차원에 해당되는 용어가 없는 것이다.

이 사람이 좋아하는음란죄에 걸려 떨어져 목을 매고 죽으려고 하다가 다시 출발을 하여 죽음보다 더 힘든 연단을 받고 6개월이 지난 다음, 1980년 10월 15일에야 해와 주님께서 “네가 이제는 이긴자가 되었다”고 하셨다.

그러나 이 사람은 “제가 이긴자가 된 것이 아니요, 하나님 당신이 나를 이기시어 하나님께서 이긴자가 되셨지요,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을 가지니, “또 이긴자가 되었다” 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또 “하나님께서 또 나를 이기시고 이긴자가 되어 주시니 감사합니다”고 하였다.

해와 주님께서 “조사장이 이제 잘 이기는데” 하시므로 “제가 잘 이기나요, 하나님 당신께서 조희성이를 점령하시고 계속 이겨 나가시지요.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 후 하나님께서 완전히 조희성이를 죽이는데 성공하시고 점령하게 되니 이 날이 1980년 10월 15일인 것이다.

 

이긴자 구세주는 아버지 없이 태어난 감람나무 엄마의 영적 아들

해와주님이 이긴자가 됐다고 하신 후 그 날 저녁에 숙소에서 하나님께서 조희성 마귀를 죽이시고 완전히 점령하시기까지의 내용을 간결하게 노랫말로 지어 30분 동안에 수정도 하지 않고 써서 밀실에 있던 식구들과 같이 찬송을 하게 되니 해와 주님을 비롯한 식구 전체가 울어 밀실이 울음바다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가사 내용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아담과 해와를 잃으시고 탄식하시는 기막히도록 곤고한 사정이 억만 분지 일도 표현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말로는 도저히 표현이 안 되는 것이다.

1. 감람나무 우리엄마 발자욱마다 피땀냄새
천번만번 곤두박질 갖은포학 당하셨네

공중권세 잡은마귀 소탕하여 박멸하고
육천년간 고대하던 시온성을 찾으셨네

2. 이길만은 우리인생 엄마없인 못오는길
감람나무 우리엄마 우리위해 통곡했네

애걸복걸 피투성이 밤새도록 마귀죽여
죽을인생 구원하신 고마우신 우리엄마

3. 사망권세 잡은마귀 피속에서 육천년간
인생들은 더러워져 잔악하게 물들었고

슬픈탄식 괴롬속에 참혹하게 죽어갔네
완성엄마 따라오면 영생복락 누리리라

4. 좁고험한 가시밭길 외로워도 주님함께
자신속의 옛사람을 짓이겨서 죽이는길

천번만번 죽고죽여 최후까지 견디는길
구세주의 우리엄마 따라가면 영생하리

5. 엄마께서 그얼마나 외쳤던가 우셨던가
노염타는 어린심령 빗대시고 나무라시네

때리시고 얼리시는 위대하신 장한엄마
대신울고 죄를담당 우리들을 영생주네

6. 천대멸시 받으면서 참고이기신 우리엄마
감람나무 명령따라 황무지에 18년간

굻주림에 몸부림쳐 해산수고하신엄마
피눈물로 물들여서 에덴동산 회복했네

7. 최후까지 참을수없는 순간에도 견뎌야해
마귀공격 빗발쳐도 쉬지않는 기도공격

의식잃어 죽어가도 낙심않고 맡기면은
엄마께서 담당하여 우리들을 살려주네

 

「감람나무 우리엄마」라는 이 노래는 해와 주님께서 밀실에서 18년 동안 연단을 받으시며 전도를 하여 수많은 전도사들, 장로들, 목사들, 집사들을 불러다가 죄를 담당하며 키워 봤으나, 모두 힘들어서 도망가고, 교만으로 떨어지고 하여 18년 만에 드디어 아담이긴자를 완성하신 것을 말씀하는 내용인 것이다.

 

이제 네가 창조주 하나님이 되었다

이 사람은 해와 주님께서 “이제는 네가 완성자가 되었다” 하시므로

“예, 하나님께서 조희성이를 죽이시고 완성자가 되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을 가지니까 해와 이긴자께서 “네가 이제는 하나님이 됐다” 하시었다.

거기서 또 “예, 하나님께서 조희성 마귀를 죽이고 하나님이 되시니 감사합니다” 하니, 마음의 싸움에서 나를 완전히 이겨나갔던 것이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세요, 온전히 좌정하시고 주장해 주세요 하고 기도하면서 나가니 해와 주님께서

“이제 네가 창조주 하나님이 되었다” 하시는 것이었다.

여기서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 되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니 “이제는 네가 하는 어떤 것도 죄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죄를 지을 수가 없겠지요” 하면서 그 마음을 차고 올라가니 영이 계속 상승하였던 것이다.

 

1년간 죄 담당 연습 후 1981년 8월 18일 구원의 역사를 시작

이긴자구세주의 증표 이슬성신, 피와 불과 연기기둥과 같다

1980년도 하반기에 하나님께 완전히 점령 당한 후 1년 동안 밀실 안에 있는 식구들의 죄를 담당하는 연습을 하며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맛을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사람씩 죄를 담당하다가 두 사람씩, 세 사람씩 단계별로 연단을 쌓아서 1년이 지난 1981년 8월에 비로소 이 세상에 나와 전도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얼마후 역곡에서 40명의 성도로서 승리제단을 세웠다.

이때에 영모님께서는 전도관에서 5중앙에 중생원을 차리고 처녀 대학생을 40명 모집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하여 서울 청량리에 있는 5중앙에 중생원을 만들었으나 중생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처녀 대학생이면 신앙면에서도 거리가 먼 상태여서 가능성도 없었던 것이다.

그 말씀은 역곡에서 진짜 영생이, 중생이 이루어지는 제단이 선다는 뜻이요, 5중앙이란 것은 이 사람을 키을 때 5숫자로 붙인 별호를 말한 것이었던 것이다.

 

성경에도 기름준비한 다섯 처녀가 신랑을 맞이 한다는 글이 있는 것이다. 남자나 여자나 모두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는 죄인인 고로 죄인은 다 사망 선고를 받아 죽어 가게 되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죄인이 하나님의 신을 모실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을 처녀라 한 것이다.

사십 명이란 사람의 머릿숫자를 가리킨 것이 아니다. 4는 땅의 완전수이므로 땅에서의 의인, 즉 죄에서 완전히 떠난 자를 말하고 십(拾)자 는 손수(手)변에 합할 합(合)자이므로 하나님께서 손수 합하는 수고를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한 것이다.

그런고로 사십이란 수고를 하여 합하는 역사를 하는 자 즉 하나님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영모님은 영의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영적인 고차원의 말씀, 즉 구원과 피의 원리에 대한 진리의 말씀을 던질 때, 이것을 깨닫고 알아 듣는 자가 영의 대학생인 것이다. 육적인 대학생은 신앙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이렇게 영모님께서 말씀으로 짝을 맞추어 주셔도 영의 대학생이 못 되어서 그런지 현재 전도관 식구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완전히 이긴자가 되고 나서도 역곡에서 전도를 하고 저녁이 되면 일정한 시간에 들어가서 해와 주님께 전도사항을 보고하고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중노동을 하다가 12시에 숙소에 와서 목욕과 빨래, 청소 등을 다하고 1시에야 자리에 들게 되었다.

그리고 3시에 일어나서 쇠망치와 곡괭이 등 연장을 지게에 짊어지고 가서 산을 개간하며 중노동을 하고, 아카시아 나무를 하고, 또 다른 일이 있는 대로 중노동을 하다가 시간이 되면 양복을 갈아 입고 전도를 하러 역곡에 나와 단에 서는 생활을 83년도까지 계속하였다.

해와 주님께서 이제 “네게 자유를 주겠다. 마음대로 하라”고 하셔도 순종하는 버릇이 있는 고로 이 사람은 6-7개월 동안을 계속 지시 하시는 대로 움직이고 시키는 대로만 하였다.

그러니까 나중에는 막 야단을 하시며 “왜 자유로이 알아서 하라는데 말을 안 듣느냐” 하시며 강력한 명령을 하시므로 그때서야 이 사람 의사대로 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희성은 밀실에서 완전히 죽었고

그러므로 아직도 이 사람을 조희성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착각인 것이다.

조희성이는 밀실에서 완전히 죽었고 지금 이 단에 선 자는 분명히 재창조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인 것이다.

재창조주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재창조의 역사인 의인(義人)을 만드는 일을 하겠으며, 태풍을 막고 여름장마를 지지 않게 하여 20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이 나라에 풍년들게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영원전부터 삼위일체로 존재하여 오셨다. 이 삼위일체 온전하신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영원까지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 온전하신 신으로 존재하시다가 지금으로부터 6천년 전에 삼위일체의 온전하신 하나님의 균형이 깨어지면서 2위 (位)인 아담과 해와가 마귀의 신인 사망의 신에게 점령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온전하신 하나님의 영생의 능력과 창조의 능력이 깨어지고 불완전한 일위의 하나님 즉 불구의 하나님, 무능력한 하나님으로 전락되었던 것이다.

이긴자구세주의 증표 이슬성신

마귀가 하나님 2위를 점령하여 하나님 세상을 마귀의 세상으로 만들었으므로 일위의 하나님은 마귀의 세상인 이 죄악세상에서 원래의 삼위의 하나님 세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6천년간을 숨어서 계속해서 도전을 하고 또 도전을 하여 왔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귀에게 백전백패 억전억패를 하여 오다가 6천년만에 드디어 잃어버렸던 2위인 아담과 해와를 찾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야 다시 삼위일체 온전하신 하나님으로 이루어져서 재창조주 하나님으로 군림하시어 어떠한 마귀의 세력도 부수어 나가시면서 재창조의 역사를 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하나님의 숨겨지고 감춰진 비밀이다. 이 세상 사람은 모두 사망의 신에게 사로잡힌 후의 아담과 해와의 후손이므로 이 세상 사람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이삭의 하나님으로 옮겨지고 이삭의 하나님이 야곱의 하나님으로 옮기게 된 후 하나님께서 없어졌거나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단(단군 할아버지)지파를 통하여 단의 하나님으로 숨어 역사하신 것이다.

단지파가 동으로 동으로 이동하여 한반도 땅에 정착한 것을 성경과 역사는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직접 구세주가 되는 것

이긴자구세주의 증표 이슬성신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핏줄을 타고 숨어서 역사하시다가 마지막에 단지파 자손인 대한민국 사람 「박태선」이란 이름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이다.

박태선 장로는 6천년 전에 잃었던 2위(位)인 아담과 해와를 찾기 위하여 수십년간 갖은 핍박과 수모를 당하시며 고생 하신 끝에 1980년 10월 15일자로 잃었던 아담과 해와를 찾는데 성공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후 하나님께서는 아담 이긴자의 몸으로 옮겨 오셔서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분신인 인생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역사하고 계시는 것이다.

60억 인간이 다 하나님의 자식이므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7단계를 거쳐 완성된 하나님 당신께서 당신의 자식들을 구원하시려고 구세주의 사명을 다하고 계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직접 구세주가 되시는 것이지 달리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자가 구세주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긴자구세주의 증표 이슬성신, 눈에서 나가는 광선이 촬영됨.

설령 예수를 구세주라고 한다면 예수가 사람을 죽지 않게 해야 하는데, 그것은 하지 못하고 사후의 심판, 사후의 천당, 지옥 따위나 말했던 것이다.

성경에 죄값으로 죽는다고 하였는데, 예수는 죽어서 천당 운운하였으니 논리에도 상식에도 맞지 않는 궤변론자일 뿐인 것이다.

결코 인간 조희성이가 구세주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7단계를 거치면서 마귀의 비밀을 파악하여 이기심으로 하나님께서 완성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고 재창조주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조희성이는 마귀중의 괴수 마귀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조희성 마귀를 때려잡아 소변으로 피를 3년간 쏟게 만들어 머리털부터 발끝까지 온 몸을 새로 만드셨다.

손톱 발톱도 다 빠지고 새로 돋아 나오며, 피부도 수십 번 새로 나는 과정을 겪었으며, 손가락이 뒤로 휘어 손 등에 가서 닿는 정도로 뼈도 어린아이 처럼 물렁물렁하여졌다. 상체를 뒤로 젖히면 머리가 발뒤꿈치의 땅에 닿곤 하였다.

계속 소변으로 피가 쏟아지는데 몸은 더 가벼워지며 은혜는 점점 강하게 연결되고 나중에는 대변으로 핏덩이가 쏟아졌다. 세포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피로 새로 조성되어 완전히 옛사람은 없어지고 새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옛날 조희성이를 형성 했던 피는 다 대소변으로 쏟아져 나가 없어지고 온전하신 하나님의 피로 가득차게 된 것이다. 이름도 잊어버리고 나이도 잊어버리고 집 주소도, 집도 다 잊어버린 상태가 되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완성자가 되었다는 말씀을 듣고 일주일 후, 밀실에 들어갈 때 입고 들어간 양복 주머니에서 주민등록 증을 우연히 꺼내 보고서야 아! 내 이름이 조희성이었구나. 주소가 경기도 부천시 범박동 28번지 C 5동 4호실이었구나 하고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인 신앙촌 집을 찾아가는데도 거기가 어딘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소를 갖고 신앙촌에까지 가서는 어른에게는 물어볼 수 없어서 꼬마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잘 몰랐어도 그 꼬마는 이 사람을 잘 알았던 모양이었다.

“여기, C 5동 4호실이 어디야?” 하고 물었더니 이 사람의 아래 위를 훌터 보면서 못마땅하다는 어조로 “여기 이 집 아니예요?” 하는 것이었다.

그 꼬마는 자기 집을 알면서 물어본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인간적인 놀음이라면 이 고통스러운 일을 하루라도 할 자가 없어

이긴자구세주의 증표 이슬성신

이 사람이 “고맙다” 하고 집을 찾아 가니 어머니와 딸 아이가 있었다. 그러나 낮선 사람을 만나는 것과 같이 서먹서먹하게 대하는 고로 이 사람은 그때서야 영이 완전히 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들 녀석이 안 보이는 고로 며칠 후에 다시 오겠다 하고 갔다가 그 약속한 날에 가니 아이들은 없고 어머니만 계시기에 그 이유를 물어 보고서야 애들이 전혀 아버지 같지 않고 서먹서먹함을 느껴 피한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정에 동참해 보니 참으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람이 발붙일 곳이 없다는 것을, 이 은혜 역사(役事)를 하면서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이긴자가 된 후 단에 한 번만 서고 나면 뼈골 속이 쑤셔오고 오한이 나서 벌벌 떨리고 나중에는 피를 토하는 무서운 고통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단에 서서 죄인들의 죄를 역겨워하지 않고 오염받아 사랑으로 씻어내곤 하였다.

그런고로 이 세상 사람 가운데서 죄인들의 죄를 짊어지고 가는 이긴자가 이 세상에서 최고로 불쌍한 존재인 것이다.

평생을 통하여 그 모진 연단을 받은 바 있으며 사선의 고비고비를 넘어 다져진 연단이 있는 고로 이런 험한 일을 하지, 그렇지 않고 인간적인 놀음이라면 이런 일을 하루라도 할 자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6천년간의 기간 동안에 당신이 승리하시지 못하게 되면 전 우주가 멸망하게 되어 있는 고로 외로운 싸움을 싸워 억만 번을 패해 오다가 6천년 기간이 완료되기 직전에 드디어 마귀를 이기시는데 완전히 성공하셨던 것이다.

그동안 6천년 전에 잃었던 2위(位)인 아담과 해와를 완전히 회복하기 위하여 치밀한 작전계획을 세우시사 여러 곳에 아담과 해와 후보를 세워 어떻게 넘어지고 실수하는지 예비로 길러 보셨다.

그리고는 그들이 교만 마귀에 걸려 넘어지는 것을 아시고 그때부터 진짜 아담과 해와 후보는 드러내지 않고 숨기는 한편 자존심을 꺾기 위하여 ‘마귀’ 소리를 듣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고로 해와 주님은 천사마귀라는 별호가 붙었고 이 사람에게는 3년 동안 안찰을 안 해 주심으로 마귀 소리를 듣게 했던 것이다.

언행의 하자가 없는데도 마귀라고 부르려니까 천사마귀라고 명명하신 것이다.

인간의 마음의 움직임을 포착하여 인간을 사로잡는 대장 마귀가 바로 자존심 교만마귀인 고로, 영모님께서는 진짜 아담과 해와를 기르실 때는 처음부터 숨기시면서 마귀칭호를 듣게 하였고, ‘나’라는 것을 짓이기며 자존심을 죽이는데 유리하도록 밑바닥 생활을 하게 하였던 것이다.

구세주 후보자가 단에 선다든지 은혜자인 것이 사람들 눈에 드러나게 되면 이길 수가 없는 것이 하나님의 사정이었던 것 이다.

 

전도관 역사는 잃었던 아담과 해와를 찾는 것

조희성님 존영

잃었던 2위의 하나님인 아담과 해와를 찾는 것이 하나님의 6천년 소원이었던 고로 전도관 백만 교인은 아담 해와 찾는데 들러리 역할만 하였던 것이다.

영모님께서 두 번이나 옥중에 가신 것도 아담과 해와를 고도로 사모하는 단계로 끌어 올리기 위한 방편이었고, 신앙촌을 세 곳에 건설 하신 것도 3위1체를 상징한 것이었다.

그리고 셋째 울타리가 마지막 울타리라고 초창기에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신앙촌이 아니고 하나님과 해와와 아담을 상징한 것이었다.

십사만사천의 수가 차면 하늘나라가 이루어진다고 한 것도 하나님께서 암호로 하나님과 해와와 아담을 말한 것이었다.

이 소원이 이루어지니 기장의 영모님은 드디어 1981년 1월 1일을 제 1회 이슬성신절이라 하셨고 그 때부터 전도관을 팔아치우면서 해산작전을 하셨던 것이다.

그런고로 이 역사는 하나님께서 6천년간 마귀와 더불어 싸우시는 계획된 역사지, 조희성이가 개인으로 인간적인 놀음을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해와 주님의 생일은 음력으로 8월 12일이고 이 사람의 생일은 양력으로 8월 12일인 것이다.

생일이란 조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태극기가 위는 빨강이고 아래는 파랑이며 또 둥근 원이 반반으로 합쳐서 원을 이루는데, 위는 아담의 상징이요, 아래는 해와의 상징인 것이다.

이 사람의 고향이 대한민국의 북쪽 김포이고, 해와 주님의 고향은 남쪽인 전남 광주인 것이다.

2004년 보광 이후 2008년 빛의 몸으로 계시는 구세주 하나님

또한 영모님께서 역사하시던 시대에는 영모님과 동갑인 정사생의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나라 대통령이었고 또, 해와 주님 시대에는 해와 주님과 동갑이신 최규하 대통령이 대통령을 하셨고, 이 사람이 50세 되던 1980년 10월 15일 완전히 이긴자로 명령을 받고 1981년도부터 천지공사를 직접 시작한 고로 이 사람과 동갑인 신미생 전두환 대통령이 80년도에 실권을 잡고 81년도에 제 5공화국을 출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하나님께서 전 세계 인류를 살리시기 위하여 우리 대한민국 사람으로 도성인신(道成人神)하시어 역사하시는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밀실에 들어가기 직전부터 밀실에서의 연단

해와 이긴자와 밀실

밀실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58년경 영모님께서 소사에다 제 1신앙촌을 건설하시고 전국 각지에 산재되어 있는 양떼들을 소사 신앙촌으로 모아서 은혜역사를 하실 때였다.

그런데 오만제단에 예배보러 올라오는 수많은 교인중에 천사마귀라고 끌려 나가는 여자분이 있었다.

매일같이 안내원들이 개 끌어가듯 질질 끌고 가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끌려 나갈 것을 알면서도 한결같이 예배시간에 예배보러 올라 왔다.

신앙촌 경비들이 이 분에게 ‘나는 천사마귀입니다’라는 팻말을 써서 가슴과 등에 달고 새끼줄로 묶어서 신앙촌 전역을 끌고 다니며 수모를 가한 일도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1950년대 후반기에 소사 신앙촌에 살았던 사람은 누구나 다 아는 것으로, 밀실은 천사마귀라는 낙인이 찍힌 홍권사라는 분이 기도생활하는 곳으로 시작된 곳이다.

당시 홍권사가 오만제단 뒷산을 넘어가면 털보가 있는데 털보를 찾아가서 은혜를 입혀 키워보라는 영모님의 지시를 꿈에서 받고 오만제단 넘어 숲속에 가보니 전봉국 집사가 있었다.

전봉국 집사는 그 때 당시에는 50대로서 구레나룻이 얼굴 전체에 가득하였던 사람인데 이 전집사는 그 분의 모친과 함께 닭 키우던 닭집을 그대로 이용하여 잠을 자며 지내고 있었다.

그 때부터 전봉국 집사를 집중적으로 키워 보려고 해와 이긴자도 거기서 기도생활하며 기거하게 되었다.

밀실 내부에서 대문쪽을 내려다 본 풍경, 꽃이 많아 ‘꽃집’ 이라 불렸다.

당시 해와 이긴자되시는 홍권사님의 모친이 찾아와서는 우리 딸이 천사마귀인데 마귀 새끼가 굶어서 죽어야지 먹으면 안된다하면서 조금밖에 없는 쌀과 약간의 취사도구를 몽땅 가져 가버리는등 핍박을 가하였다.

그래서 전집사의 모친이 아랫마을에 가서 문전걸식을 하여 찬밥을 얻어 오면 그것을 씀바귀와 시래기를 넣고 죽을 끊여 셋이서 훌훌 마시고 그것도 없으면 굶으면서 지냈던 것이다.

또한 인정머리 없는 신앙촌 경비들이 천사마귀가 있다 하여 거처 하던 닭집용 움막을 헐어버려 추운 겨울에도 바위 위에서 하늘을 지붕삼아 지내야 하는 처참한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영모님의 숨은 뜻을 모르는 교인들은 그 천사마귀를 없애버리는 것이 영모님의 뜻인 줄로만 알고 견디지 못하게 핍박을 가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모님께서는, 언젠가 소사 신앙촌내에 있는 자유시장에서 불이 난 일이 있는데, 영모님은 이 불이 난 후에 타다 남은 목재 중에 쓸만한 것을 가지고 저 오만제단 너머 계곡에 천사마귀가 있는 곳에 기도실을 하나 지어주라고 건설대 반장에게 명령을 하셨다.

그 때 기도실로 아무렇게나 지어준 건물이 오늘날 아담과 해와를 배출한 밀실이 되는 것이다. 이 곳에서 전집사를 키워봐도 되지 않으니까 해와 이긴자께서는 또 다른 사람을 전도해서 키워 보시고 또 다른 사람을 키워보시고 하면서 18년이란 기나긴 세월동안 연단을 받으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애를 쓰고 기를 썼던 것이다.

해와 이긴자가 전도를 하러 나가실 때에는 운동화를 단정히 신으시고 복장도 단정히 하여 나가셨으나 차는 타지 않고 걸어서 집집마다 다니시며 전도를 하였다.

때로는 비가 와서 냇물이 넘쳐 위험한 상태에 처해져도 영모님의 명령을 따라 포기하지 않고 몸을 던져 떠내려가면서 풀뿌리를 잡고 건너편 언덕까지 간신히 건너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이 분은 생명을 걸고 움직이는 분으로서 이 험난한 가시밭 길 외롭고 고독한 길을 수십년간 걸으셨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너무 힘이 든 해와 이긴자께서 “우리의 피를 신원하여 주시지 아니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겠나이까?” 하는 묵시록에 있는 말씀대로 기도를 하니 하나님의 사정이 불리하게 되어 영모님 사모님이 돌아가시게 된 참사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해와 이긴자가 한 번 떨어짐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는 해와 이긴자가 약해졌다가 되었고 육적으로는 사모님이 돌아가시는 참변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때부터 영모님께서 해와 이긴자를 들어 올려야 되므로 곤욕을 더 당하게 되시고 그로 인하여 아담 이긴자가 나타나는 일이 더 지연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기르는 가지가 올라가다가 떨어지게 되면 세상이 들썩거릴 정도로 대형사고가 나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였던 고로 이 사람도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며 살얼음 딛는 심정으로 살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실제 이 사람이 자유율법을 어기고 떨어지게 되면 대형사고가 나고 세상이 어수선하게 되었다.

언젠가 영모님께서 축복일에도 기장 단에 서시지 못하고 몇 개월씩 뼈와 가죽만 남은 인사불성인 상태에서 지내신 일이 있으셨다. 그 때가 일본 한요회사의 다무라 전무가 전자시계공장을 건설하기 위한 기계를 납품하기 위하여 계약차 와서 환영식을 할 때인데, 그 때의 기념사진을 보면 영모님의 얼굴은 완전히 뼈만 남은 상태에 있었다.

이 때가 바로 이 사람이 자유율법을 지키고 올라가는 중에 지키지 못하고 떨어진 때였던 것이다. 이사람이 마귀를 이기고 자유율법을 잘 지켜나가 1980년 2월, 1 차 이긴자가 됐다는 허락함을 얻고 전도하러 나가서 기성교회 하나를 통째로 전도하여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았는데 그것이 좋아하는 음란죄가 되어 떨어지게 되니 그 해 5월에 광주사태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만약 그때 다시 이기는 생활을 하지 못했다면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대로 지구는 점점 파멸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중국 원자재 개발권을 따다

이사람이 밀실에 들어가기 직전에는 남대문 영화빌딩 7층에서 수 십 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무역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회사는 날로 번창하고 돈도 어느정도 벌어놓아 이제는 고생 안하고 살아가나보다 하고 안도감이 마음 속에서 생기고 있었다. 그즈음 등소평의 친구로 장관자리에 있던 분의 자제 한사람이 홍콩을 통해 한국에 들어와서는 중국의 원자재 개발권을 맡길 만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 사람은 당시 우리나라 재계를 이끌었던 사람들을 차례로 만나 보았지만 그 사람들은 적임자가 될 수 없다며 남대문 근처 다방에서 우연히 만난 이 사람을 붙잡고 앉아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관상을 볼줄 아는 사람이었다. 중국의 광대한 원자재 개발을 맡아 중국에 이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며 조르기에 이사람은 할 수 없이 가계약서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

이것이 소문이 나자 재계의 거물들이 돈은 얼마든지 대주겠으니 동업을 하자고 추파를 보내왔다. 조그만 회사 사장이 졸지에 동양 일대의 갑부가 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이한 것이었다.

 

해와 이긴자를 만나게 된 경위

그러나 그 무렵 지권사를 통해 알게 된 해와 이긴자는 이제부터 집에 들어가지 말고 회사에서 자라고 하였다. 그래서 남대문 시장에 나가 오리털 침낭을 하나 사서 책상 위에서 잠을 잤다.

이사람이 해와 이긴자를 만나게 된 경위는 대충 이러하다.

하루는 남대문에 있는 이사람 회사로 전도관 시절에 알고 지냈던 지권사라는 사람이 찾아왔는데 그는 해와 이긴자를 증거하면서 여러 가지 말로 그 분을 한번 만나 보라고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평소 이사람은 신앙에 관한 한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고 오직 바라보이는 영모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대로 생활해 왔기 때문에 그런 얘기에 마음을 빼았기지 않았다.

그런데 바라보이는 영모님께서 따라가라는 신호를 보내시므로 그녀를 따라 망원동에 있는 해와 이긴자의 집으로 갔다. 그런데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폭포수 같은 은혜가 쏟아지는 겄이었다.

마치 은혜를 머리 위에서 바께스로 내려붓는 느낌이었다. 방안에 들어서자 해와 이긴자가 너털웃음으로 맞이하는데 더욱 은혜연결이 되어왔다. 그러면서 바라보이는 영모님께서 싱글벙글 웃으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사람은 몇 마디 나누지 않아도 이 분이 하나님의 신을 받은 은혜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사장이 일주일째 퇴근을 하지 않으니 직원들이 안절부절 못하고 집에서도 회사로 찾아오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관심의 음란마귀를 이기다

이렇게 되자 해와 이긴자는 이사람더러 망원동 모 여관에 들어가라고 명령하시었다. 그리고 주님만 바라보고 기도하라고 하시었다.

그래서 녹음기와 간단한 생활 필수품을 챙겨서 제일 조용한 2층 끝방에 입실하였는데 매일 한번씩 망원동에 있는 해와 이긴자에게 그날그날의 꿈풀이를 받으러 나가는 일 외에 하루종일 방안에서 영모님의 말씀을 테이프로 들으며 기도생활을 하였다.

매일 밤마다 꿈을 꾸었는데 이것을 상세히 적어 가지고 가면 해와 이긴자께서 그 전날의 심령상태를 꿈으로 풀이해서 호통을 치거나 칭찬을 하셨다.

그런데 이사람이 그 여관에 들어간 후 갑자기 손님이 많아지면서 옆방에서는 매일 밤마다 강간사건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이사람은 불의라면 눈꼽만치도 허용하지 않은 성품이라 당장 뛰어나가 요절을 내고 싶은 마음이 치밀어 올랐으나 다른 일에는 일체 관심도 생각도 하지 말라는 엄명이 있었던 고로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테이프 말씀만 들으면서 애를 쓰며 가까스로 그 순간을 참고 넘겼다.

그리고 그 날 꾼 꿈을 적어가지고 가니 아니나 다를까 해와 이긴자께서는 관심의 음란죄에 걸려 넘어졌다고 호통을 치셨다. 그래서 이사람은 이제는 밖에서 세상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와도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굳게 결심하였다.

그 다음날에는 어제보다 더 요란스럽게 강간사건이 일어 났다. “밖에 누구 없어요? 구해주세요!”라는 소리가 베니어 합판 한 장으로 막은 벽을 뚫고 귀를 찌를듯이 들려왔으나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눈으로도 영모님 얼굴을 새기며 귀로는 영모님 설교 테이프를 열심히 들었다. 그렇게 해서 관심의 음란죄에 걸려 넘어가려는 순간을 넘길 수 있었다.

다음날 해와 이긴자께서는 “어제는 겨우 이겼군” 하시었다.

다음날도 계속 강간 사건이 일어났으나 점점 확실하게 이겨나가니 얼마동안 계속되던 강간사건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 손님이 들끓던 여관에 손님이 딱 끊어지게 되었다.

한동안 계속해서 손님이 없자 여관 주인은 무당을 불러 그 원인을 물어보니 무당은 209호실 손님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여관 주인은 도대체 209호실 손님이 하루종일 밖에 나가지도 않고 뭘 하나 하고 문틈으로 방안의 동태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방안에는 녹음기 소리가 들리고 이사람이 리시버를 귀에 꽃고 있는 것을 보고 이사람이 간첩인 것 같다고 정보부에 신고해 버렸다. 한 날은 정보부원 두명이 이사람을 찾아와서는 방안을 샅샅이 수색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사람의 꿈풀이 노트에 적힌 내용중 북괴군이 남침한다는 등의 글귀를 보고 더욱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으나 단순히 꿈을 적은 것에 불과하고 육군 장교 전력등을 확인하고는 미안하다고 인사하고 돌아갔다.

그러면서 여관 주인의 신고로 오게 되었다고 슬쩍 귀뜸해 주었다.

 

밀실에 들어가다

밀실

이 사람이 여관에서 한 달 동안 있으면서 승승장구로 마귀와의 마음의 싸움에서 이겨나가니 해와 이긴자께서는 차를 가지고 와서는 짐을 챙기고 타라고 하시었다.

이사람을 태운 차는 서울을 빠져나와 이 사람이 수십 년간 연단 생활을 해온 소사 신앙촌의 오만제단 가는 옆 길로 해서 소위 밀실이라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3년간의 마지막 연단생활이 시작되었다.

만약 그 당시 중국의 원자재 개발권을 가지고 그 길로 나갔으면 이긴자가 될 수도 없을 뿐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도 이루지 못할 것은 뻔한 노릇이었다.

이 사람이 처음에 밀실에 들어가니 새로 온 사람이라 하여 독방을 주고, 텔레비젼을 사다주셨다. 텔레비젼을 켜고 화면을 보려니까 눈알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와서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눈을 감고 텔레비젼을 더듬어 스위치를 끄고 난 후, 해와 주님께 가지고 가서 “눈이 아파서 도저히 볼 수가 없습니다” 하며 반납했다. 그러자 해와 주님께서 “그럴꺼야” 하시면서 받아주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오랫동안 종사하고 있는 형제들은 보리밥을 먹는데, 이 사람 혼자만 쌀밥을 주기에 “저도 보리밥을 주세요” 하고 말하여 보리밥을 먹었다.

또 다른 형제들은 중노동을 하는데 이 사람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저도 노동을 하게 해 주세요” 하고 요청하여 밀실 식구들과 같이 일을 했다. 처음에는 숙달이 되지 않아 고충이 많았다.

밀실의 해와 주님께서는 밀실 식구들의 생각 돌아가는 것을 일일이 지적하시었다. 해와 주님이 손을 펴시고 기운을 부으시면 은혜가 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해와 주님은 마귀를 무저항(無底缸)으로 쓸어넣는 무서운 능력을 행하고 계시는 것이었다.

해와 주님께서 일러주신 새로운 기도로써 “혈기마귀 뿌리째 뽑아서 무저항!” 이라고 기도하면 혈기마귀가 무저항에 쓸려 들어가며, 또한 “못마땅하게 여기는 살인마귀 뿌리째 뽑아서 무저항!” 하면 못마땅한 마귀가 무저항에 쓸려 들어가는 것이 영의 눈이 트인 사람에게는 보이는 것이었다.

마귀를 무저항에 던져 잠그고 천 년이 차기를 기다렸다가 천 년이 찬 다음 마귀를 불가불 잠깐 놓아 주니까 곡과 마곡을 미혹하여 천년성을 두르게 되어 있으며 천년성을 두르고 있는 마귀는 하늘에서 유황불이 내려와 멸한다는 성경 묵시록 말씀 그대로 마귀를 무저항에 쓸어넣는 일을 해와 주님께서 실지로 행하고 계시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수십년간 영모님의 얼굴만 쳐다 보면서, 영모님이 오실 인자요, 나의 주님이라 여기고 길을 가든지, 눈을 감든지 뜨든지, 영모님 얼굴만 바라보는 생활을 계속 해왔다.

그런데, 해와 주님께서는 밀실에서 예수 사진을 놓고 기도하시기에 영모님 사진을 놓고 기도하시고, 예수 사진을 없애세요하고 말하고 싶었으나 바라보이시는 영모님께서 못하게 만류하시는 고로 그냥 지냈던 것이다.

밀실 안에 있는 남자들 중, 제일 나이가 많은 분은 전봉국 집사이고 그 다음이 50이 다 된 이 사람이고 그 외에는 아들뻘 되는 20대 젊은 청년들이었다.

그런데 이 젊은 청년들이 먼저 왔으므로 고참인데다가 밀실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 4숫자이고, 이 사람 혼자 5숫자라 하여 막내둥이 취급을 하였던 것이다.

밀실에 나오는 형제의 가족 중 국민학생 어린이의 꿈에 5자가 거꾸로 보이면, 조사장이 자유율법을 지키다가 떨어졌다고 해와 주님께서 야단을 치고 펄펄 뛰시며 통곡을 하시는 고로 이 사람도 땅바닥에 주저 앉아 목을 놓고 울었다.

한번은 나는 아무리 해도 이길 수 없다. 나는 도저히 하나님께 점령당할 수 없는 괴수 죄인이다라고 생각하고 해와 주님에게 이 사람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으니 이 사람이 존경하는 신앙의 동지 인 최수영 전도사를 데려다 키워 보세요하고 제의 해도 대답을 안하시는 것이었다.

그 후 해와 주님은 감리교 목사를 데려다 키워보시고 또 장로교 총신대학 대학생을 데려다 키우시면서 그 애인까지 불러서 옆에 두고 키워 보시기도 하고 유장로 등, 그외 여러 사람을 이 사람이 보는 앞에서 키워보셨다.

그런데 그들은 힘든 연단을 견디지 못하고 조금 지내다가는 하나같이 도망치는 것이었다. 해와 주님은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서 계속 열심히 하라는 느낌을 주셨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꾸 안될 것 같이 생각되는 고로 6개월간 졸라서 드디어 최수영 전도사를 전도해보라는 허락을 받아냈다. 그리하여 먼저 전화로 연락하여, 부천등기소 근처 모창고 앞에서 콜라병을 박스채 사다 놓고 마셔가면서 하루 종일 전도를 했다.

이 사람이 최전도사를 밀실로 데려가려고 열심히 전도를 하면서 영모님께서 키우신 틀림없는 해와 이긴자야. 하나님의 뜻이 밀실에 있어하는 등 여러모로 설득하려 하였으나 최전도사는 아니야! 그 사람은 천사마귀야! 영모님께서 분명히 천사마귀라고 하셨어! 어쩌다가 조형이 그 마귀 꼬임에 빠져 산 속에서 고생을 하느냐? 참으로 아깝다. 속히 나 와라! 하며 도리어 이 사람을 끌어 내려고 했다.

둘이서 실갱이 벌이기를 하루 종일 하다가 도저히 되지 않아 허탈한 심정으로 해와 주님을 뵈오니, 해와 주님께서 아시고 그것 봐 안돼잖아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여기서 이 사람은 네가 열심히 해라 너 하나 밖에 없지 않느냐하는 암시를 강하게 느끼고 그 때부터 더욱 열심히 매달리기 시작했 던 것이다.

 

자존심 교만마귀에 떨어져

1979년 12월 하순경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시온합창단의 연말 정기 연주회가 있었다. 그 때 영모님을 비롯하여 영모님 사모님과 많은 전도관 교인들이 참석하였고, 이 사람과 해와 주님은 영모님께서 앉으신 좌석에서 옆으로 몇 좌석 건너서 앉게 되었다.

그런데 잠시 영모님의 모습을 뵈오니 영모님의 모습이 몹시 늙어 보이고 피로해 보이는 것이었다. 해와 주님과 이 사람은 이 못난 인생을 키워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밤잠을 못 이루시고 피를 토하시며, 죄를 담당하셔서 뼈와 가죽만 남아 초췌하게 되어버린 영모님을 뵙기가 몹시 죄송스럽고 하나님의 사정이 너무 곤고하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손수건이 흥건히 젖도록 눈물을 펑펑 흘리며 흐느껴 울었다.

하나님의 기막힌 사정에 눈물이 자꾸 흘러 손수건을 짜서 눈물을 닦고 또 짜서 닦고 하다보니, 2-3시간이나 되는 공연이 끝날 때까지 울게 되었다.

그런데 문득 의자밑 바닥을 보니 눈물로 흥건해져 있었다. 영모님께서도 가끔씩 이쪽으로 눈길을 주시며 눈물을 감추시려고 하는 모습을 뵐 수 있었다.

얼마 후 공연이 끝나고 밖으로 나설 때, 이덕빈 전도사를 만나 반갑게 악수를 했는데 순간 나는 이긴자이고 너는 죄인이다하는 생각이 스쳐가는 것이었다.

해와 주님께서는 밀실에 들어 오시자마자 “조사장 이 새끼, 자존심 교만마귀에 걸려 떨어졌다”고 펄펄 뛰시며 뭇매를 가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목을 놓고 울게 되니 밀실 식구들 모두 대성통곡을 하며 울어서 밀실이 초상집같이 되었다.

 

관심의 음란마귀에 떨어지다

해와 주님은 망원동에 자택이 있어서 매일 밀실까지 출근을 하셨는데 하루는 항상 오시던 시간이 지나도록 안 오셔서 언제쯤 오실까하고 기다렸다.

그런데 해와 주님은 다른 날보다 훨씬 늦게 도착 하시면서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조사장 이 새끼, 이 개 같은 새끼! 기다리는 음란죄에 걸려서 떨어졌다!”고 하시며 야단을 치시고는 목을 놓고 우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온 밀실 식구들이 해와 이긴자를 따라 통곡을 하고 울었던 것이다.

그 때 이 사람도 두 다리를 땅바닥에다 뻗고 대성통곡을 하며 울면서 또 하나님을 괴롭혔으니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세요하고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해와 주님의 쓴 매를 다 맞았다.

그런데도 맘속으로는 이 개 같은 마귀새끼 더 때려 주세요, 죽여 주세요하며 고소하게 여기고, 이를 갈고 치를 떨며 다시는 기다리는 음란죄에 걸리지 않으리라고 굳은 결심을 하였다.

이렇게 넘어지면 오똑이와 같이 다시 일어나서 새출발을 하여, 도전하고 또 도전을 하며 포기하지 않았다.

 

뒤돌아 보는 음란마귀에 떨어져

밀실

하루는 산에 가서 아카시아 나무를 베고 있는데, 저쪽에서 지나가는 어떤 사람의 뒷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과거에 논산 훈련소 교관으로 있으면서 금마재건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 쳤을 때, 학생이었던 최군과 꼭 같이 생겼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것이 ‘뒤돌아보는 음란죄’에 걸린 것이었다.

이것을 아시고 해와 주님께서 산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큰 소리로 “조사장!” 하며 이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순간 이크 또 걸렸구나는 생각과 함께 하던 나무는 두고 부리나케 해와 주님께로 달려갔다.

해와 주님께서는 조사장 저 새끼 떨어졌다고 펄펄 뛰시며 그 큰 손으로 닥치는 대로 후려치시고 우산대의 뾰족한 끝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쿡 쿡 찔러대며 야단을 치셨다. 그러나 이 사람은 감사한 마음으로 매를 맞았다.

기운이 없어 매를 맞는 것도 아니고, 또 때릴 때 팔을 들어 제지를 하던지, 몸을 약간 피하면 매를 맞지 않을 수 있었으나 ‘나’라는 것이 어느 정도 죽은 고로 여자 분에게 그런 뭇매를 맞고도 오히려 고소하게 여겼다.

이렇게 되니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지고 겁이 났으며, 다시는 과거를 생각하지 않을 것을 굳게 다짐하게 되었다. 이 뒤돌아 보는 음란죄에 걸리지 않을려면 쉴 틈을 주면 안된다 하여 밭에 가서 일을 하든지, 산을 개간하였던 것이다.

일을 하다가 힘이 들어서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이 개같은 마귀 새끼가 쉬기는 뭘 쉬어 마귀새끼. 너는 죽어야 되는데 쉬면 마귀가 도로 살아나니까 쉴 수 없어 하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있는 힘을 다하여 일을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일을 하다 보면 결국에는 입에서 단내가 나면서 정신이 들락 날락 하다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버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몇 시간 뒤에 깨어나 보면 쓰러져 있는 고로 이 개같은 마귀새끼가 쓰러졌구나 하고 다시 일어나서 쇠 해머를 들고 돌을 깨며 개간을 계속했던 것이다. 그러면 또 정신이 들락 날락하며 더 이상 참고 견딜래야 견딜 수 없는 경지에까지 가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서도 포기하지 않고 고도로 1초도 놓치지 않고 영모님을 바라보면서 계속 일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또 쓰러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참 후 다시 깨어나서는 죽도록 일을 하는 피투성이의 처절한 마음의 싸움을 계속했던 것이다. 그러니 1초 후에 어떻게 된다는 것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오직 내 생명이 되신 하나님 영모님만을 바라보며 밀실 안에서 이 찬송가를 즐겨 불렀던 것이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 해요.

험한 이 길 가도 가도 끝은 없고 곤해요.
우리 주님 팔내미사 내 손 잡아 주옵소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 일도 몰라요.
어머니여 날 붙드사 평탄한 길 주옵소서.

좁은 이 길 진리의 길 주님오신 그 옛 길.
힘이 들고 어려워도 맡기면서 옵니다.

주님이여 그 음성을 항상 들려 주옵소서.
내 마음은 정했어요 변치말게 하옵소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 일도 몰라요.
어머니여 날 붙드사 주신 소명 이루소서.

내일 일은 몰라요 찬송 +
설교말씀 일부
 

이 찬송은 작사, 작곡한 사람이 평양 신양리 형무소에서 공산당으로 부터 사형언도를 받고 집행하는 날짜만 기다리며 전체를 하나님께 맡긴 상태에서 불렀던 곡이었는데 이 사람의 처지를 그대로 표현한 찬송도 되는 것이었다.

이 밀실에서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면, 절대로 살아서는 세상에 나갈 수 없으니 목숨을 끊어버려 끝장을 내든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이긴자가 되든지 둘 중에 하나였던 것 이다.

그렇게 결사적으로 매달리고 짓이기게 되니 밀실 안에서 계속 해서 소변으로 피가 쏟아지고, 몸이 가벼워졌다. 처음에 밀실에 입고 들어간 옷은 헐거워 입지 못하게 되었다.

한동안 짓이기는 생활을 하게 되니, 몸은 가죽과 뼈만 남아서 얼굴도 핼쓱한 상태로 되어 옛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때 이 사람을 처음 보는 사람은 환자로 보았겠지만 구면인 자는 이 사람을 알아 보지 못하였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자유율법을 범하지 않겠다고 각오를 하고 매달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80년 2월 초에 “이긴자가 되었다!” 하여 해와 주님께서 옷도 맞추어 주시고 신발도 사주시면서 전도를 나가라고 하셨다.

그 후 이 사람은 걸어서 집집마다 전도를 하며 멀리 포리까지 매일 전도를 다녔다.

 

좋아하는 음란마귀에 떨어져

2010년 현재 밀실 주변 지도

하루는 은행리에 있는 은광 장로교회의 주임장로인 유장로를 전도 하였다.

유장로는 전도받은지 3일 만에 은혜를 받아 소변으로 피를 쏟은 것을 보여주며, 몸이 가벼워지고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니 하나님의 은혜가 분명하다며 몹시 기뻐하였다. 그리고 이 교회를 조목사님께 드리겠으니 내일부터 단에 서서 예배도 인도하시고 마음대로 쓰시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사람이 장로교회 간판을 떼어버리고 전도관 간판으로 바꿔 달라고 하였더니 유장로와 그의 아들이 함께 그 자리에서 장로교 간판을 도끼로 찍어 쪼개버리는 것이었다.

전도관 간판으로 바꿔 달고 개관 예배를 보게 되었을 때 당시 기성교회 측 한국 복음 전도회 회장이었던 신영균 목사를 주축으로 차재복 장로 등이 이 사람을 만나 전도를 받았다.

예배를 다 보고 나서 그들은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놀랍고도 새로운 진리의 말씀이라고 감탄하였다. 이렇게 이 사람 말을 듣고 기성교회 하나가 송두리째 간판을 바꿔 달고 넘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 차재복 장로 등은 여의도 광장같이 넓은 데서 대규모 부흥집회를 갖게 되면 멀지않아 이 세상이 전도관 천지가 되겠다며 좋아하였다.

그 은광 장로교회에서 개관 기념집회를 마치고 밀실에 들어서자마자 해와 주님께서 조사장 저 마귀새끼가 좋아하는 음란죄에 걸려 떨어졌다고 청천벽력 같은 고함을 치시는 것이었다. 그 말씀을 들으니 하늘이 노래지고 온 전신에 맥이 풀리며 몸이 천길 만길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 것이 죄라면 누가 이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나는 도저히 더이상 이 길을 갈 수 없으니 이제 이 세상을 하직하렵니다. 그동안 하나님을 너무너무 괴롭혀드려 죄송하고 송구스런 마음으로 몸둘 바를 몰랐는데 이제 또 좋아하는 음란죄에 걸려서 떨어졌으니 저는 이제 포기하겠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요. 하면서 죽을 각오를 하니 그동안 살아온 가시밭 인생길이 생각나면서 슬픔이 복받쳐 올라오는 것이었다.

이사람은 밀실에 들어오면서 ‘이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밀실에 들어와 마지막 연단을 받게되니 여기서 이긴자가 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게 되면 살아서 나가지 않을 것이다. ‘하고 굳은 결심을 한 바 있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뜻도 이루어 드리지 못하고 죽을 생각을 하니 너무너무 기가 차는 것이었다.

그 슬픔은 어디다 표현할 수 없었다. 마침내 이사람 숙소 앞에 있는 큰 아카시아 나무에 목을 매달 끈을 찾고 있는데 영모님께서 갑자기 나타나셔서 “조금만 더 참으면 되는데 성급하게 왜 그러는거야?”하시며 이사람 두 손을 붙들고 우시는 것이었다.

이사람도 같이 흐느껴 울면서 “죄송합니다. 또 하나님을 괴롭혀 드렸군요, 이 몸과 생명 전체를 모두 하나님께 맡겼으니 죽는 것도 내 뜻대로 할 수가 없는데 죽을려고 했으니 내가 또 죽을 죄를 지었군요.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하고 한참을 울다가 죽을 마음을 고쳐서 참고 견디어보겠다고 결심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영모님은 온데 간데 없으시고 방안에 이사람 혼자 있는 것이었다. 영모님이 문을 열고 나가셨나 하고 문을 보니 문고리는 그냥 걸린 채로 있었다.

그리하여 죽으려는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이를 갈아 부치고 연단을 시작했다.

좋아하는 음란죄에 걸려 넘어진 것이 3월 하순경이었는데, 그 때부터 전도하러 가지도 못하고 나를 짓이기는 연단을 가일층 계속하였다.

모든 형제를 하나님으로 여기다

외부인들에게는 ‘꽃집’ 이라 불렸던 밀실, 외부에서 본 입구의 모습

밀실에서는 개간된 농지가 많이 있고 계속 개간을 해 나가고 있어 포도 농사와 함께 밭농사도 많이 하였다.

이 사람은 가을이 되면 김포공항 가는 쪽, 십정동에 있는 나병환자촌에 가서 닭똥을 몇 트럭씩 사서 밭 가까운데 부려 놓곤 하였다. 그리고 밤 늦게까지 지게에다 바소쿠리를 차려서 닭똥을 짊어지고 경사진 산 언덕을 넘어 포도밭까지 운반을 하였다.

그러면 온 몸이 닭똥 냄새와 땀으로 범벅이 되지만 그래도 끝까지 일을 해야 했고, 봄이 되면 포도나무의 순을 치는 등, 밭손질도 하였다.

예수가 자신을 가리켜 ‘포도나무’라 했는데, 포도나무가 뱀이나 구렁이같이 구불구불하게 생긴 것이 예수를 간접 증거하고 있는 것을 보고 예수가 말은 바로 했구나 하는 생각도 하였다.

언젠가 비가 많이 와서 마을 방천(防川)이 무너져서 수해가 난 후에 이 사람이 혼자서 며칠을 걸려 큰 돌을 운반해서 그 둑을 다시 튼튼히 쌓아서 정상으로 만들어 놓고, 도로보수도 하였다.

땅의 소유권 자가 누구인가에 상관없이 희생적으로 일을 하였으므로 하루는 관할 행정공무원이 이 사람을 찾아와 인적사항을 묻길래 왜 그러시냐고 하니 표창을 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사람은 표창은 무슨 표창이냐며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 하여 극구 만류하여 인적 사항을 가르쳐 주지 않고 돌려 보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심한 중노동을 헌신적으로 하는고로 이 사람이 지나가면 그 동네나 이웃 동네에 놀고 있는 아이들이 “저기 꽃집의 머슴아저씨 간다”고 소리지르기도 하였다.

해와 주님이 계신 집은 꽃이 많이 있는 고로 ‘꽃집’이라고 불리웠으며 이 사람은 그 집의 머슴으로 소문이 났던 것이다.

새벽이나 저녁이나 일을 하였는데 기분내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해와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일정하게 규모있게 일을 하였다.

아카시아 나무는 하루에 두 짐씩 하게 되어 있는 고로 오만제단 꼭대기에 있는 아카시아 나무는 대부분 이 사람 손으로 져 날랐던 것이다.

처음에는 가시가 날카로와 손을 찌르고 피부를 긁히는데, 먼저 와서 단련된 고참 형제들을 따라 가려니 상처가 더 많이 나고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또한 걸음을 겨우 떼어 놓을 정도로 무겁게 짊어지고 비탈길을 내려오다가 눈이 온 겨울에는 미끄러져서 다치기도 했고, 겨울이 아닌 때도 나무 뿌리에 걸려 지게를 짊어진 채 나무짐과 같이 거꾸로 몇 바퀴 굴러 떨어져 온 몸에 가시에 찔리기도 하였다.

숙소에 와서 옷을 벗어 보면 등에도 가시가 박혀 있는 그런 상태에서도 ‘너 같은 새끼는 마귀니까 죽어야 돼’ 하며 고소하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 상처가 나고 가시가 박혀 있는 상태에서도 약 한 번 쓰지 않고 지내어도 곪아서 덧나는 일이 없고 상처가 빨리 치유되는 체험을 수없이 하면서 지냈다.

한 번은 무거운 돌을 운반하는데 젊은 청년이 하는 말이 “우리는 힘이 약하지만 조사장님은 힘이 장사시니 이 돌을 한 번 짊어져 보세요”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힘이 있다 해도 40대 후반 장년에게는 불가능할 정도의 무거운 큰 돌인데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막내로서 고참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의미에서 그 바위를 짊어지고 겨우 일어나니 다리가 벌벌 떨 리는 오금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한발 한발 옮겨서 가니 중간에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고로 “너는 쉴 수가 없어! 너는 이런 고통을 당해야 돼’ 하면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목적지까지 운반해 가며 나를 짓이겼던 것이다.

해와 주님께서는 이 사람의 별호를 ‘일군’이라고도 하시고,’12지파 두목’이라고도 하셨다. 다른 형제들은 ‘4’ 숫자지만 조사장만은 ‘5’숫자라고도 하시고, “조사장만 이루어지면 너희들은 맡아 놓고 구원이야!” 하는 말씀도 하시고, ‘막내둥이’라고도 하시었다. 그러나 밀실 식구들은 다 이 사람을 ‘막내둥이’로 알았고, 또 막내 둥이 취급을 하였다.

20대 새파란 젊은 청년이 이것을 하라 하면 이 것을 하고, 저것을 하라 하면 저것을 하고 시키는 대로 군소리 없이 잘 해도,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귀퉁이를 갈기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라는 것이 마귀인 고로, 그리고 ‘나’라는 것이 어느 정도 죽은 고로 매를 맞아도 고소하게 생각하며 더 열심히 일을 했던 것이다.

나를 제외한 모든 형제들을 진심으로 하나님같이 여기게 되니 자유율법이 지켜지며 마귀가 죽는 고로 때린 청년이 나중에는 이 사람을 찾아와서 “제가 손위 어른을 손찌검해서 죄송합니다” 하고 잘못을 빌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런 막내둥이였던 고로 뜨거운 여름, 섭씨 30도가 오르 내리는 날에도 해와 주님께서 쓰실 목욕물을 자전거 뒤에 가득 싣고 숨이 막힐 정도의 고통을 무릅쓰고 길어 오는 일을 맡아 하였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급경사진 비탈길을 밀고 올라오느라 전신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도 누구 하나 도와 주는 자 없었다.

또한 수확기가 되면 포도를 따다가 손수레에 가득 싣고 부천 청과물 시장에 내다 팔고, 다시 밀실 식구들이 먹을 수박이며 과일 등을 상자에 담아 손수레에 가득 싣고 혼자서 비탈진 길을 끌고 와야 했다.

젊은 사람들과 같이 가게 되어도 사람들이 많이 다니면 창피하게 생각되는지 뒤에서 밀다가 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내 자신이 치가 떨리게 미운 마음’으로 연단이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즐거운 마음으로 손수레를 끌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었다.

이긴자가 된 후 역곡의 단에 서면서도 83년까지 부천 청과물 시장에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물건을 팔고 사는 것과 운반은 이 사람이 맡아놓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승리제단의 단상에 서게 된 후에는 승리제단 식구가 혹시 보면 실망할까봐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변장을 하여 새벽 일찍 청과물 시장에 나가곤 하였다.

그래도 역곡 교인인 충열군에게는 몇 차례 들키기도 하였던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연단

이렇게 ‘나’라는 것을 짓이기는 생활을 하루 이틀 한 것도 아니고 수십 년을 해 왔다. 밀실 안에서도 무서운 중노동을 하면서 피투성이 싸움,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싸움을 하였던 것이다.

이 사람은 고기를 먹을 줄 모른다고 말하고는 고기를 일절 먹지 않았지만 해와 주님은 밀실 식구들이 심한 중노동을 한다 하시며 자주 닭고기를 사오셨다.

이 사람도 너무너무 고기가 먹고 싶었으나 마귀가 좋아하는 것을 먹어서 마귀의 기를 살려 줄 수 없는 고로 ‘고기를 못 먹는다’고 거짓말을 하고 김치만 먹었다.

그런데 일차 이긴자가 된 후에 이 사람이 고기를 먹으니 ‘조사장님이 이제 고기를 잡수십니까?’ 하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저도 이제 배웠습니다’ 하며 고기를 잘 먹으니 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배가 고파서 밥을 더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즉시 식사 하던 것을 중단해 버렸다. 또 잠을 자는 시간이 되어서 졸리면 잠을 자지 않고 찬물로 목욕을 하는 등 잠을 깬 후에, 잠이 안 올 때 잠을 잤던 것이라.

또 이 사람은 생일 같은 것은 지내보지 않았다. 생일이 되면 어머니께서 미역국을 끊이시는 고로 일부러 생일이 되면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나’라는 것이 육천년동안 하나님을 울리고 괴롭힌 원수 마귀인 것을 아는 고로 ‘나’라면 저절로 미워지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반대 행동을 평생토록 해 왔지만 밀실 안에서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철저히 비밀리에 실천했던 것이다. 해와 주님께서 무서움을 없애는 연단을 시키시는데, 처음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밤중에 공동묘지에 가서 기도를 하고 오라고 하셔서 공동묘지에 가서 기도를 하고 오곤 하였다.

그런데 해와 주님께서는 사람을 미리 공동묘지 근처 숲속에 보내 놓고 밤중에 이 사람 이 거기에 가서 기도하는 중에 모래를 던지게 하여 겁을 주려 하였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무서움이 없을 뿐 아니라 일생을 통해 수천 번 죽음의 고비고비를 넘어 두려움이 없어진 고로 무난히 이겨 나가니 나중에는 장사(葬事)지낸 지 3일 된 무덤을 파헤치고 관을 뜯어 시신을 들어내고 그 관 안에서 잠을 자고 오라고 하셨다.

시키는 대로 밤중에 혼자 삽을 가지고 가서 무덤을 파고 관을 뜯어보니 목을 매어 자살한 시신이 누워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시신은 눈을 크게 뜨고 혀를 길게 뽑아 늘어뜨리고 있는, 보기에도 흉칙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아무 두려움 없이 시신을 들어내고 그 관에 누워서 잠을 청하여 단잠을 쿨쿨 잤다.

한참을 자다가 하나님께서 깨워주시는 고로 일어나 원상태로 무덤을 정리해 놓고 오니, 그 이후에는 무서움에 대한 연단을 안 시키시는 것이었다.

순종하는 면에 대한 연단도 단계가 있는데, 처음에 남의 집 가마니를 도둑질해 오라고 하기에, 밤중에 몰래 남의 집 담을 넘어 가마니를 도둑질 해 오니 해와 이긴자는 “이 도둑놈의 새끼야! 누가 가마니를 도둑질 해오라고 했어! 도로 제 자리에 갖다 놔!” 하며 호통을 치셨다.

훔쳐 올 때는 갖다 놓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훔쳐 왔기 때문에, 다시 들키지 않게 갖다 놓는 것은 더욱 힘들었던 것이다.

웬만한 사람 이라면 “은혜자라는 사람이 왜 도둑질을 시킬까?” 하는 마음이 들텐데 이 사람에게는 그런 마음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날이 맑게 갠 쾌청한 일기 인데도 해와 주님께서 “밖에 비가 오지?” 하면 “예” 하는 마음자세로 돌아가야지 “아닙니다. 날씨가 맑습니다. ” 하면 ‘이유 변명죄’ 가 되었던 것이다.

한번은 해와 주님께서 “조사장, 전기세 줄 돈 20만원을 왜 도둑질 해 갔어? 당장 가져 와!”라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밀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 10원짜리 동전까지 다 털어 놓았으며 내 것이라고는 털끝 만치도 없었고, 이 몸과 생명 전체를 하나님께 맡긴 상태였다.

그러나 나는 도둑질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씀드리면 이유변명죄가 되고, 이 결백을 알아주지 않고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마음을 먹으면 하나님에 대하여 의심죄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형제가 오해하면 몰라도 이 사람을 영적으로 키우고, 이 사람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해와 주님께서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섭섭한 마음을 갖게 되면 섭섭한음란죄에 걸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가 입고 있는 의복도, 몸과 마음과 생명 모두가 다 「당신 것」을 「내 것」으로 알고 지금까지 사용하여 왔으니 도둑놈이 맞습니다.

이 시험을 이길 것을 아시고 시험을 주셔서 이기게 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는 마음을 품으니 “꼴도 보기 싫으니 나가!” 하시는 것이었다.

이 말씀이 이겼다는 뜻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뒷걸음쳐 나올 때 딴 형제들은 조사장이 점잖은 줄 알았더니 도둑질을 하였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또한 생각만 하면 자유율법에 걸리는 고로 생각의 자유가 없었다. 생각을 꽁꽁 묶어 놓고 하나님만 의식하고 하나님만 바라보았던 것이다.

누가 이야기를 걸어오면 마음 속으로 하나님 이 형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데 대답을 해도 되겠습니까 하고 하나님께 여쭈어 보고 허락을 받고 나서 움직였다. 그렇게 하니 행동과 말이 자연 조심이 되며 남보기에 머뭇거리는 것같이 보이고 바보같이 보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 길은 바보가 되어야 가는 길인 것이다.

마치 굼벵이가 매미되는 과정과 같은 것인데, 굼벵이는 꼬투리 속에서 한동안 꼼짝않고 죽은 상태로 있다가 일정기간이 지나면 꼬투리 속에서 나와 날개가 달리고, 이슬을 먹고 노래를 부르며 자유자재로 하늘을 날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탈을 쓴 상태에서 하나님으로 바뀌는 과정도 이와 같다.

‘나’라는 것이 마귀이므로 나의 몸을 묶어놓고 죽이라는 것이 아니고, 나의 생각, 나라는 주체의식을 꽁꽁 묶어 완전히 바보가 된 상태에서, 무슨 일을 당해도, 어떤 어려움이 와도 가사(假死)상태와 같이 죽은 상태에서 일정기간이 흘러가야 그 후에 변화가 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 멋대로 살게 되면, 나라는 의식이 마귀이므로 변화가 오지 않는 것이다. 감정 자체가 죄인 것이다.

그래서 영모님도 나무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나무와 같이 감정이 없어지기 위해서 ‘나’라는 것이 노력을 해서는 절대로 되어지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 하신 대로 순종만 하면 하나님께서 오셔서 마귀를 죽여 주시고 자유 율법을 대신 지켜 주시는 것이다.

기도를 하라는 해와 주님의 말씀을 따라 밤새도록 기도를 하였는데도 그 다음 날 왜 기도를 하나도 안 했느냐고 야단을 치시며 지적을 하시는 것이었다.

그 때 이 사람이 밤잠도 자지 않고 밤새도록 기도하였습니다하고 말씀드리게 되면 이유변명죄가 되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인지 가르쳐 주지도 않고 무조건 기도를 안 했다고만 하시니 누가 이 길을 가겠는가? 이와 같이 아무리 애를 쓰고 기를 써도 되어지지 않는 고로 내가 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이 길을 갈 수 없으니, 나는 포기를 해 버리고 하나님이 오셔서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해 주세요 하였던 것이다.

그제야 바라보이시는 영모님께서 그래 그래 바로 그거야 하시는 듯 싱글벙글 웃으시는 것이었다.

그 때 ‘나’라는 것이 기도를 해도 죄가 되고, ‘나’라는 것이 하나님께 맡겨도 죄가 되고, ‘나’라 는 것이 하나님을 믿어도 죄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마음으로 자유율법을 지켜나가니 그 때부터는 미끄럼타듯이 쉽게 되어졌다.

‘나’라는 것이 하나님께 전체를 맡기면 마귀가 맡겼다가 되므로 하나님께서 받아주지 않으시고 또한 죄가 되므로, 하나님이 오셔서 맡겨주시고 맡긴 것을 또 맡겨 주시고, 이 맡긴 것을 또 맡겨 달라는 마음상태를 가져야 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나 용어는 여기와서 처음 들어보는 말일 것이다.

 

군제대 이후 밀실에 들어가기 직전까지의 행적

11년의 군생활 마감

군에서는 지휘관이 예하 장병들의 근무평점표에 점수를 메기고 의견을 적기도 하는데 이 사람은 육군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몇 번 제대 원서를 적어 내어도 제대가 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 근무하는 동기생에게 물어보고서야 알게 되어서 이사람은 편법을 쓰기로 작정하였다.  

전에 이 사람이 영모님에게 꿈 안찰을 받기 전에는 밤낮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몸이 쇠약해져 폐결핵 초기 단계에 있었는데 꿈 안찰을 받고 나서 그것이 깨끗하게 나은 적이 있었다.  

그래도 X-RAY를 찍어보면 그 부분이 희끗하게 찍혀 나오므로 그것을 군의관에게 보여주면서 부탁을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의가사 제대를 할 수 있었다.  

1963년 7월 31일, 이 사람은 장교생활 11년 만에 육군중위로 제대한 뒤 열두 식구 부양가족을 데리고 소사 신앙촌에 입주했다.

그후 제대할 때 받은 퇴직금을 사기꾼에게 몽땅 사기를 당했는데 그러한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가진 돈이 떨어져 가족들이 굶게 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때 이 사람은 장사라도 해 보려고 신앙촌 내에 있는 공장을 찾아가 물건을 대주면 장사를 해보겠다고 간청했다. 그런데 공장에서는 조중위 마귀가 왔다고 하면서 빨리 나가라고 떠미는 등 상대조차 하지 않고 쫓아냈다.  다른 공장으로 갔으나 거기도 역시 마찬가지로 당신같은 마귀에게 물건을 대주었다가는 마귀로 찍혀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 당신이 있으면 재수 없으니까 빨리 나가라고 하는 바람에 어디에도 발붙일 곳이 없게 되었다.

 또한 예배에 참석하려고 오만제단에 올라가면 안내원들이 마귀가 왔다면서 못들어 가게 하고 주먹으로 귀퉁이를 쥐어박거나 매를 때려 푸른 멍이 든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정 이야기를 가족들에게도 할 수 없었다. 신앙이 없는 동생들이 눈치를 채고 혹 신앙촌 밖으로 나가버릴까봐 매를 맞아도 매맞은 표시를 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매를 맞은 날이면 매맞은 자리를 손으로 비벼서 푸른 자욱을 없앤 뒤에야 집에 들어가곤 했다. 그러다보니 해가 진 후에야 집에 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이 사람은 가족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웃으면서 들어가야 했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날이면 날마다 안내원이 문에 지켜서서 마귀라고 예배를 못 보게 하는 고로 영모님 설교말씀을 멀리 숲에서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소리로만 들어야 했고 그토록 보고 싶은 영모님 얼굴을 뵙는 것조차 힘들었다. 예배 인도차 오만제단에 올라가실 때의 차에 타신 모습만을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어쩌다 스쳐 지나가는 정도로라도 뵈올 수 있을 때는 너무너무 감개무량하고, 반갑고 고마운 고로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절을 하곤 했다. 또 영모님이 단상에서 예배를 마치고 승용차로 내려 가실 때에 이 사람은 급히 달음질쳐서는 도로변에 서서 영모닌께 인사를 드리곤 했는데 그 때마다 구슬 같은 눈물을 흘렸다.

 어떤 때는 영모님께서 차를 잠깐 멈추신뒤 이 사람에게 “요즘은 어떻게 지내?” 하시며 물어 보시곤 했는데 영모님께서 이 사람의 눈물을 보시면서 당신께서도 눈물을 글썽이시며 가시곤 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안내원들은 예배시간만큼은 제단 맨끝 구석자리에 앉아 예배 보는 것을 허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 때마다 너무 감사하고 황송하여 눈물로 예배를 보았고 어떤 경우에는 안내원을 피하여 제단 안에 들어가 보기도 했는데 들키면 매를 맞으면서 끌려 나왔다.  

이뿐 아니라, 조중위는 마귀라고 하면서 오만제단 주일학교 반사를 하던 여동생을 조중위 마귀의 여동생이라는 이유로 제명해 버렸으며 남동생이 신앙촌 안내원으로 있었는데 마귀동생이라 하여 안내원에서 제명해 버리기도 했다.  

그러자 동생들은 “형님, 신앙촌에서 나갑시다 형님같이 충성하는 자를 마귀라고 조롱하니 여긴 있을 곳이 못됩니다” 라고 하면서 모두 나가자고 졸라댔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아니야, 성경에 사랑하는 자를 징계한다는 귀절이 있지 않느냐, 하나님께서 몹시 사랑하시는 고로 징계하시는 것이야” 하며 동생들을 달랬다.

신앙촌 내에서 마귀로 찍혀 모두들 외면하는 고로 공장에도 나갈수 없고 공장의 물건도 팔 수 없었다. 그렇게 되자 이 사람 집에는 쌀도 떨어지고 먹을 것도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할수 없이 이 사람은 김포 큰아버지댁에 가서 쌀을 좀 빌려 달라고 사정했다. 그러자 큰 아버지는 “야 이 새끼야, 집 팔아서 신앙촌에 들어간 미친 자식이 무슨 낯짝으로 여기 와서 쌀 타령이냐!  너같이 정신 못 차린 새끼는 굶어 죽어도 마땅해” 라고 욕설만 퍼부었다.  

그래서 영등포에 사시는 작은 아버지를 찾아가서 말씀을 드렸더니 작은 아버지는 한 술 더 떠서 욕을 할 뿐만 아니라 발길로 차고 귀싸대기를 갈기는 고로 할 수 없이 울면서 돌아와야 했다.  

그렇게 박대를 받고 영등포에서 소사 신앙촌까지 차비가 없어 밤 늦도록 걸어와야만 했다. 걸으면서 이 사람은 하나님 저는 굶어도 좋으니 신앙이 없는 가족들은 한 사람도 버리지 말아 주옵소서하며 울면서 기도했다.  

신앙촌에 있는 집에 와서는 2층 골방에 올라가 하나님께서 불쌍히 보시고 죽게 된 인생들을 이 거룩한 땅에까지 끌고 오는 것을 허락하셔서 소사신앙촌에 입주를 시켜주셨사오니 이 열두 식구를 여기서 나가게 할 수는 없사옵니다. 부디 길을 열어 주옵소서라고 애원하는 기도를 하였다.  

가족들은 쌀이 떨어졌다고 아우성이었으나 돈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신앙촌 콜라 사이다 장사를 시작하다

다음날 아침 기도를 마치고 집을 나와서 영모님댁과 범박우체국을 지나 복숭아밭 있는 곳에 이르렀을때 영등포 당산동 지관에 있는 유집사라는 분을 만나게 되었다.  

그 분은 아들에게서 삼만 원을 받고 이 돈을 누구에게 맡겨서 이자를 받을까 곗돈을 놓을까하고 궁리 하다가 조중위님께 맡기면 가장 신용있겠다 싶어서 소사 신앙촌에 거주하고 있다는 말만 듣고 막연히 만나려고 오는 중인데 여기서 본인을 만나게 되니 참 잘 되었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유집사님께 고맙습니다 그러면 제가 알아서 이자를 드리고 필요하실 때 돌려 드리겠습니다하고 그 3만원을 받아 가지고 쌀 한 말을 사서 집에 들여 놓고 나머지 돈으로 짐싣는 화물용 일제 자전거를 하나 사 가지고 신앙촌 콜라 사이다 장사를 시작했다.  

당시 덕소 신앙촌에서 생산되는 콜라 공장에 병을 납품하는 온양제단의 정장로가 병납품 대금조로 콜라를 가지고 나와서 판매하고 있었는데 그가 콜라를 대주면서 팔아 달라고 하기에 장사를 하게 되었다.  

당시 이 사람의 생각으로는 무슨 물건이든지 신앙촌 물건으로 장사를 해야 되는 줄로만 알았던 고로 위에 시꺼먼 것이 둥둥 뜨는 신앙촌 콜라를 팔러 다녔던 것이다.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칠성 콜라 사이다와는 경쟁이 되지 않을 정도로 불리한 입장이지만 확신을 가지고 도전하고 또 도전하여 서울 시내 제과점 다방 구멍가게에까지 판매망을 넓혀갔다.  

처음에는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 어떤 주류 도매집에 가서 “신앙촌 콜라 사이다를 좀 팔아보시지요. 맛이 좋고 품질도 좋습니다” 며 판촉을 하였는데 주인이 콜라를 보더니 “이 새끼야, 이렇게 시커먼 것이 둥둥 뜨는 것을 사람 먹으라고 만들어서 상품이라고 팔러 다니는 거야!” 하면서 따귀를 갈기고 면박을 주며 내쫓았다.

 그런 모욕을 당하면서도 이 사람은 죄송하다며 90도 각도로 절을 하면서 속으로는 나 같은 마귀새끼는 이런 일을 당해도 마땅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는 자신을 고소하게 생각을 하고, 돌아 서서 다른 곳에 또 판매를 했다.  

그 이튿날 그 매맞은 집엘 가겠다고 하자 짐자전거를 타는 고용인 청년은 다시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그러나 이 사람은 억지로 데리고 다시 갔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집은 두 번 다시 가지 않겠지만 이 사람은 ‘나’라는 것이 개 같은 마귀새끼인 것을 아는 고로 너는 더 천대를 받아야 마땅해 가서 더 수모를 받아라 이 마귀새끼야하고 마음의 싸움을 하면서 매맞은 집으로 다시 갔던 것이다.  

그런데 뜻 밖에도 어제 이 사람을 때린 주인 아저씨는 반색을 하며 반가이 맞아 주는 것이었다. 과거에 자기도 자전거를 타고 장사를 다닌 시절이 있다는 그 아저씨는 젊은 청년이 먹고 살겠다고 장사하러 온 것을 안사면 될 터인데 괜히 사람을 때리고 구박까지 했다며 지난 밤 마음이 아파 잠을 못 이뤘다고 했다.  

그 때 이 사람은 “괜찮습니다. 신앙촌 콜라가 보기는 이래도 맛은 좋습니다. 한번 잡수어보세요” 하면서 병뚜껑을 따고 맛을 보라고 권했다.  

그러자 어제의 그 기세등등했던 사람은 미안했던지 콜라를 받아서 마셔보고는 “야! 맛이 기가 막히군, 젊은 친구가 장사를 해서 먹고 살겠다는데 어제는 내가 성질이 못 돼서 때리기까지 했는데, 그에 대한 사과로 이 콜라를 팔아 줄테니 우선 한 트럭분만 가지고 오시오” 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이후부터 차떼기로 판매가 되었으며 점점 판매망이 넓어지면서 기존의 널리 알려진 칠성콜라와 사이다의 판매가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칠성 회사측에서 사람을 보내어 이 사람을 스카웃 하려고 보수는 원하는 대로 줄테니 칠성에 와서 일 좀 해 달라는 제의를 해왔다.  

그러나 이 사람은 “내가 돈에 눈이 어두워 신앙촌 콜라 사이다를 그만두고 칠성콜라 사이다를 하게 되면 나는 배신자가 됩니다. 나는 굶어 죽으면 죽었지, 그 짓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칠성에서 온 그 사람은 “요새에도 선생님 같은 분이 있다니 정말 감격했다”고 말하였다.  

이 사람은 제과점만 하고 다방은 칠성에 양보를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칠성 측에서 이 사람 친구가 있으면 소개시켜 달라고 해서 “나는 별로 실력이 없고 내 친구 중에 유능한 사람이 있다” 며 친구를 소개하여 취직을 시켜주었다.  그 친구는 두병찬이라는 친구인데 내가 고학을 하면서도 세 학생의 학비를 대주며 공부를 시켰던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은혜를 숨기는 생활

이 사람은 하나님의 기막힌 사정을 알고는 늘 눈물을 흘렸다. 버스를 타도 눈물이 흐르는 고로 옆좌석에 앉은 손님이 부모님이 돌아 가셨느냐고 묻는 경우가 있어 항상 버스를 탈 때는 맨앞쪽 운전석 맞은 편의 좌석을 이용하곤 했다.  

그러나 운전수까지도 필시 부모님이 돌아가신 모양인데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그만 우세요하고 권면을 하는 것이었다. 그럴때면 할 수 없이 버스에서 내려 걸어서 목적지까지 가곤 했다.  

서울 시내를 다니다가도 하나님의 곤고하신 사정과 감사함의 은혜가 사무쳐 뼛골속에서 흘러 나오는 눈물을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는 근처 다방 화장실에 들어가 울었다.  

한참 울다 보면 문을 노크하는 소리와 함께 “손님, 빨리 좀 나와 주세요. 무슨 손님이 화장실을 이렇게 오래 사용하세요” 라는 독촉소리가 들리곤 했다. 그럴 때면 또 다른 다방 화장실로 옮겨가서 울기도 했다.  

하나님의 불쌍한 처지에 깊이 감동될 때는 너무 견딜 수 없어 남대문로 중구 필동을 통하여 남산으로 올라가 숲이 많이 우거져 인기척이 없는 곳을 찾아 거기서 밤새도록 통곡을 하다가 내려오곤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늘 울고 다녔던 탓에 눈두덩이가 부어 올라 옛날의 모습과 다를 정도였으며, 눈물이 어느 정도 나온 후에는 실제 피가 섞인 눈물이 나왔다. 흔히 피눈물을 흘린다는 말이 있는데 이 사람은 실제로 피눈물을 흘려 본 사람이다. 경인국도의 길은 이 사람의 피눈물로 이루어진 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은 소사 신앙촌이었으나 그곳에서는 발붙일 곳이 없었다.  

다행히 온양 전장로님의 배려로 콜라장사라도 하게 되었으나 그것 마저도 얼마 안가서 그만두게 되고 말았다.

 콜라 사이다 공장이 가동을 중단하고 공장을 폐쇄하게 되어 그 동안에 힘들여 개척한 판매망도 거래처도 소용이 없게 되어 할 수 없이 직업을 다른 것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다.  

전도관 식구들 모두가 조중위는 마귀라 하며 반목하고 질시했다. 그중 최수영 전도사만이 이 사람들 받아 주면서 예배보는 것을 허용하였으므로 이 사람은 최수영 전도사가 가는 곳마다 따라 다녔다.  

최수영 전도사가 중구제단에 있으면 이 사람은 중구제단에 가서 예배를 보고 남대문지관에 있을 때는 남대문지관, 신림동에 전보 발령 되면 신림동지관으로, 그 밖에 세검정지관과 도봉동지관 등 몇 군데나 옮겨 다니면서도 새벽예배에 매일같이 참석했다.  

아무리 멀어도 새벽공기를 헤치며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으며 그런데도 대개 예배 시간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면 예배가 끝나 제단 안이 텅 비어도 혼자 남아서 아침이 될 때까지 목을 놓고 엉엉 울며 기도 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런 중에도 30여 년 동안 새벽제단을 빠져본 사실이 없으며 하루도 전도를 안해본 날이 없었다. 이와 같이 매일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다 다리 난간을 들이 받아 개울로 나가 떨어지는 등 교통사고를 당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여전히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집과 가까운 제단이 얼마든지 있었지만 이 사람을 받아주지 않아 갈 수가 없었으므로 최수영 전도사가 있는 곳만 나가게 된 이 사람은 최수영 전도사와 밤을 새우며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면 향취가 나고 생수연결이 되어 이 사람은 “최전도사님과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를 하면 은혜가 연결되어 너무 좋습니다. 최전도사님께서는 은혜가 충만한가 봅니다” 하면서 최전도사를 부추기면서 늘 자신의 은혜체험을 숨기면서 지내왔다.  

그리고 영모님께서는 십의 구조를 바쳤다는 설교 말씀에 이 사람은 십의 십조를 바치는 생활을 했으므로 항상 돈이 없는 상태였으며 때로는 차비가 없어 걸어서 집에 가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가운데도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여 드리고 또 드려도 늘 아쉬운 마음뿐이었으며 이 생명까지 억천만번 기울이고 사는 상태였으므로 늘 빚으로 살아야 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해주시어 해결이 되는 체험을 수없이 하였다.  

콜라 사이다 장사를 그만둔 뒤 이 사람이 부양가족을 위하여 새로운 일을 찾고 있을 때 최수영 전도사의 소개로 강남 영동에 나가 고등학교 3학년생 10명 가량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런데 10명이 모두 서울대학에 합격되어 그 소문이 퍼져나가자 소문을 듣고 재벌 자녀의 부탁이 많이 들어왔다.  

돈은 달라는 대로 줄테니 자기네 자녀를 책임지고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리하여 남산국민학교 앞에 방을 얻고 을지로 2가 2층에 과외실을 마련하여 많은 학생들을 가르쳤다.  또 가르치다보니 학생들이 늘어나서 충무로 3가 등 여러 곳에서 과외지도를 했다. 덕분에 돈을 많이 벌었으며 그 돈으로 회사를 차리기도 했다.  

이 사람이 전도를 아주 열심히 하여 부흥이 잘 될 뿐 아니라 일요일 예배를 다녀갈 때마다 연보대 주머니가 두둑한 것을 본 최수영 전도사는 이 사람이 연보를 많이하는 줄을 아는 고로 많은 전도관 식구들이 조중위는 마귀라는 소문이 있어도 늘 받아주었던 것이다.  

이 사람이 이긴자가 되기까지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긴긴 세월을 두고 이루어진 것이다.  

 

영의 흐름을 깨닫다

소사 신앙촌 근처 광명리(지금의 광명시)에 종열이 엄마라는 아주머니가 정신이상이 생겨 전도관 교인 몇 사람과 이 사람이 정신병을 고치려고 간 적이 있었다.  삥 둘러 앉아서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를 보는데 갑자기 종열이 엄마가 방문을 박차고 뛰어 나가려 하면서 뜨거워서 견디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또한 영모님께서 축복하신 생수를 먹이려고 하면 피! 피! 하고 소릴 지르며 질겁을 하고 먹지 않으려고 온갖 애를 쓰곤 했다. 그리고 자기 남편을 보고 “얘야! 이 애비가 목이 타니 물 좀 떠와라” 하며 행동까지도 꼭 돌아가신 시아버지 행세를 하는 것이었다.  

또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꿉장난 하자며 아기 행세를 하는 등 여러 사람들의 행세를 순식간에 바꾸었다. 이것을 보고서 영의 흐름을 더욱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우리 몸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조상들의 영이 들어 있는데 ‘나’ 라는 주체의식의 영이 왕으로 군림하여 행세를 한다. 그런데 ‘나’ 라는 주체의식이 간혹 어려운 일을 당해 고민속에 깊이 빠졌거나 충격을 받았을 때는 ‘나’ 라는 주체의식의 영이 왕의 자리인 제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다른 영에게 주체의 자리를 빼앗기게 된다.

 조상들의 무수한 영들 중에서 다음으로 강한 한 영이 왕의 위치에 와서 앉게 되는 것이다. 그 때 왕의 위치에 앉게 된 영의 사람이 그 사람의 행세를 하다가 다시 또 바뀌어 다른 조상의 영이 앉고 하는데 이때 피의 쿠테타, 즉 영의 쿠테타가 일어남으로 미친 사람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다.  

그렇게 영이 바꿔 살 때에는 밥을 세 그릇 네 그릇을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는데 그것을 보아 밥을 많이 먹는다고 해서 배탈이 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증명이 된다고 느꼈다.  

그리고 며칠씩 굶어도 이상이 없으며 타이르고 친절하게 하는 것보다 야단을 치고 고통을 가하게 되면 현재 점령하고 있는 영이 하야(下野) 하여 영이 바뀌는 것을 보았으며 주위에 있는 사람 하나하나의 마음 상태까지 알아 맞추며 더구나 그 사람에게 몇 시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두 눈으로 보는 듯이 말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예배를 보고 나서 종열이 엄마가 축복한 생수를 피라고 하며 먹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것을 억지로 먹이고 다시 찬송을 힘차게 부르고 나니 심한 경련을 일으키면서 자기 정신으로 돌아 왔던 것이다. 이처럼 경련을 일으키는 것은 왕의 위치에 있는 다른 영이 왕의 위치를 물러날 때 영과 영이 결사적으로 싸우는 현상이다.

이 정신이상에 대한 치유는 현대의학이 아직도 정확하게 모르고 있으며 100% 고쳐지지도 않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이 익산군 금마 재건 중고등학교에 있을 때에도 희귀한 체험을 한 적이 있다.  최규탁이라는 학생의 집에 우환이 있어 동네의 유명한 무당들을 불러다가 굿을 한다고 하였다. 그 때 이 사람이 그 굿을 몇 시에 하느냐고 물으니 저녁 시간에 한다며 시간을 알려주었다.  

이 사람은 최규탁 학생에게 그 굿이 안될테니 두고 봐라고 말을 해주었다.  

저녁시간이 되자 무당들이 도착하여 옷을 갈아입고 멍석을 깔고 물을 떠 놓고 대나무도 갖다 놓고 분주히 준비를 하더니 드디어 정좌(正坐)를 하고 정성을 드리고 북을 치면서 일정한 리듬에 맞춰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30분, 한 시간, 두 시간이 가도 무당이 움직이지 못하고 주문 외우는 사람만 열심히 땀을 흘려 가며 북을 치며 주문을 외우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고는 주위에서 구경 온 사람들도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때 같으면 2-30분 안에 신이 내려 작두 위에서 춤을 추는 등 초능력을 보이는데 오늘은 무당이 꾸어다 놓은 보리자루 모양 그대로 앉아 있다가 몇 시간이 지난 다음 도저히 안된다면서 포기를 하고 일어서 버렸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기 저 쪽에 있는 전도관에 다니는 군인 때문에 굿이 안된다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만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어떤 사람을 만나면 괜히 기분이 나쁜 경험을 하게 된다.  

지난 83년도에 KBS에서 이산가족찾기 했을 때에 3-40년 만에 만나는 감격의 순간을 화면으로 보고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바라 봄으로써, 생각과 마음, 영이 움직이고, 생각과 마음과 영이 움직이면 피가 변하고, 피가 변하면 몸이 변하는 것을 증명해 주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태초의 아담과 해와에게 모방력이 있는 마귀의 영이 하나님의 모습을 모방하여 나타남으로써 그것을 바라본 아담과 해와인 하나님의 영이 마귀의 영에게 점령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하나님 즉 마귀를 이기신 하나님의 영이 담긴 분을 바라보면 하나님 영에게 점령을 당하게 되어 마귀의 영이 지게 되는 논리는 지극히 정확한 논리인 것이다.

이 사람은 일찍이 영모님께서 하나님의 신을 모시고 계신 분인 것을 깨닫고 초초로 바라보고 고도로 사모하고 생명을 바쳐 순종하는 생활을 1년 2년이 아니라 수 십년을 해왔다.  

더구나 마귀라 하여 발붙일 곳이 없는 가운데서도 게의치 않고 견뎌왔던 고로 하나님께서 조희성의 영을 죽이고 좌정하시게 된 것이다.  

너무나 하나님을 많이 바라보는 생활을 하였던 것이 증명되는 것은 이 은혜 역사를 하기 전에 소사 신앙촌집에서 서울로 버스를 타고 갈 때나 올 때 창문을 뚫어지라 바라보며 눈동자의 초점을 바꾸지 않은 것을 목격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윤성려 양은 이 사람을 잘 아는 고로 창문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을 목격하고는 창밖에 무엇이 있나하고 궁금하여 밖을 봤으나 아무 것도 없었다고 이 사람의 딸 지숙이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차만 같이 타게 되면 창문을 보게 되고 볼 때마다 이 사람이 창문밖을 보며 시선을 떼지 않았었는데 당시는 왜 그랬는지 몰랐으나 승리제단에 와서 이 사람의 말씀을 들어보니 영모님을 바라 보시느라고 그랬었구나하고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이 사람은 긴 세월을 두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고도로 사모하고 순종하는 생활로 일관하여 신의 분별 즉 영의 분별을 정확하게 하며 정코스를 걸어 온 것이다.    

 

육적으로도 당할 자 없어

 이 사람이 콜라 사이다 장사를 할 때 서울 거래처에서 수금을 하고 늘 밤늦게야 소사 신앙촌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한번은 수금이 잘 되어 거금을 가지고 달빛이 으슥한 밤 12시경에 집으로 돌아 오던 중에 강도를 만난 적도 있었다.  

찬송가를 부르며 하나님의 곤고하신 사정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소사 신앙촌 부근에 이르자 갑자기 강도 세 놈이 불쑥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칼을 들이대면서 “꼼짝말고 서라, 그리고 가지고 있는 돈을 몽땅 내놔라”고 하며 협박을 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타고 가던 자전거를 세우면서 큰 소리로 여유만만하게 “보아하니 너희 놈들은 칼 정도를 가지고 까부는데, 총을 가졌다면 몰라도 칼 정도로는 계산 착오야! 어디 한 놈씩 덤벼봐!” 하고 크게 호통을 치면서 도로 복판에서 싸울 자세를 취하고 버텨섰다.  

그러자 강도 세 놈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덤벼들지 못하고 주저주저하고 있었다.  

“덤비지 못하거든 저리 비켜!” 하면서 호통을 치고는 자전거를 끌고 태연히 앞으로 몇 발자국 걸어갔다.

놈들은 잠깐 우물쭈물하면서 옆으로 피하는 듯하더니 다시 덤빌 생각이 들었는지 도전적인 말을 걸어왔다. 이 사람은 다시 자전거를 고정시켜 세우면서 “너희들 오늘 잘못 걸렸어, 어디 덤빌테면 덤벼 봐!” 하며 자신만만하게 버티고 서서 그들에게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쉽게 덤벼들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면서 길 옆으로 비켜 섰다. 그 틈을 타서 다시 자전거를 끌고 신앙촌 쪽으로 계속 걸어갔는데 그들 역시 계속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마침 내리막 길에 접어 들어 끌고 가던 자전거를 재빨리 타고서 힘차게 페달을 밟아 속력을 내며 달렸다. 신앙촌에 다달아 신앙촌 경비들과 함께 뒤따라 오는 강도들을 찾아 나섰으나 그들은 어느새 도망가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사실 이 사람은 싸움을 해보지 않았지만 학생시절부터 기계체조 운동을 늘 하여 몸이 민첩할 뿐 아니라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 연단된 강한 마음으로 인하여 아무리 어려운 경지에 봉착해도 당황하지 않으며 판단이 흐려지지 않고 행동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한번은 군장교로 있었을 때 외출을 나왔다가 혼자서 깡패 열 다섯명과 격투를 벌여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종로 일가 화신백화점 양품부에서 장사를 하시는 이모님이 계셨는데 젊고 미모인지라 치근덕거리는 사내들이 많았다. 이 사람이 찾아 갔을 때도 한 건달녀석이 이모님께 괜한 시비를 걸면서 치근덕거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이 사람은 그 사내의 멱살을 잡고 끌어내어 계단 아래로 내동댕이쳤다. 놈은 위기에 처하자 “형님!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테니 제발 살려주십시오”라고 사정하였다.  

그래서 보내 주었는데 조금 후 열다섯 명쯤 되는 패거리를 데리고 와서 이 사람을 죽인다고 덤벼들었다. 숫자가 많은 고로 처음엔 몸을 피해야겠다고 달음질쳤다.  

그러나 한참 정신없이 달음박질을 치다가 보니 막다른 골목에 부딪쳐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골목벽을 등지고 15명의 깡패와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깡패들은 모두 손에 단도칼을 들고 있었지만 이 사람은 아무 무기도 없이 맨주먹으로 그들과 격투를 벌여야 했다.  

칼을 휘두르며 한꺼번에 십여 명이 날쌔게 덤벼드는데도 이 사람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공격해 오는 상대들을 맨 주먹으로 막아냈다.  

평소 발차기 연습을 비롯해서 운동을 많이 하였던 고로 이 사람의 발에 한 방 맞으면 아무리 장사라도 나가 떨어질 정도로 강한 발길질과 펀치가 있었다.  

발과 주먹으로 달려드는 패거리와 한참 싸우다보니 십여 명은 근처에 쓰러져 있고 나머지 놈들은 도망치고 있었다. 그 때서야 이 사람은 바지 가랭이가 몇 군데 칼에 베어져 있다는 사실과 주위에 구경꾼들이 몰려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구경하던 사람들의 신고에 의해 헌병 백차가 와서는 이 사람을 헌병대 본부로 데려갔다. 마침 당시에 헌병들이 한참 동안을 이 사람의 싸움 모습을 보았던 모양이었다.  

“장교님, 언제 그런 무술을 배우셨습니까? 정말 멋있었습니다.” 하고 감탄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마침 당시에 헌병대 상급기관에 집안 아저씨뻘 되시는 분이 계셔서 더이상 조사 받지 않았다. 헌병들은 헌병 백차로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옛날 우리 속담에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부딪쳐도 정신을 잃지 않고 여유를 가지면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소사 제 1 신앙촌에서 덕소 제 2 신앙촌으로 공장과 교인들이 거의 옮겨가고 영모님께서도 덕소로 가시게 되자 소사 신앙촌은 기강과 질서가 무너져 말이 아니었다. 신앙하는 사람들이 모인 마을답지 않게 술 담배가 성횡하고 밤늦게 고성방가가 난무하였다.  

그 때 이 사람은 영모님께서 피와 땀의 결정체로 이뤄 놓은 신앙촌인데 이렇게 기강이 문란하고 질서가 무너질 수 있는가하는 애석한 마음을 가지고 이제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기강을 바로 잡는 데 나섰다.  

그래서 누구든지 신앙촌에 거주하고 싶은 자는 모두 오만제단에 나가야 하며 술과 담배를 끊으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우선 신앙촌에 살고 있는 깡패들을 붙잡아서 그들을 전도한 뒤 새벽마다 청년들을 시켜 그 강패들을 깨워 오만제단에 데리고 오게하였다.  

그 다음에는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며 신앙촌 거리를 지나가거나 담배를 피우며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 아무리 체구가 크고 힘이 센 사람일지라도 단호하게 훈계를 하였으며, 그것이 먹혀 들어가지 않을 경우엔 거의 죽을 지경으로 두들겨 패서 혼을 내주곤 하였다.  

그 소문이 퍼지자 자연히 신앙촌 거리를 지나갈 때만은 술을 먹고 비틀거리거나 담배를 물고 가는 추태가 없어져 서서히 기강이 바로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강력하게 휘어잡자 일부 불만을 가진 자들이 인근 파출소에 가서 불평을 늘어 놓아 파출소에서는 이 사람을 불러서 이모저모 따져 물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당신네들이 하셔야 될 일을 대신해 드리는데 왜 그러시느냐며 신앙하는 사람들이 모인 마을에서 술 담배가 허용되고 고성방가와 깡패들의 패싸움이 있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 후 파출소와 서로 협조하여 계속 신앙촌 마을의 정화작업을 해 나갔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예비군이 창설될 무렵, 소사 신앙촌에서도 예비군을 창설해야 했는데 신앙촌 청년들은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모여든 사람들이고 자기 개성이 강한 사람이 많아 이들을 통솔해 나갈만한 인물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 때 조중위가 아니면 통솔할 자가 없다면서 당시 천부장과 한영순 권사 등 신앙촌 간부들이 찾아와서 예비군 창설에 협조해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사람이 예비군 중대를 조직하여 거칠고 말썽꾸러기들인 신앙촌 청년들을 완전히 장악하여 맹훈련을 시켜 경기도에서 가장 모범적인 예비군 부대로 만들어 표창도 여러 번 받은 바가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걸고 지켜

이 사람은 일찍이 생활 전반에 걸쳐 빈틈없이 살고자 애썼으며 또한 사회에 봉사하고 나를 희생하는 것을 보람으로 느끼며 살아왔다.  

학생시절에는 고학을 하면서도 친구의 학비까지 대줄 만큼 고생을 사서 하기도 했으며, 장교시절에는 고된 군생활에도 불구하고 야학을 운영하여 못 배운 젊은이들을 무료로 가르치기도 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가는 곳에는 학교가 세워지고 전도관이 부흥되는 것이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아주 철두철미하여 마음으로도 흐린 생각을 안하려고 애를 쓰고 기를 썼던 것이다. 어쩌다 흐린 생각을 하게 되면 자신에게 “이 마귀새끼야, 너 같은 새끼는 죽어버려! 왜 그따위 생각을 해!” 라고 하면서 머리를 시멘트벽에 들이 받은 적이 수백 번이 넘었다. 그럴 때마다 뇌진탕 직전에서 한 두 시간 동안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곤 했다.  

사실 이 사람의 집안 내력을 볼 때 대머리가 없었는데 너무 자주 머리를 벽에 들이받다 보니 머리가 부어 올랐다 가라 앉았다 하면서 머리카락이 빠져 대머리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은 평생 동안 낮잠을 자 본 일이 없었다.  

특별히 할 일이 없거나 여유가 있을 때면 남의 집 마당이라도 쓸면서 시간을 보냈다. 낮잠을 자거나 쓸데없이 잡담을 하면서 노닥거리지를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몸이 아파도 방에 들어가 눕거나 안일한 마음을 갖지 않았다. 몸이 아프면 오히려 “이 놈의 마귀새끼야 잘 되었다, 너는 아파 거꾸러져라” 고 하면서 자신을 고소하게 생각하고 평소보다 더 힘든 일을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하다보면 언제 아팠더냐는 듯이 아픈 것이 없어져 버리는 체험을 하였다. 특히, 영모님 말씀이 하나님 말씀 임을 아는 고로 내 생명보다 억천만 배 더 귀중히 여겼던 것이다.  

영모님께서 기도가 끊어지면 안 되니 항상 기도를 하라고 말씀 하신 적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고지식하면서도 한편 순진한 면이 있었던 고로 그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려 했다.  

그런데 깨어 있을 땐 물론 기도를 할 수 있었지만 잠잘 때는 어떻게 기도해야 될 지 아주 난감했다. 궁리 끝에 이 사람은 잠자기 전에 먼저 기도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꿈에서도 기도하는 꿈을 꾸게 되고 안찰받는 꿈을 꾸면서 한 시도 하나님을 잊어 버리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루도 빠지지 않고 꼭 기도를 한 뒤 잠자리에 들었으며, 기도를 할 때마다 응답이 되어지는 확신 속에서 잠을 잤다. 기도시에는 꼭 빠지지 않고 하나님 잠잘 때 호흡하는 것마저 기도하는 것으로 쳐 주시고 맥박이 뛰는 것마저도 기도로 쳐 주셔요 하면서 간절한 심정으로 매달렸다.  

밤이나 낮이나 기도가 끊이지 않는, 그야말로 기도로 일관된 생활을 함으로써 늘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된 것이다. 유사 이래 이 사람만큼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로 일관된 생활을 한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것이다.  

일반 사람들 마냥 술에 물탄 듯 물에 술탄 듯 미지근하게 적당주의로 신앙생활을 했다면 결코 이긴자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영모님이 단상에서 하신 말씀은 정말 하늘이 두 쪽 나도 그대로 지키려고 애썼으며, 하나의 지상명령으로 여기면서 순종했다.  

영모님 말씀이 하나님 명령임을 아는 고로 그대로 살지 않으면 큰 일이 나는 줄로 믿었던 것이다. 자신에게는 물론 다른 사람들마저도 하나님 말씀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 용납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것은 하나님이 당하고 있는 억울하고도 기막힌 사정을 너무나 잘 아는 고로 상대적으로 마귀에 대한 적개심이 불타 올랐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 사람은 죄라면 이가 갈리고 치가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생활했다.  

 

전과5범 사기꾼의 개과천선

이 사람은 이긴자가 될 때까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내 마음 같은 줄 알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아주 잘 믿었다. 그런 까닭에 사기를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번은 군생활 11년간의 퇴직금을 몽땅 사기당한 적이 있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몇 년 뒤 이 사람의 돈을 사기친 사람을 우연히 길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금방 얼굴색이 창백해지면서 어쩔줄 몰라했다.  

그 때 이 사람은 아주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을 시킨 뒤 식사라도 하고 가라며 식당으로 데려갔다. 식사 도중에 이 사람은 그 사기꾼에게 얼마나 어려웠으면 그런 짓을 했겠느냐며 그 당시 이 사람 역시 너무 어려운 처지라 아주 난처했으나 지금은 발등의 불은 끈 셈이니 그 돈은 굳이 갚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는 “정히 갚고 싶으면 여유가 될 때 갚으세요. 당신이 쓴 것이나 내가 쓴 것이나 매한가지니까 너무 큰 부담감은 갖지 마세요” 하면서 오히려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그러자 이 사람에게 사기를 친 그 사람은 황송해하며 쩔쩔매면서 몸둘 바를 모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자기의 전직이 학교 교사였으며 사기 전과 5범의 불명예 기록을 가지고 있다고 실토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 참으로 형님과 같은 인격자는 처음 만났습니다라며 이후부터는 형님이라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며칠 후 그는 돈을 신문지에 싸가지고 이 사람을 찾아왔다. 이 사람은 그 돈을 안 받겠다며 거절했다. 왜냐하면 그 며칠 사이에 어디서 갑자기 그 돈을 벌어 왔을 리가 없으며 분명히 또 다른 사람에게 사기쳐서 가지고 온 돈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이 돈을 마련하느라고 애를 많이 썼겠지만 또 다른 한 사람이 사기를 당하여 가슴 쓰린 고통을 받아야 할테니 그 사람에게 다시 돌려 주세요. 그런 일이 있었을 때는 매우 어려웠으나 지금은 그 돈이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나는 한번 쓰라림을 맛보았으니 나로써 끝나야치 또 다른 사람을 괴롭혀서야 되겠어요? 꼭 그 돈을 갚고 싶으면 구멍가게라도 해서 몇 년이 걸려도 좋으니 직접 돈을 벌어 갚도록 하세요” 하였다.  

그 사람은 한참 동안 회한과 감동의 눈물을 흘린 후 그 돈을 도로 갖고 갔다. 그리고 정말 구멍가게를 해서 돈을 벌어 그 돈을 갚았으며 그 뒤 공장을 세워 일약 떳떳한 사장으로 변모하였다.  

인간은 원래 악한 사람이 없으며 누구든지 참된 교육과 은혜를 입으면 개과천선될 수 있다는 중요한 실례가 되는 일이었다.  

평소에도 이 사람은 학생들이나 교인들에게 도둑을 맞거나 사기를 당하면 그러한 일을 계속 고민하고 아까와서 속상해 하지 않고 얼마나 없으면 그와 같은 짓을 했겠느냐 네가 쓴 것이 내가 쓴 것이다라고 생각을 돌려먹고 잊어버린 뒤, 이제라도 다시 새 출발하는 심정으로 노력을 했다.  

사실 새 각오로 돈을 버는 것이 현명하지, 돌아오지도 않을 것을 계속 속상해하고 싸우게 되면 자신의 피만 더욱 탁해지고 썩어서 늙고 병들게 되며, 결국 죽게 되고야 마는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이 인도하는 생활

이 사람은 늘 하나님께 순종하며 감사하는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만 살았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좌절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활하니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 사람과 함께 동행하시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어디를 가든지 따라 다니시는 것을 체험했던 것이다. 한번은 서울 신당동에 산다는 김모 씨의 집을 주소도 없이 찾아간 적이 있었다.  

사실 주택이 워낙 빽빽하게 들어선지라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할 수 없는 곳을 주소도 모르고 찾기란 뜬 구름잡는 격이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이 사람은 하나님만 믿고 늘 바라보이는 영모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갔던 결과 그 집을 수월히 찾을 수가 있었다.  

길이 두 갈래 세 갈래로 나뉘어져 있으면 바라보이시는 영모님께서 지시를 해 주셨는데 우측을 가리키면 우측으로 가고 좌측으로 가라하면 좌측으로 가다보니 어느덧 어느 집 대문 앞에 멈춰서게 되었다. 문패를 바라보니 내가 찾고자 했던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상상할 수 없는 일까지도 해결해 주셨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을 느끼면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김씨는 깜짝 놀라며 여기로 이사온 후 집을 아는 사람이 없는데다 주소도 가르켜 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 왔느냐며 의아해 했다.  

그런데 당시 이 사람은 영모님께서 말하지 말라는 지시를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알려 주셨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던 터라  당신이 이 집으로 올 때 몰래 뒤따라 와서는 집을 알아 두었지요하면서 거짓말을 하였다.  

그러한 확신 속에 사니 한 치의 헛점도 없는 온전한 생활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이 사람을 찾아 왔다.  하루는 어떤 낮선 아주머니가 이 사람 사무실을 찾아와 자신이 처해 있는 입장을 털어 놓으면서 도와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육군 장교라고 밝히면서 평소 남편으로부터 조선생님에 대한 말씀을 자주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인격을 믿고 어려운 부탁 말씀을 드리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며 자초지종을 털어 놓았다.  

다름이 아니라 남편의 군동기생들의 부인들끼리 친목도모로 모임을 가져오던 중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전속 발령을 받고 멀리가 있으나, 아이들 학교 교육 때문에 이사할 형편이 못 되어 아이들과 지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가끔 한 번씩 다녀가는 형편이라고 했다.  

그런데 친목회에 참석했다가 일시적으로 외간 남자들과 서로 어울리게 되었는데 마침 게임중에 잠간 파트너가 되었던 남자가 그녀의 집 근처에 사는 사람이었다.  

그 남자는 짓궂은 면이 있어 남편이 집에 잘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전화를 하거나 집에 찾아 오는 등 자꾸만 괴롭히는데 아무리 말려도 막을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 사실을 남편이 알게 되면 가정파탄은 물론이거니와 총살사건이 벌어질 것은 뻔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몇날 몇일을 고심하던 끝에 이 사람을 찾아왔다면서 친목회 부인들과도 의논을 해 봤지만 뚜렷한 대책이 없어서 이처럼 복잡하고 골치 아픈 일을 조용히 해결해 주실 분은 조 선생님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 오게 되었습니다며 도와 달라고 했다.  

그리하여 이 사람이 가서 연극을 하면서 그 못된 남자를 얼씬도 못하게 호통을 치고는 아무런 말썽없이 단념하게 한 사실이 있었다.  

한때 이 사람은 을지로에서 인쇄업을 하기도 했으며 시청 앞에서 복사기를 놓고 복사 겸 제본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종교계의 대정리 작업을 한 적이 있었는데, 신흥 종교에 관계가 있는 모씨가 전도관을 붕괴시키려는 목적으로 전도관을 비방하는 내용들로 보고서를 작성하여 그것을 하필이면 이 사람이 경영하는 복사기 집에 복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  

그래서 복사하러 온 아가씨에게 복사를 해 놓을테니 맡겨놓고 나중에 오라고 한 다음 내용을 다 검토한 뒤 똑 같은 것을 하나 더 복사하여 사람을 시켜 영모님께 보냈다.  

그 당시 전도관에서 이 사건을 해결한다고 하였지만 실제는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이었던 이 사람의 동기생 차모를 통하여 대통령에게 올라가는 서류 중 전도관에 대한 것을 빼버리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결정적으로 위급한 상황에서 이 사람은 이름없이 숨어서 해결하였지 드러나게 일을 해서 공을 차지한 적이 없었다.  

아현동에 매장을 두고 젊은 청년들을 고용하여 리어카와 자전거에 비닐로 짠 각종 방석을 포함하여 신앙촌 제품들을 판매하기도 했으며 또 일요일이면 의무적으로 모든 종업원들로 하여금 전도관에 나가게 하기도 했다.

또한 수십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공장도 경영해 봄으로써 다양하게 이긴자를 배출하는 연단을 받았던 것이다.

 이사람은 베이클라이트(합성수지) 공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그 당시 청계천 도매상에 물건을 조금씩 팔았는데 한 도매상에서는 절대 이사람 물건을 안 받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사람은 그 점포 옆에다가 점포를 얻어 공장도 가격으로 물건을 싸게 팔았다.  

그랬더니 얼마 안 있어 그 도매상이 망해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도매상이지만 그들도 이윤을 붙이고 팔아야 하는데 공장에서 직접 파는 가격에는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소문이 나자 각 도매상 주인들은 서로 이사람 물건을 달라며 이사람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하였다.  

한번은 고무공장을 했는데 기차표 고무와는 질도 떨어지고 해서 경쟁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큰 어려움없이 회사를 키울 수 있었다. 그러나 대개 사기를 당해 얼마 안 있어 빈털털이가 되곤 하였다.  

그리고 한때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무장으로 일하면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을 도와 법정에서 직접 변호함으로써 변호사도 놀랄 정도의 실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한때는 청운동 모 가정집에서 매주 수요일 일요일에 교인 30여 명을 모아 놓고 예배를 보았는데, 선천성 앉은뱅이 벙어리 소아마비 장님들을 고쳐주는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병을 고쳐줄 때에는 누가 고쳐 주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약속을 받고 고쳐주었던고로 소문이 나지 않게 은밀히 숨어서 역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이 사람은 어떻게 하면 전도관 진리를 국민 모두에게 알려서 하나님의 뜻을 속히 이를 수 있을까 하는 일념으로 차 있었다.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신 후 박근혜 양의 역할이 커짐에 따라 청운동 역사를 통하여 알게 된 박근혜 양의 비서실장이 박근혜 양을 도울 수 있는 스승을 구한다는 말을 듣고, 전도관 교인을 들여 보내려고 알아보다가 덕소 신앙촌의 홍교장 선생님의 따님이 숙대 교수로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분을 만나 간곡히 부탁하여 보았으나 승낙을 얻지 못하여 무산된 적도 있었다.  

이 홍교수에게 박근혜 양을 보좌해서 일해 주시고 또 박양의 아버지인 박대통령에게 암병이 있는데 이 사람이 책임지고 고쳐 주겠으니 이 사람에게 박대통령을 만나게만 해 달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 사람이 박대통령의 암을 고쳐주면 전도관 진리가 명실공히 전 국민에게 확산되고 튼튼히 뻗어 나가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홍교수에게 애원해도 홍교수는 높은 사람들의 자녀를 가르치는 것이 힘들다면서 끝내 사양하였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물색해 보았지만 마땅한 사람을 찾을 수 없어 그 계획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가 생긴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이 사람이 드러나서 일을 하면 이긴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중에 깨달은 것이지만 이와 같이 이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움직였지 언제 사사로움을 따라 움직여 본 적이 없었다.  

성경 말씀 가운데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대로 안 보이는 곳에서 희생과 정열을 하나님께 바쳤던 것이다.

 

5.16군사혁명 이후 육군장교로서 그리고 전도사로서의 행적

군 영창에도 가고 재판도 받아

논산 훈련소에서 독도법 교관으로 있을 때 하루에 300명씩 이사람 앞에서 교육을 받았다. 교육을 일찍 끝내고 박태선장로와 전도관에 대한 진리 이야기를 하였다.

그런데 훈련받는 사람중에는 신학교 졸업생, 재학생 및 목사, 전도사였던 자가 있어 군종참모에게 연락이 되고 또 그 위의 높은 사람에게 이 사실이 보고되어 이 사람이 불려 가서 구두발로 정강이를 차이고 호된 따귀를 맞으며 주의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조금도 굴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신병교육중에 전도관 진리를 전도하니 군 영창에 집어넣고 재판까지 받게 하였다.

당시 낮에는 신병을 훈련시키며 전도하고 밤이면 마을 청년들을 모아 중고등학교 과정을 가르치면서 전도관을 개척하였다. 때로는 장교복을 입은 채 북을 치며 전도를 하니, 군 장교의 체면과 위신을 손상시키고 특정 종교를 전도한다하여 영창에 가두고 재판을 받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재판정에서 이 사람은 “국가 재건 최고회의 의장의 지휘 각서 0조 0항의 ‘모든 지도자 위치에 있는 군경(軍警)들은 주민들을 계몽, 교화하라’는 명령에 의하여 청년들을 교육시키고 교화한 것이 무슨 죄가 됩니까?”라고 스스로 변호하니 훈련소장이었던 백소장은 당황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이 사람을 무죄 판결하여 석방시켰다.

그때 이 사람을 구타하고 영창에 집어넣었던 기성교회 장로들인 중, 대령과 백소장은 혹시 이 일로 자기들의 신분이 위태로와지지 않을까 염려하여 이 사람에게 선물도 보내고 음식도 대접하려고 하였으나 이 사람은 같은 군인으로서 개인적인 앙갚음으로 선배 장교님들의 앞길을 가로막을 짓은 절대 하지 않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가는 곳곳마다 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개척

이 사람은 가는 곳곳마다 학교를 세우고 전도관을 세우고 틈만 있으면 전도를 하여 서울 시내에 안들어 간 집이 없을 정도였다. 논산에서도 낮에는 군영생활에서 군인들을 훈련시키고 퇴근하여 밤늦게까지 민간인 학생을 가르치는 것을 계속해 나가니까 잠잘 시간이 없을 정도였다.

잠을 제대로 못자므로 피곤이 겹쳐 어느 날은 늦잠을 자고 급히 서둘러서 출근하는 바람에 이부자리를 살펴보지 않고 나갔는데 전 날 밤 코피를 쏟아 베개가 온통 피범벅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이 사람이 5시가 되어 군무를 마치고 퇴근하여 10리 길을 구보로 뛰어 재건학교에 도착하니 전학생 2∼300명이 이 사람을 부등켜 안고 통곡을 하며 울먹였다.

이 사람이 “왜들 이러느냐? 무슨 일이라도 생겼느냐?”고 의아해서 물어보니 코피로 물들은 이 사람의 베개를 들고 와서 부등켜 안고 다시 우는 것이었다.

당시의 학생들 중에는 전쟁으로 부모를 잃어 공부를 못한 학생도 있지만 전란으로 어려워져서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불우한 학생들도 많이 있었다.

부모도 가르치지 못한 배움의 길을 돈 한 푼 받지 않고 가르치시는 선생님, 낮에는 군무에 시달리시고 밤에는 피곤하신 몸을 이끌고와 가르치시는 선생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어떠한 여건에서도 매일 군인선생님의 모든 개인 사정을 송두리채 버리시고 우리를 위하여 수고를 하시는 선생님, 너무도 힘드시어 코피를 흘리시면서도 저희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또 다시 강단에 서 주시는 선생님을 뵈올 때,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며 또한 선생님의 건강 사정이 너무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워 눈물이 흐른다고 하면서,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이 엉엉 소리내어 통곡바다를 이루는 것이었다.

상수중학교: 현 조양중학교

이런 위대한 선생님을 모신 것이 진정 가슴뿌듯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설사 우리를 죽음의 길로 끌고 간다 해도 선생님께서 가자시면 기꺼이 가겠다며 굳은 결심을 하는 것이었다. 그후 300명의 학생들이 배움에 더욱 열성적이고 적극적이 되었으며, 흙벽돌을 찍어 학교와 전도관 제단을 건축하는데 헌신적으로 협조하였다.

이후 금마일대에 전도의 불길이 일기 시작하여 제단이 크게 발전되었던 것이다. 당시 기성교회 황박사라는 목사가 부흥집회를 한다기에, 이 사람도 참석하였는데, 설교 시간중에 자신만만한 어조로 성경에 대하여 질문을 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사람이 죽는 것은 죄값으로 죽게 되었다고 성경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죄가 우리 인체 어디에 존재하고 있습니까?”고 질문을 하였더니 당당하게 단상에서 외치던 목사가 많은 기성교인들 앞에서 제대로 답변을 못하고 얼버무리는 고로 “죄는 피속에 있습니다”하고 가르쳐 주니 그는 부흥집회에 모인 교인들에게 망신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 외에 두세 가지 질문을 더 하였는데, 결국 이 질문 바람에 부흥이 아니라 해산이 되어버리는 기현상이 일어났으며 전도관으로 많은 교인들이 돌아오게 되었다.

재건중고등학교 개교기념식, 1962년 8월 6일

이 사람이 논산 훈련소에 근무했을 때 세운 학교가 전라북도 익산군 금마면 동고도리의 금마재건 중고등학교였는데, 지금은 공립 익산 중고등학교로 발전하여 현재도 수많은 학생들을 배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파주의 마지 감리교회, 양주군 남면 상수장로교회, 상수 중학교, 또한 임진강 옆 백학장로교회, 동두천 안흥리의 농축기술 중고등학교(현재는 신흥 실업 중고등학교로 변모), 경기도 파주군 일동면에 일동중학교 등을 세웠다.

전남 광주에서는 OBC교육 갔을 때 당시 기성교회에 다녔던 장창익집사와 힘을 합쳐 상명여자고등학교를 세웠으며, 이 외에 전도관도 곳곳에 세웠던 것이다(개봉동제단, 도봉동제단, 금마제단, 수궁동제단 등등).

 

신비로운 초능력을 행하다

이 사람이 온양제단에 있었을 때 일주일간 부흥집회기간을 정하고 부흥회를 했는데 계속 비가 와서 집회에 지장이 많으므로, 단상에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 감람나무 가지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하고 간절히 기도한 후 비가 멈추었으니 밖에 나가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쏟아졌던 비 때문에 계속 창문을 타고 빗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보고 장로들이 비웃으며 인정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단상에서 내려와서 밖으로 나가 온양만 비가 오지 않고 둔포,성환, 천안, 예산등 주위를 돌아가면서는 비가 오고 있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제서야 교인들이 모두 놀라는 것이었다.

또 향취가 진동하고 이슬 같은 은혜가 쏟아지니 온양의 지방유지들이 많이 전도되어 큰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 사람은 음란죄를 짓고 오는 사람에게는 뱀냄새가 나고 도둑질을 하고 오는 사람 몸에서는 구린내가 나는 것을 맡을 수 있었다.

이효성이란 청년교인이 음란죄를 지었어! 하고 지적을 하니 그 청년이 그것을 어떻게 아세요하며 얼굴이 빨개지면서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다음부터는 그런 짓 하지 말라고 타일러 주었는데 쑥스러워서인지 그 후 제단에 나오지 않았다.

또 다른 청년에게서 구린내가 나므로 “너, 왜 도둑질을 했어?”하니 “안했어요” 하므로 “잔소리 하지 말고, 어디 숨겨 놨어?” 하며 호통을 치니 “저기 숨겨놨어요.” 하며 바른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아세요?” 하면서 무서워서 제단 출석을 하지 않는 고로, 다음부터는 지적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바라 보이는 하나님께서 지적을 하지 말라고 하시므로 그 후부터는 냄새가 나도 일체 지적을 할 수가 없었으며 알면서도 모르는 것같이 지내 오기를 수십 년간 해왔다. 이 사람에게는 이미 오래 전에 그런 능력이 있었다.

이 사람이 제주도에서 신병훈련을 받고 있었을 때 훈련병 중에서 돈을 잃어버린 자가 있어 중대원 전원이 단체기합을 장시간 받게 되었다. 한참을 엎드려 있어도 범인이 나타나지 않아 모두들 고통이 심하므로 이 사람이 벌떡 일어나 나가서

“중대장님, 제가 도둑을 잡을테니 기합을 면하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네가 봤어?”

“안 봤습니다. 그러나 300명 훈련병 전원을 제 앞으로 1m 간격으로 한 명씩 제 눈을 바라 보고 지나가도록 해 주시면 제가 잡아 내겠습니다. ” 하니 중대장이

“너, 못잡으면 죽어” 하며 그렇게 하라 하였다.

그래서 내 앞으로 150명쯤 지나가는데 구린내가 나는 자가 있어

“중대장님, 바로 이 놈입니다” 하니 그 훈련병이 이 사람 멱살을 잡고 아니라고 우기며

“이 자식이 괜히 생사람 잡는다” 고 펄펄 뛰며 날뛰는 고로 냄새난다는 소리는 하지 못하고 “내가 봤어!”하였다.

그러자 중대장이 사람을 시켜 도둑질한 훈련병의 자리 밑에서 돈을 찾아냈다. 그 사건 이후 이 사람은 훈련병들 사이에서 귀신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다. 이와 같이 이 사람은 벌써 20대에 냄새로 음란죄인, 도둑질한 죄인들을 구별해 내었던 것이다.

이 사람이 온양전도관에서 시무했을 때 제단에 있지 않고, 제단과 좀 떨어진 마을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매일 새벽 제단에 가는데 하루는 지름길을 철조망으로 막아 놓아 돌아서 가다가 늦게 도착하여 단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자 좋지 않다”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갔다.

그런데 그 이튿날 그 철조망친 집의 12살짜리 외아들이 멱감다가 물에 빠져 죽어 버렸다. 이 죽은 아이의 부친은 평소 전도관이라면 괜히 싫어하고 못마땅 하게 여기다가 급기야는 그 길이 자기 농토 안에 있는 땅이라는 핑계로 길을 막았던 것이다.

그 집안의 기막힌 사정과 애곡소리를 듣고 이 사람이 찾아가서 “그 아이를 제가 책임지고 살려 줄 테니 그 아이 시체를 달라”고 하니 더욱 펄펄 뛰며 미친 소리 하지 말라고 하며 기어이 거절하는 고로 돌아오고 말았다.

뒤에 들으니 동네 유명한 무당을 불러와서 자리걷이 (푸닥거리)를 하니 그 무당말 “이 아이는 전도관 전도사를 미워하고 길을 막았기 때문에 죽었으니 가서 용서를 구하면 아이가 살 수도 있다”고 하였으나 그 때는 죽은 지 사흘이 지나 시체가 이미 썩어가는 상태인지라 어찌 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남을 비방하거나 저주하는 말을 절대 하지 않았다.

단상에서 말씀을 하게 되면 말씀이 씨가 되어 그대로 이루어지므로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세상 말에도 ‘여자의 악담에는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흔히 ‘빌어먹을 자식’이니 ‘망할 자식’ 등의 욕을 하는데 이는 우리 모두가 고쳐야 할 말버룻이다.

‘아이구, 힘들어 죽겠네’ , ‘좋아 죽겠네’, ‘더워 죽겠네’, ‘추워 죽겠네’ 등등 ‘죽겠네’로 끝을 맺는 우리들 말이 씨가 되어 모든 인류가 죽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고쳐서 해야 되는데 말끝마다 ‘영생하겠네’ 또는 ‘살겠네’로 고치든지 ‘죽겠네’ 소리를 안 하든지 해야 되는 것이다.

 

 단에 서지 말라는 영모님의 명령에 순종하다

조희성 중위

온양제단에서 시무하는 동안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뿐만 아니라 비를 멈추고 냄새로 죄를 지적하는 등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역사를 하게 되니 하루는 영모님께서 부르셔서

“단에 서지 마라 ! 단에 서면 이긴자가 될 수 없어! 조중위는 내가 장차 세계에서 제일 큰 단에 세울거야!” 하심으로

“네, 알았습니다” 하고 온양으로 돌아가서 단에 서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전 교인이 들고 일어나서 장로를 중심으로 곳곳으로 다니며 조전도사가 온양제단을 떠나면 온양제단은 문을 닫는다고 이야기하였다.

결국에는 영모님 앞에까지 가서 조전도사를 떠나 보내면 온양제단은 문을 닫게 되니 조전전사를 온양제단에 그냥 있게 해 달라고 애원을 하게 되니 영모님께서도 마지 못해 허락하셨던 것이다.

그렇지만 영모님의 눈치가 다르고 또한 하나님의 숨은 사정을 아는 고로 이 사람은 얼마간 시무하다가 기회를 봐서 몰래 온양제단을 떠나오는데 어떻게 알고 역전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아쉬운 석별의 전송을 해 주었다.

그 와중에 한 학생이 달리는 열차에 몸을 날려 자살한 일이 발생 하였다. 이런 일은 일동중학교를 떠날 때도 있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못한 공부를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이 없는 세상은 살기 싫다면서 죽음을 택한 학생이 있었던 것이다. 그 후로는 일체 드러내지 않고 평신도로서 지내게 되었다.

언젠가 조성옥 전도사가 논산 연무대 제단에 있었을 때인데 전도가 안된다 하여 이 사람에게 대신 단에 서 달라고 하므로 이 사람이 몇 번 단에 서게 되니 은혜창파가 되고 부흥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성옥 전도사가 하나님의 깊은 사정도 모르고 영모님께 가서 “조중위 전도사를 다른 사람들은 마귀라 하지만 제가 볼 때는 마귀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 단에 서게 허락해 주십시오” 한 바 있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 한번은 몇몇 전도사들이 영모님께 “조중위를 상대해도 되겠습니까?” 하고 여쭌 적이 있었는데 영모님은 “너희들, 조중위 만큼만 믿어!” 그리고 “이 소리 조중위한테 가서 하지마.” 하신 바 있다고 그 소리를 조성옥 전도사가 이 사람한테 와서 전해 준 일도 있는 것이다.

언젠가 소사 신앙촌 강대헌 장로댁 앞에서도 영모님께서 이 사람에게 “장차 세계에서 제일 큰 단에 세워 줄거야! 그 때까지 드러나지 마라! 숨어야 돼” 하며 말씀하셨다.

 

영모님을 만난 이후부터 1961년 5.16 군사 혁명까지의 행적

신기한 꿈 안찰

설교하시는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님

그런데 어느 날 밤잠을 자는데 꿈에 이단의 괴수라는 박태선 장로가 나타나서 안찰을 해주는데 너무 통증이 심하여 꿈에서도 펄펄 뛸 정도였다.

안찰을 하신 후 귀에서 고막을 꺼내 찢어진 부분을 꿰매 주시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훈련병 시절 동료들과 함께 군용트럭을 타고 이동하고 있던 중 갑자기 어디선가 날아온 포탄이 트럭 바로 옆에 떨어져 당시 타고 있던 훈련병의 대부분이 부상을 당한 적이 있었다.

포탄이 떨어지는 것을 보는 순간 이 사람은 공중으로 뛰어 올라 회전 낙법을 이용하여 포탄이 떨어지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논두렁에 떨어져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리고 바로 일어나서 주위를 살펴보니 파편이 박힌 사람, 총열이 목덜미를 뚫고 나온 사람 등등 각양각색으로 부상을 당한 동료들이 피를 흘리고 신음하며 살려 달라고 외쳐대고 있었다.

그런데 인솔 책임자인 중대장도 역시 전투 경험이 없는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댈 뿐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워낙 겁이 없고 또 3년 동안의 포로 생활을 통해 온갖 시련을 다 겪었는지라 침착하게 한 사람 한 사람 응급처치를 해 주었다.

총열이 목을 뚫고 지나간 사람은 군화로 머리를 눌러 움직이지 않게 하고는 총대를 힘있게 당겨내니 “우둑!” 하면서 총열이 빠져나왔다. 총열이 박혔던 구멍으로 붉은 피가 철철 흘러 나오는 고로 런닝 셔츠를 찢어 나오는 피를 막았다.

이런 식으로 대충 응급조치를 하면서 동료들을 돌봐주었는데 그 때 이 사람도 폭발음으로 인하여 한쪽 고막이 찢겨나갔던 것이다. 그 후부터는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이 작은 소리를 하면 잘 알아 듣지 못하여 되묻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그 분이 꿈에 찢어진 고막을 꺼내니 고막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굉장히 커 보였는데, “이렇게 고막이 찢어 졌으니 소리를 잘 못 알아듣지!” 하시며 친히 바늘로 고막을 꿰매시고는 도로 귀안으로 넣어 주시는 것이었다

 

박태선 장로를 만나다

박태선 장로님 천막집회 당시 내린 이슬성신 사진

참 신기한 꿈을 꾸고 여느 날과 같이 기성교회 새벽기도에 가기 위하여 일어나서 군복을 입으려고 허리띠를 졸라 매는데, 배가 아픈 고로 옷을 헤치고 아픈 곳을 보니 새까만 손자욱이 배, 옆구리 등에 나 있었다. 그제서야 간밤에 꾼 꿈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이었다.

꿈에 안찰을 받았는데 실제로 안찰을 받은 것처럼 손자국이 나 있다니… 하는 생각이 돌아가는데 문득 시계 돌아가는 소리가 분명하게 들려오는 것이었다. 전에는 시계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꿈에 귀 수술을 받았는데 이렇게 귀가 깨끗하게 나을 수가 있다니… 기쁘기도 하고 신기하게도 생각되었다.

그래서 돌아오는 토요일에는 박태선 장로를 만나러 가기로 작정을 하였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토요일 아침이 되니 금요일까지 멀쩡 했던 배가 아파오는 것이었다.할 수 없이 그 날은 그냥 보내고 말았다. 다음 주에도 한 주일이 다가고 토요일이 되니 또 배가 몹시 아파왔다.

멀쩡하던 배가 토요일만 되면 아파오다니, 이건 필시 박태선 장로를 만나러 가지 못하게 하려는 마귀의 장난임에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귀를 속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번 주 토요일은 기성교회에 나가야지… 하고 짐짓 꼭 그렇게 하리라는 결심도 하였다. 그랬더니 그 주 토요일은 배가 아프지 않는 것이었다.

옳지,됐다! 마귀가 속아 넘어갔구나!  쾌재를 부르며 부천 소사로 갔다. 박 장로의 댁을 물어 찾아가니 마침 출타중이었다. 잠시후면 돌아 오니까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잠시후 박태선 장로가 들어오는데 신도들이 대하는 태도가 한 나라의 대통령 대하는 것보다 더해 보였다.

이단의 괴수라더니 정말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기분이 좋지 않아 곧 돌아가 버려야 겠다고 다짐했다. 이윽고 박태선 장로가 오셨다.

“그래, 장교님은 어떻게 오셨어?”

박태선 장로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물어왔다.

막상 질문을 받으니 대답이 궁하여

“장로님께 안찰받으러 왔습니다. ”

“안찰은 이미 해 줬는데 뭘 또 안찰을 받아?”

박장로님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장로님께 안찰을 받은적이 없습니다. ”

꿈에서는 본 적이 있으나 실제로 박태선 장로를 만나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라 분명하게 대꾸하였다.

그러니까 박 장로님은 기가 차다는 듯이

“장교님이 이제는 거짓말까지 하시네 내가 지난 번에 안찰을 해주고 귀수술까지 해 줬잖아?” 이 사람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꿈에서 안찰해 준 것을 알고 말씀하니 박장로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무섭고 떨려 더 이상 인간 대하듯 할 수는 없었다.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되서 안찰을 받지 않고 그냥 갈 수는 없었다.

“그래도 안찰 좀 해 주십시요” 이렇게 하여 안찰을 받으니 향취 냄새가 진동하고 몸이 둥둥 뜨며 걸어가는지 날아가는지 모를 정도로 몸이 가벼우며 기분이 좋았다.

부대로 귀환하려면 영등포 역까지 와서 열차로 갈아타고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가야 하였다. 그러나 버스를 탈 수가 없었다. 일반 사람들은 은혜를 입지 않은 죄인들인지라 감당할 수 없는 세력이 오는 것이었다.

은혜 받은 것이 오염받아 다시 더렵혀지는 것이 너무너무 싫은 고로 걸어서 영등포까지 갔으며 기차 안에서는 자리가 비어 있었어도 앉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승강대에 서서 목적지까지 가야 했다.

그리하여 그 때부터 지금까지 30여 년간을 일편단심 영모님이 이끄시고 가르치는 대로 결사적으로 믿고 따르게 되었다.

 

영모님을 ‘오실 인자’ 로 알고 바라보고 사모하였다

노구산 야외집회시 산 전체를 가득 메우고 운집해 있는 성도들, 1958년 6월 30일

초창기 남산 집회를 비롯한 전국각지에서 천막집회를 할 때마다 영모님이 단상에 서시면 번갯불이 번적번적하며 은혜가 임하는 것을 보고 성경에 “인자가 임할 때 동편에서 서편까지 번갯불이 번쩍인다” (마태 24:27)는 말씀을 그대로 행하시는 ‘오실 인자’가 바로 영모님 이라는 것을 알았다

영모님께서 단상에 서실 때마다 “바라보시라요!”하고 큰 소리로 당신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시고, 안찰을 하실 때에는 “주님을 바라보시라요”하고 말씀하시는 고로 이 사람은 당신이 주님이라는 것을 깨닫고 당신을 바라보았고, 또한 “고도로 사모하시라요”하시므로 초초로 바라보고 고도로 사모하는 이 두가지 말씀이 지상명령인 줄 알고 수십 년간 초초로 바라보고 고도로 사모하게 되었다.

박태선 장로님 천막집회시 내린 이슬성신 사진

또 영모님께서 “마귀가 들린 미친 사람을 쳐다보지 말라! 쳐다보면 마귀신한테 씌운다”고 설교하실 때, 이 사람은 그러면 하나님의 영이 계신 분을 바라보면 하나님 신을 받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수십 년이 넘도록 영모님 얼굴을 바라보며 지내왔다.

바라보이는 영모님 얼굴이 빙글빙글 웃으시면 마음 상태가 정상이고, 바라보이는 영모님 얼굴이 화나신 모습으로 보이면 마음이 잘못된 것이므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또 바라보이는 영모님 얼굴이 바라봐지지 않으면 호흡을 멈추고 ‘영모님께서 외면하시면 죽겠나이다’하고 결사적으로 매달리고 어거지 떼를 썼다. 그러면 다시 영모님이 바라보여 주시기도 하였던 것이다.

또한 영모님께서 단에서 “너희들이 기도할 때 아버지 하나님하고 부르지 말라. 죄인이 아버지 하나님을 부르면 죄인의 아버지 하나님은 마귀인 고로 마귀가 오냐하고 오게 되어 있으니 주님이라고 불러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이 사람은 죄인이 주님을 부르면 죄인의 주님도 마귀인 고로 마귀가 오냐하고 오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죄인은 기도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소사신앙촌 전경
소사신앙촌 건설현장, 산 꼭대기에 깬 돌을 산 아래까지 이어받기로 운반하고 있는 광경

한편 이 사람은 소사 신앙촌 건설대에 참여하여 신앙촌 건설을 도왔다. 당시 노고산은 뱀산이라 하여 뱀이 워낙 많고 바위가 많아 사람이 살 수 없는 버려진 산이었다. 그 산을 신앙촌으로 개발하는 작업이었다.

그 일은 먼저 바위를 깨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바위를 해머로 깨면 그 깨진 면에 감람나무 잎사귀가 뚜렷하게 새겨져 나왔는데, 그 걸 이 사람이 제일 먼저 발견하고 영모님께 보여드리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분은 하나님

박태선 장로님에 대한 헌금사기혐의는 무죄 신문기사

영모님께서 옥중(獸中)에 가 계실 때는, 매일 뵙고 사모하다가 몇날 며칠을 못 뵈옵게 되니 너무나 보고 싶어 눈물로 밤을 지새웠던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현역 장교의 신분이지만 법정에 들어가 검사 판사 등 법관을 죽여 버리고, 우리 영모님을 구출한 다음 자살해 버리기로 작정을 하고 가슴에 권총을 품고 법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때 영모님이 자꾸 이사람을 돌아보면서 고개를 가로 저어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 하여 마음을 바꾸니 영모님께서 뒤를 돌아보지 않으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생명을 걸고 결사적으로 믿었던 것이다.

영모님께서 두 번씩이나 옥중에 들어가시게 된 것은 당신의 참 가지인 아담과 해와를 키우기 위함이었다.

영모님께서 옥중에 들어 가시니 더욱 더 사모가 되고 보고 싶어졌으며 논산 훈련소 근무지에서 열차를 타고 올라와 서대문 형무소에서 면회를 하게 되면, 당시에는 책상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 앉아 보면서 면회할 때였는데 영모님께서 이 사람 두 손을 붙잡고 한 시간 반 내지 두 시간씩 목을 놓고 우셨다.

영모님이 슬퍼 우시니 이 사람도 따라 울었다. 두 사람이 우는 광경이 너무너무 애절하고 기막힌 고로 당시 간수부장으로 있었던 한장로도 같이 울었다.

이 한장로는 그 당시 기성교회 장로로서 영모님의 인격과 은혜에 감동이 되어 후에 전도관에 들어와 소사 신앙촌에서 형광등 공장장으로 일하였다.

영모님께서 애절하게 우시면서 간간이 하신 말씀이 “숨겨야 이겨, 숨겨야 돼” 하는 것이었다. 그때 이 사람은 하나님이 처하신 곤고한 사정과 영모님이 이 세상에서 최고로 불쌍한 분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고로 이 사람은 이것이 희생 재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데 가치가 있으시면 이것을 이용해 주시옵소서. 이용하시다가 나중에 지옥에 던져도 좋으니 당신의 뜻만 이루어 주옵소서 하는 기도를 하였다.

그래서 수십 년 마귀소리를 들으면서도 참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전도관에서 마귀 취급을 당하다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범박동 소사 제1신앙촌, 1957년 11월 1일 착공

이 사람이 군인의 신분으로 온양 제단 전도사 교역을 맡다가 영모님이 “이제 단에 그만 서, 계속 단에 서면 이길 수가 없어. 이긴자가 될 수 없어. 조 중위는 앞으로 세계에서 제일 큰 단에 세울거야”

하시므로 교역자 생활을 그만 두었는데 곧이어 “이제 조중위는 안찰 안받아도 돼…” 하시며 안찰을 안 해주시므로 마귀 소리를 듣게 되었다.(마귀라고 불려져 왕따당함)

많은 신도들이 안찰받기 위하여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데 이 사람도 그 대열에 끼어 서 있으면 그냥 내버려 두셨다가 가까이 가게되면 이 사람을 힐끔힐끔 보시면서 “안찰 안 받아도 되는데…” 하시면서 혼자 말씀으로 하셨다.

드디어 차례가 되어 영모님 앞에 누우면 손을 대시지 않아도 은혜를 부어 주시는 영적 안찰을 해 주시는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양동이로 물을 붓는 것같이 시원한 은혜체험을 하였다.

그러나 영모님께서는 육적으로는 다른 전도사들을 보고 “전도사, 요즘 전도 잘되나?” 하는 식으로 딴전을 부리시다가 안찰이 다됐다 싶으면 눈짓으로 대기중인 안내원에게 고개짓을 하며 데려가 라는 신호를 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면 2,3명의 안내원이 이 사람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덕소 제2신앙촌, 1962년 7월 21일 착공

육군 중위 계급장이 붙은 장교복을 입은 채 얼굴이 빨개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끌려 나오는 것이었다. 창피를 당하고도 또 가면 끌어내고 그래도 또 가고 하니 이 사람을 아는 전도관 식구나 교역자들은

“조중위는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는 이야기를 입에 오르내렸던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 눈을 속이고 손으로 안찰을 안 해 주시기를 3년이나 계속하시니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이 사람이 마귀라서 안찰을 안해 주시는 것같이 보여 수많은 전도관 교인들은 이 사람이 마귀인 줄 알았다.

진짜 마귀라면 안찰받기 위하여 차례를 기다리는 대열에 끼일 수도 없으며, 만약 끼여 있더라도 영모님 가까이 가게 되면, 세력이 가는고로 “저 마귀새끼 끄집어 내!” 하시며 못 오게 하셨다.

어찌 되었던 전도관 식구들 간에 이 사람이 마귀라서 영모님이 안찰을 안해 주신다는 소문이 퍼져버려 모든 사람들이 이 사람을 외면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는 이 사람에게 직접 전도를 받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맛을 보고 이모저모로 신세를 졌던 사람까지 이 사람을 길거리에서 만나면

경상남도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기장 제3신앙촌, 1970년 2월 28일

“오늘은 마귀 새끼를 보게 되서 기분 잡쳤다” 하며 땅바닥에 가래침을 뱉는 것이었다. 길에서 마주치게 되면 마귀라 하여 외면을 하고 오던 길을 돌아 다른 골목으로 가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신사 양복에다 가래침을 뱉기도 했는데, 그러면 이 사람은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길가에 자라고 있는 풀을 뜯어 가래침을 닦아 내곤 하였던 것이다.

이 사람은 주먹으로 한 대 치면 박살이 날 정도의 볼품없고 나약한 형제를 시켜 ‘나’라는 것이 원수중의 원수인 것을 깨닫게 하시고 ‘나’라고 하는 자존심마귀를 뽑아 주실려고 이런 일을 당하게 하신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감사하게 여겼던 것이다.

이 사람이 영등포 당산동 지관에 다녔을 때 나중에 소사 신앙촌 천부장이 되었던 한영순 권사를 전도하였는데 그 아들 김용이도 군입대 할 때 이 사람이 카츄사로 주선해 주었으며, 의사인 남편 김선생이 영등포에서 고려 엑스레이병원 원장으로 있을 때 이 사람이 피의 원리를 논하며 전도를 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한영순 권사는 소사 신앙촌 C 5동 4호실에 있는 이 사람 집을 찾아와 “천부장 권한으로 명하니 조중위 마귀는 나가라”고 행패를 부렸다. 그러나 이 사람은 끝까지 나가지 않고 버티었던 것인다.

 

고도로 사모하는 신앙생활

소사 오만제단

영등포 당산동 전도관을 건축할 때 이 사람이 헌금을 1등으로 하면서도 아무도 모르게 하였으며, 연보 취급자가 눈치채어 알게 되면 일부만 말하고 그 외는 숨겨 달라고 부탁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당시 박기호 전도사가 당산동 지관에 시무하였는데, 그 당시 이 사람 생각에는 나는 평신도인데도 영모님이 늘 함께 따라 다니시는데 전도사님들은 더욱 영모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어

“박 전도사님, 영모님께서 지금 옆에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박 전도사는 무슨 이야긴지 모르는 고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하고 반문하기에 그때서야 사람마다 따라 다니지 않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바라 보이시는 영모님께서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고 말하지 말라고 신호를 하시므로 그 후부터는 일절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지켜왔던 것이다.

소사 오만제단, 예배 후

영모님의 존재를 초창기 때부터 분명히 ‘재림의 주님’으로 알고서 방안에 영모님 사진만 걸어 놓으면 어머니께서 예수 사진을 옆에다 같이 나란히 걸어 놓은 것이 눈에 보여 “어머니, 예수사진은 떼세요.” 하고 말씀 드리기도 했다.

한번은 인천 동암 간석동 전도관 전도사가 설교를 해 달라는 부탁을 해와 박태선 장로님이 재림의 주님이라는 설교를 하였더니 그 곳에 참석한 교인들이 깜짝 놀라며 조전도사가 이상한 말을 하는 마귀라고 한 적도 있었다.

소사 신앙촌 건설 당시에 밤늦게 ‘주님이 거느리시니 즐겁고 태평 하구나. 주야에 자고 깨는 것 주님이 거느리시네. 날 항상 거느리시고 날 친히 거느리시네. 날 항상 거느리시고 날 친히 거느리시네.’하는 찬송의 가사 내용과 일치된 마음을 가지면서 감사함의 눈물을 흘리며 비탈길을 지나 지금의 오만제단이 지어지기 전 넓은 공터에까지 올라갔다.

찬송을 걸음걸이에 맞춰 원래 곡조보다 빠른 템포로 간절하고 은혜 스럽게 부르니 이 찬송소리를 들은 다른 교인이 감동이 되어 이 찬송을 같이 부르며 뒤에 따라오는데, 오만제단 꼭대기에 와서 보니 5-6명이나 따라왔다.

실제로 영모님께서 옆에서 늘 동행하고 계시는데다 이 찬송을 부르니 감개무량한 눈물이 흐르지만, 이러한 체험을 하지 못하고 찬송하는 자는 냉랭하여 은혜생활하는 것 같지도 않은 것이다. 그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이다.

항상 따라다니시고 초초로 바라보이시는 나의 생명이 되신 주님께 무엇을 드려도 늘 아쉬운 마음뿐이고, 또 육으로 매일 뵈옵게 되면 감개무량한 눈물만 한없이 쏟아지지, 말씀드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영으로, 마음으로, 서로 통하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하루도 영모님을 뵈옵지 못하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도로 사모가 되는데 영모님께서 옥중에 들어가시니 그 하늘을 찌를 듯한 사모함은 말로 형언키 어려웠다.

밤마다 베게깃을 눈물로 적셨던 것이다.

 

군사 혁명을 계획하다

서울 원효로 이만제단

그런 영모님을 두 번째 옥중에 투옥시켰을 때에는 완전히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당시의 민주당 정권을 뒤집어 엎고 내 생명보다 억천만 배 귀한 우리 영모님을 옥중에서 구출하고 영모님을 중심으로 우리 대한민국을 전도관 천지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전국 전도관 대학생회장 이종배 관장과 몇몇 청년 간부들 유제창, 민경춘, 박기호 등에게 제의하여 서울 원효로에 있는 2만제단에서 전국 전도관 대 집회를 열어 교인 일부 몇천 명은 결정된 시간에 원효로에서 출발하게 하고, 또 일부 몇천 명은 마포에서 출발하게 하기로 계획을 짰다.

또 몇천 명은 어느 정류소에서 거기에 있는 승객 시민들과 합세하여 출발하고, 또 일부는 다른 버스정류소 여러 곳을 선정하여 출발토록 하는 한편 조철구를 중심으로 하여 300명의 특별 결사대를 조직, 행정부와 육본 등을 담당하고, 각 경찰서는 헌병대가 점령 하도록 하였다.

수류탄을 비롯한 탄약등은 이 사람의 군동기생이 안양 탄약고에 있으므로 연락하여 조달키로 하는 등 치밀한 계획하에 행동에 옳기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영모님 사모님과 형님인 박태국 장로님은 극구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안됩니다! 죄없으신 우리 영모님을 두 번 씩이나 옥중에 집어 넣은 만행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이 썩은 정부를 뒤집어 엎어 버리겠습니다. “고 강경하게 나가니 그들은 용산 경찰서에 신고해 버렸다.

박태선장로에 대한 사형집행 하루 전날 발생한 5.16혁명 직후의 박정희 소장

그리하여 거사가 들통이 남으로 이 사람이 주범으로 지명수매를 받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영어(囹圄)의 몸으로 계신 영모님께 옥중 발령을 받고 온양 전도관에서 시무하며 피신하고 있었는데, 그 후 6개월 뒤에 5.16군사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이 일어나니 용산경찰서 형사들이 사람이 혁명주체세력인 줄 알고 찾아와 점심을 같이 하자는 등 아부를 하려 하기에 나는 혁명주체세력이 아니라고 해명한 적도 있었다.

자유당 정권 당시 부통령 이기붕과 부인 박 마리아가 영모님을 죽이려고 옥중에 집어넣고는 자유당 정권이 무너졌는데, 그들은 그때 영모님을 옥중 깊은 대변통에 빠뜨려 죽게 했는데 다행히 변소 안에 나무토막이 있어 붙들고 살아 나신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영모님을 체포한 강차장 검사가 심장마비로 죽고, 이기붕 박마리아는 아들의 총에 맞아 죽었던 것이다. 그 후 민주당 정권 때 다시 영모님을 두 번째 투옥시킨 정부가 몇개월 만에 무너졌다.

당시 혁검부장 김창룡이라는 자가 영모님을 직접 구속했는데 구속한 다음날 이유없이 자살을 해버렸다.

성경에 ‘감람나무를 해하고자 하는 자 죽임을 당하리라’고 한 대로 하늘의 사람을 건드린 자들의 말로는 이와 같이 비참했던 것이다.

 

휴전이후 영모님을 만나기 이전 행적

반공포로 제1번으로 석방

 

당시 포로석방은 한국군이 미군들을 꼼작 못하게 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진행되었다. 사진은 거제도포로수용소의 반공포로들을 비밀리에 탈출시키기 위해 한국군이 절단한 철조망

이 사람은 1953년 6월 19일 경북 영천에서 반공포로 제 1번으로 석방되어 판문점을 거쳐 고향으로 와서 김포읍 사무소에 도착하였는데, 어머니께서는 당신 아들을 앞에 놓고도 못 알아 보시고 우리 아들이 어디 있냐고 두리번 거리시며 찾으셨다.
6 · 25동란의 시련속에서 수백 번 수천 번 죽음의 고비를 넘어 단련되고 단련된 몸이라 못 알아 볼 정도의 사람으로 변모되어 있었다.

집에 와서 어른들에게 너 눈동자가 바뀌었구나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죽음의 고비, 사선의 고비를 수없이 넘고 보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어린애로 보여지며 정신력이나 마음은 이 세상의 무엇으로도 당할 수 없는 강하고 강한 마음으로 다져져 있었던 것이다.

전도관 영모님께서도 6 · 25사변은 이긴자를 배출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때 당시에는 영모님 자신이 고생하신 줄 알았으나, 이제 와서 보니 이긴자가 걸어온 길을 그때 그때 바라보시고 말씀하신 것이었다.

전쟁당시 부산 난민촌

포로 아닌 포로 생활에다 입에 담을 수 없는 모진 고초를 3년 동안 당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 고향집으로 돌아왔으나 며칠 쉬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뿌리치고 포로생활 때문에 중단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서 학교를 찾았다.

그러나 당시에 다니던 학교가 전쟁으로 인하여 부산으로 옮겨가 버렸다. 그래서 곧바로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서울대 법대 2학년 때 이미 육법전서를 다 통달해 버렸고 또 전쟁 중 무수한 사선을 넘으면서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더욱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으므로 신학 대학에 들어갔다.

그 당시 이사람은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다가 부산 부두의 미군 통역관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는 전쟁중이라 미국에서 많은 군수물자와 구호물자가 들어왔는데 이것을 많은 한국인 보급관들과 관계자들이 빼돌려 사사로이 착복하였다.

그때 이사람은 유창한 영어 솜씨로 미군에게 인정을 받은 고로 모든 물자 반출시 이사람의 도장을 받아야 되는 직책으로 승격되어 있었다.

이사람이 통역관 겸 감독관으로 일하면서 부정사건이 거의 사라져 버렸는데 한번은 집에 들어와서 보니 5억환이라는 거금이 방안에 놓여 있었다. 5억환이라면 당시 부산에서 몇째 안가는 거부가 될 수 있는 거금이었다.

그러나 이사람은 평소 물욕이 손톱만치도 없는 사람인지라 그런것에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돈을 싸가지고 다음날 출근하니 아니나 다를까 한 트럭 운전수가 손목시계를 가뜩 싣고 나가면서 눈을 껌뻑껌뻑거리는 것이었다.

이사람은 차를 세워 창문으로 돈을 던져주며 물건을 원위치에 돌려 놓았다. 이 일이 알려지자 미군들은 당신같이 훌륭한 청년이 있느냐 하면서 감동했던 바 있었다.

 

신학대학 재학 당시 군입대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에 위치한 육군 제1교육장 막사

신학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고 있는데 갑자기 군입대 영장이 발부되면서 학교에서 바로 육군으로 입대를 하게 되었다. 신병훈련을 제주도에서 받았는데 그때가 가장 더운 7 8월이었다.

한창 전쟁이 치열한 가운데 멀리 부산에서 그것도 학교에서 바로 입대를 하게된 고로, 집에서 면회를 올 형편도 못 되었지만 가족들이 미처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다른 동료 가족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생사를 기약하지 못하는 석별의 눈물을 흘리며 환송하는 물결을 뒤로 보내며 제주도로 향하는 배를 탔던 건이다.

제주도 모슬포에서의 훈련 중 어떤 동료는 이질에 걸려 죽고 어떤동료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탈영도 하고 또 어떤 동료는 구보를 하다가 심장마비로 죽기도 하였다.

전국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기 때문에 훈련도 고되었지만 급식사정이 지금 같지 않아 몹시 배고픈 설움을 당하였다.

모슬포 신병훈련소에서 면회를 신청하고 있는 가족들

다른 훈련병은 가족이 면회를 와서 훈련소 주위의 아주머니들이 파는 가래떡을 사서 먹을 수도 있었지만 이 사람에게는 그런 기회도 없었다.

그 떡이 너무나 먹고 싶어도 그 먹고 싶은 것을 참아야하는 연단이 가해지는 운명 속에 힘든 마음을 달래 보고자 노래 가사를 지어 부르기도 했다.

제주도 좋다지만 나는야 싫어
모슬포 빵고지에 고동이 울면
낮이면 앞에총에 구보를 하고
밤이면 내무반에 엎드러 뻗쳐
호랑이 같은 일등병의 눈치만 본다.

이 가사를 지어 당시 유행하는 유행가의 곡조에 맞춰 부르니 훈련병들 사이에 널리 유행이 되어 제주도 훈련소를 거친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당시는 전시라 소위(少尉)는 전방에서 거의 다 죽어 나갔으므로 대부분의 청년들이 장교되기를 거부하였다. 그래서 군인력 담당 부서에서는 신병훈련을 마친 대학생들과 고졸자들을 모아 놓고 행정요원을 뽑는다고 공고를 하면서 희망자는 응시하라고 부추겼다.

그 말을 사실로 믿은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응시하였는데 이 사람이 그 중에서 1등으로 합격이 되었다. 그러나 300명의 합격자들을 데리고 간 곳은 전남 광주에 있는 상무대 장교훈련소였다. 깜쪽같이 속아서 원치 않는 장교훈련을 받게 되었다.

추운 겨울에 갑종장교후보 87기로서 사병 훈련보다 몇십 배 고달픈 장교 훈련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소위 신분으로 연대 정훈과장을 맡다

조희성님이 소위 임관되어 배치 받을 때를 즈음하여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사진은 중국 북한 연합군대표 미국간 휴전협정 조인서. 한국은 무시되고 없다.

소위 임관이 되어 동료들은 거의 일선 소대장으로 배치를 받았으나, 이 사람은 훈련 성적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특출했으므로 대대 작전 과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곳은 포천군 사창리에 있는 28사단 82연대 3대대였다. 그러나 전쟁은 이미 끝난 뒤여서 정식 군인으로서 전투경험을 쌓지는 못하였다.

이 사람은 작전 과장으로서의 소임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틈나는 대로 사병들에게 공산주의의 정체에 대해 정신 교육을 해 주었다. 이러한 것이 상부에 인정되어 이 사람은 소위 계급으로서 중.소령이 담당하는 연대 정훈과장으로 발령이 났다.

그 때는 고향이 그리워 탈영하거나 고된 병영 생활을 이기지 못하여 월북하는 사병들이 많을 때였다. 이 사람이 정훈과장으로서 연대내 전 사병들을 상대로 이 사람이 직접 포로가 되어 빨갱이들에게 당한 경험담과 공산이론의 허구성에 대해 설명해 주니 월북하는 사병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 들었다.

그리고 업무시간이 끝나면 연대내에서 전쟁과 가난 때문에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사병들을 모아 중.고등학교 과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소문이 나기 시작하자 공부를 배우려는 사병들이 물밀듯이 밀려 들었다. 그런데 28사단 관할 지역내 야산에는 울창한 나무가 많이 들어 서 있었다.

사단에서는 필요한 사단 건물과 진지 등을 짓기 위한 나무를 마련하기 위해 인근 산의 나무를 벌목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작업을 맡은 장병들이 하나같이 나무를 시중에 내다 팔아서는 착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단장은 부정을 하지 않을 만한 깨끗한 장교를 물색하느라 고심한 끝에 이 사람을 책임장교로 임명하였다.

이 사람이 현지에 부임하자 선임하사는 장교님은 이런 데 오시면 안됩니다하면서 방을 하나 얻어 주면서 편히 있으라고 권했다. 그리고는 며칠 후에 돈뭉치를 갖다주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돈이냐고 추궁하니 나무를 내다 판 돈의 일부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원래 불의라면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 돈이 부정으로 마련된 돈이며 선임하사가 주도해 이런 부정이 일어 났다는 것을 확인한 후, 이 사람은 선임하사를 영창에 보내도록 사단장에게 강력히 건의하였다. 그리고는 이 사람이 직접 벌목작업을 지휘하고 감시하여 이 후부터는 한 치의 부정이 없게 하였다.

사단장은 그만한 일로 선임하사를 영창에까지 보낼 것까지 있느냐고 만류하였지만 이 사람은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런 일로 해서 사단장은 이 사람을 깊이 신임하게 되었다.

82연대 정훈과장이 공부 못한 사병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데 그 호응도가 매우 좋다는 것을 들은 사단장은 어느 날 이 사람을 불렀다.

자네, 소원이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 주겠네”

제게 소원이 있다면, 장교로서 맡은 과업을 성실히 수행하고 남는 시간에는 사단 내에 전쟁으로 인해 교육을 받지 못한 사병들에게 공부를 시켜주고 싶은 것뿐입니다.

그게 소원인가? 그러면 자네를 사단 중.고등반 책임 장교로 임명해 줄테니 사단내의 공부 못한 사병들을 가르쳐 주게 이렇게 해서 근무시간에 사단내 군인들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이것이 인근 민가에까지 소문이 나 민간인 청년들이 몰려와 자기네들에게도 공부를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단장의 허락을 받아 근무 시간이 끝나면 부대 밖에 나가 민간인 학생들도 가르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군대식으로 엄하게 가르치므로 70% 이상이 국가에서 시행하는 중.고등학교 졸업자격 검정시험에 합격하여 당시 신문에도 크게 난 일도 있었다.

 

일동 중 ·고등학교를 세우다

제자들과 찍은 사진. 잊지못할 선생님. 가운데 군복차림으로 앉아계신 분이 조희성님

낮에는 군인 학생들을 가르치고 밤이면 부대 근처 마을의 민간인 학생을 가르치니 피곤이 겹치고 잠도 부족하여 몸이 점점 약해져 갔다.

어느 날 야간에 천막 안에서 밤늦게까지 민간인 학생을 가르치다가 코피가 터지니 몇 학생이 우리가 번 돈이 없어 보약은 커녕 따뜻한 식사 한번 대접하지 못했는데도 이 군인 선생님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나오셔서 우리 불우한 학생들을 위하여 당신의 몸도 돌아보지 않으시고 공부를 가르쳐 왔습니다.

배움의 시기를 넘기고 나이가 들은 학생들을 위하여 환경도 좋지 않은 천막에서 심혈을 기울이고 정열을 쏟아 부어주시는 선생님이 너무나 불쌍하다면서 울음을 터뜨리니까 일시에 온 천막안이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 때 마침 지나가던 미군 5군단 소속 공병장교 메이저 존이란 분이 이 광경을 보고 감동이 되어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이걸 보고 미국인이나 한국인이나 감정이 마찬가지라고 느꼈다.

강의를 마치고 나오니 그 때까지 기다렸던 미군 장교가 하는 말이 당신의 소원이 무엇이요? 내가 당신의 소원을 다 들어줄 수는 없지만 당신이 하는 일을 내 힘 닿는 데까지 도와주고 싶소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사람은 전쟁으로 인하여 배울 기회를 놓쳐버린 이 불우한 학생들을 가르칠 교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내 입에서 돈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을 줄 알았는데 다른 말이 나오니까
당신 개인적인 소원은 없느냐하며 다시 물어왔다.

이 사람이 나 개인에 대한 소원은 없다고 답변하니 한국에 이런 훌릉한 청년이 있다니…하며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메이저 존이 상관인 미8군 사령관에게 건의하여 학교 교실을 지은 것이 지금의 일동 중.고등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그러는 중 의사인 일동장로교회 손장로라는 자가 이 학교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야심으로 28사단 고위 장교들을 매수하여 이 사람을 OBC교육을 받게끔 광주로 보낸 다음 그 틈을 이용해 이 학교를 사립학교로 바꾸어 보려고 포천 지방유지들과 공모한 일이 있었다.

공립학교가 되어 있는 현재의 일동 중고등학교

그러나 이 사람은 OBC교육을 끝내고 돌아와 당시 이익흥 경기도 지사등 관계 공무원과 지방 유지들을 직접 찾아가 강력히 주장하여 공립학교로 만들어 버렸다.

어려서부터 희생하기를 좋아하고, 어떤 댓가를 바라지 않는 성품인 고로 이 사람을 찾아와서 우리 포천 군민 전체가 합세하여 똘똘 뭉쳐서 밀어줄테니 군복을 벗고 국회의원에 출마하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의 마음에는 추호도 그런 생각이 없었던 고로 일언지하에 거절하여 버리니, 나중에는 사단장에게 건의하여 이 사람은 사단장실에까지 불려 갔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사람이 20대 젊은이에 어울리지 않게 사회와 국가를 위해 살신성인의 자세로 젊음을 불태우는 것을 보고, 국회의원 출마를 권하였으나 이 사람에게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겨우 국회의원 자격밖에 되지 않습니까하고 되물으니 그들은 무안해서 아무말도 못하고 돌아갔다. 언제나 이름도 없이 묵묵히 누구도 모르게 젊음을 불살라 이웃과 나라를 위해 희생 생활을 계속하였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마다 사람이 해서 안되는 것이 없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하는 시조를 즐겨 말하였고, Where there is a will, there is a way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하는 격언도 가르치며, 불가능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든지 마음을 품고 목적을 세우고 노력을 하면 못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도 교과서를 들고 오늘은 몇과 할 차례냐? 어제는 어디까지 했느냐? 는 식으로 해 보지 않았다.

백묵 하나만 가지면 교과서 참고서 필요 없이 영어, 수학, 국어, 국사, 물리, 화학, 지리 등 모든 과목을 거침 없이 가르치므로 이 사람의 별명이 백과사전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