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이후 영모님을 만나기 이전 행적

반공포로 제1번으로 석방

 

당시 포로석방은 한국군이 미군들을 꼼작 못하게 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진행되었다. 사진은 거제도포로수용소의 반공포로들을 비밀리에 탈출시키기 위해 한국군이 절단한 철조망

이 사람은 1953년 6월 19일 경북 영천에서 반공포로 제 1번으로 석방되어 판문점을 거쳐 고향으로 와서 김포읍 사무소에 도착하였는데, 어머니께서는 당신 아들을 앞에 놓고도 못 알아 보시고 우리 아들이 어디 있냐고 두리번 거리시며 찾으셨다.
6 · 25동란의 시련속에서 수백 번 수천 번 죽음의 고비를 넘어 단련되고 단련된 몸이라 못 알아 볼 정도의 사람으로 변모되어 있었다.

집에 와서 어른들에게 너 눈동자가 바뀌었구나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죽음의 고비, 사선의 고비를 수없이 넘고 보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어린애로 보여지며 정신력이나 마음은 이 세상의 무엇으로도 당할 수 없는 강하고 강한 마음으로 다져져 있었던 것이다.

전도관 영모님께서도 6 · 25사변은 이긴자를 배출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때 당시에는 영모님 자신이 고생하신 줄 알았으나, 이제 와서 보니 이긴자가 걸어온 길을 그때 그때 바라보시고 말씀하신 것이었다.

전쟁당시 부산 난민촌

포로 아닌 포로 생활에다 입에 담을 수 없는 모진 고초를 3년 동안 당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 고향집으로 돌아왔으나 며칠 쉬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뿌리치고 포로생활 때문에 중단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서 학교를 찾았다.

그러나 당시에 다니던 학교가 전쟁으로 인하여 부산으로 옮겨가 버렸다. 그래서 곧바로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서울대 법대 2학년 때 이미 육법전서를 다 통달해 버렸고 또 전쟁 중 무수한 사선을 넘으면서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더욱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으므로 신학 대학에 들어갔다.

그 당시 이사람은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다가 부산 부두의 미군 통역관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는 전쟁중이라 미국에서 많은 군수물자와 구호물자가 들어왔는데 이것을 많은 한국인 보급관들과 관계자들이 빼돌려 사사로이 착복하였다.

그때 이사람은 유창한 영어 솜씨로 미군에게 인정을 받은 고로 모든 물자 반출시 이사람의 도장을 받아야 되는 직책으로 승격되어 있었다.

이사람이 통역관 겸 감독관으로 일하면서 부정사건이 거의 사라져 버렸는데 한번은 집에 들어와서 보니 5억환이라는 거금이 방안에 놓여 있었다. 5억환이라면 당시 부산에서 몇째 안가는 거부가 될 수 있는 거금이었다.

그러나 이사람은 평소 물욕이 손톱만치도 없는 사람인지라 그런것에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돈을 싸가지고 다음날 출근하니 아니나 다를까 한 트럭 운전수가 손목시계를 가뜩 싣고 나가면서 눈을 껌뻑껌뻑거리는 것이었다.

이사람은 차를 세워 창문으로 돈을 던져주며 물건을 원위치에 돌려 놓았다. 이 일이 알려지자 미군들은 당신같이 훌륭한 청년이 있느냐 하면서 감동했던 바 있었다.

 

신학대학 재학 당시 군입대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에 위치한 육군 제1교육장 막사

신학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고 있는데 갑자기 군입대 영장이 발부되면서 학교에서 바로 육군으로 입대를 하게 되었다. 신병훈련을 제주도에서 받았는데 그때가 가장 더운 7 8월이었다.

한창 전쟁이 치열한 가운데 멀리 부산에서 그것도 학교에서 바로 입대를 하게된 고로, 집에서 면회를 올 형편도 못 되었지만 가족들이 미처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다른 동료 가족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생사를 기약하지 못하는 석별의 눈물을 흘리며 환송하는 물결을 뒤로 보내며 제주도로 향하는 배를 탔던 건이다.

제주도 모슬포에서의 훈련 중 어떤 동료는 이질에 걸려 죽고 어떤동료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탈영도 하고 또 어떤 동료는 구보를 하다가 심장마비로 죽기도 하였다.

전국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기 때문에 훈련도 고되었지만 급식사정이 지금 같지 않아 몹시 배고픈 설움을 당하였다.

모슬포 신병훈련소에서 면회를 신청하고 있는 가족들

다른 훈련병은 가족이 면회를 와서 훈련소 주위의 아주머니들이 파는 가래떡을 사서 먹을 수도 있었지만 이 사람에게는 그런 기회도 없었다.

그 떡이 너무나 먹고 싶어도 그 먹고 싶은 것을 참아야하는 연단이 가해지는 운명 속에 힘든 마음을 달래 보고자 노래 가사를 지어 부르기도 했다.

제주도 좋다지만 나는야 싫어
모슬포 빵고지에 고동이 울면
낮이면 앞에총에 구보를 하고
밤이면 내무반에 엎드러 뻗쳐
호랑이 같은 일등병의 눈치만 본다.

이 가사를 지어 당시 유행하는 유행가의 곡조에 맞춰 부르니 훈련병들 사이에 널리 유행이 되어 제주도 훈련소를 거친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당시는 전시라 소위(少尉)는 전방에서 거의 다 죽어 나갔으므로 대부분의 청년들이 장교되기를 거부하였다. 그래서 군인력 담당 부서에서는 신병훈련을 마친 대학생들과 고졸자들을 모아 놓고 행정요원을 뽑는다고 공고를 하면서 희망자는 응시하라고 부추겼다.

그 말을 사실로 믿은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응시하였는데 이 사람이 그 중에서 1등으로 합격이 되었다. 그러나 300명의 합격자들을 데리고 간 곳은 전남 광주에 있는 상무대 장교훈련소였다. 깜쪽같이 속아서 원치 않는 장교훈련을 받게 되었다.

추운 겨울에 갑종장교후보 87기로서 사병 훈련보다 몇십 배 고달픈 장교 훈련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소위 신분으로 연대 정훈과장을 맡다

조희성님이 소위 임관되어 배치 받을 때를 즈음하여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사진은 중국 북한 연합군대표 미국간 휴전협정 조인서. 한국은 무시되고 없다.

소위 임관이 되어 동료들은 거의 일선 소대장으로 배치를 받았으나, 이 사람은 훈련 성적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특출했으므로 대대 작전 과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곳은 포천군 사창리에 있는 28사단 82연대 3대대였다. 그러나 전쟁은 이미 끝난 뒤여서 정식 군인으로서 전투경험을 쌓지는 못하였다.

이 사람은 작전 과장으로서의 소임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틈나는 대로 사병들에게 공산주의의 정체에 대해 정신 교육을 해 주었다. 이러한 것이 상부에 인정되어 이 사람은 소위 계급으로서 중.소령이 담당하는 연대 정훈과장으로 발령이 났다.

그 때는 고향이 그리워 탈영하거나 고된 병영 생활을 이기지 못하여 월북하는 사병들이 많을 때였다. 이 사람이 정훈과장으로서 연대내 전 사병들을 상대로 이 사람이 직접 포로가 되어 빨갱이들에게 당한 경험담과 공산이론의 허구성에 대해 설명해 주니 월북하는 사병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 들었다.

그리고 업무시간이 끝나면 연대내에서 전쟁과 가난 때문에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사병들을 모아 중.고등학교 과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소문이 나기 시작하자 공부를 배우려는 사병들이 물밀듯이 밀려 들었다. 그런데 28사단 관할 지역내 야산에는 울창한 나무가 많이 들어 서 있었다.

사단에서는 필요한 사단 건물과 진지 등을 짓기 위한 나무를 마련하기 위해 인근 산의 나무를 벌목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작업을 맡은 장병들이 하나같이 나무를 시중에 내다 팔아서는 착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단장은 부정을 하지 않을 만한 깨끗한 장교를 물색하느라 고심한 끝에 이 사람을 책임장교로 임명하였다.

이 사람이 현지에 부임하자 선임하사는 장교님은 이런 데 오시면 안됩니다하면서 방을 하나 얻어 주면서 편히 있으라고 권했다. 그리고는 며칠 후에 돈뭉치를 갖다주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돈이냐고 추궁하니 나무를 내다 판 돈의 일부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원래 불의라면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 돈이 부정으로 마련된 돈이며 선임하사가 주도해 이런 부정이 일어 났다는 것을 확인한 후, 이 사람은 선임하사를 영창에 보내도록 사단장에게 강력히 건의하였다. 그리고는 이 사람이 직접 벌목작업을 지휘하고 감시하여 이 후부터는 한 치의 부정이 없게 하였다.

사단장은 그만한 일로 선임하사를 영창에까지 보낼 것까지 있느냐고 만류하였지만 이 사람은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런 일로 해서 사단장은 이 사람을 깊이 신임하게 되었다.

82연대 정훈과장이 공부 못한 사병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데 그 호응도가 매우 좋다는 것을 들은 사단장은 어느 날 이 사람을 불렀다.

자네, 소원이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 주겠네”

제게 소원이 있다면, 장교로서 맡은 과업을 성실히 수행하고 남는 시간에는 사단 내에 전쟁으로 인해 교육을 받지 못한 사병들에게 공부를 시켜주고 싶은 것뿐입니다.

그게 소원인가? 그러면 자네를 사단 중.고등반 책임 장교로 임명해 줄테니 사단내의 공부 못한 사병들을 가르쳐 주게 이렇게 해서 근무시간에 사단내 군인들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이것이 인근 민가에까지 소문이 나 민간인 청년들이 몰려와 자기네들에게도 공부를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단장의 허락을 받아 근무 시간이 끝나면 부대 밖에 나가 민간인 학생들도 가르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군대식으로 엄하게 가르치므로 70% 이상이 국가에서 시행하는 중.고등학교 졸업자격 검정시험에 합격하여 당시 신문에도 크게 난 일도 있었다.

 

일동 중 ·고등학교를 세우다

제자들과 찍은 사진. 잊지못할 선생님. 가운데 군복차림으로 앉아계신 분이 조희성님

낮에는 군인 학생들을 가르치고 밤이면 부대 근처 마을의 민간인 학생을 가르치니 피곤이 겹치고 잠도 부족하여 몸이 점점 약해져 갔다.

어느 날 야간에 천막 안에서 밤늦게까지 민간인 학생을 가르치다가 코피가 터지니 몇 학생이 우리가 번 돈이 없어 보약은 커녕 따뜻한 식사 한번 대접하지 못했는데도 이 군인 선생님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나오셔서 우리 불우한 학생들을 위하여 당신의 몸도 돌아보지 않으시고 공부를 가르쳐 왔습니다.

배움의 시기를 넘기고 나이가 들은 학생들을 위하여 환경도 좋지 않은 천막에서 심혈을 기울이고 정열을 쏟아 부어주시는 선생님이 너무나 불쌍하다면서 울음을 터뜨리니까 일시에 온 천막안이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 때 마침 지나가던 미군 5군단 소속 공병장교 메이저 존이란 분이 이 광경을 보고 감동이 되어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이걸 보고 미국인이나 한국인이나 감정이 마찬가지라고 느꼈다.

강의를 마치고 나오니 그 때까지 기다렸던 미군 장교가 하는 말이 당신의 소원이 무엇이요? 내가 당신의 소원을 다 들어줄 수는 없지만 당신이 하는 일을 내 힘 닿는 데까지 도와주고 싶소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사람은 전쟁으로 인하여 배울 기회를 놓쳐버린 이 불우한 학생들을 가르칠 교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내 입에서 돈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을 줄 알았는데 다른 말이 나오니까
당신 개인적인 소원은 없느냐하며 다시 물어왔다.

이 사람이 나 개인에 대한 소원은 없다고 답변하니 한국에 이런 훌릉한 청년이 있다니…하며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메이저 존이 상관인 미8군 사령관에게 건의하여 학교 교실을 지은 것이 지금의 일동 중.고등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그러는 중 의사인 일동장로교회 손장로라는 자가 이 학교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야심으로 28사단 고위 장교들을 매수하여 이 사람을 OBC교육을 받게끔 광주로 보낸 다음 그 틈을 이용해 이 학교를 사립학교로 바꾸어 보려고 포천 지방유지들과 공모한 일이 있었다.

공립학교가 되어 있는 현재의 일동 중고등학교

그러나 이 사람은 OBC교육을 끝내고 돌아와 당시 이익흥 경기도 지사등 관계 공무원과 지방 유지들을 직접 찾아가 강력히 주장하여 공립학교로 만들어 버렸다.

어려서부터 희생하기를 좋아하고, 어떤 댓가를 바라지 않는 성품인 고로 이 사람을 찾아와서 우리 포천 군민 전체가 합세하여 똘똘 뭉쳐서 밀어줄테니 군복을 벗고 국회의원에 출마하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의 마음에는 추호도 그런 생각이 없었던 고로 일언지하에 거절하여 버리니, 나중에는 사단장에게 건의하여 이 사람은 사단장실에까지 불려 갔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사람이 20대 젊은이에 어울리지 않게 사회와 국가를 위해 살신성인의 자세로 젊음을 불태우는 것을 보고, 국회의원 출마를 권하였으나 이 사람에게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겨우 국회의원 자격밖에 되지 않습니까하고 되물으니 그들은 무안해서 아무말도 못하고 돌아갔다. 언제나 이름도 없이 묵묵히 누구도 모르게 젊음을 불살라 이웃과 나라를 위해 희생 생활을 계속하였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마다 사람이 해서 안되는 것이 없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하는 시조를 즐겨 말하였고, Where there is a will, there is a way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하는 격언도 가르치며, 불가능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든지 마음을 품고 목적을 세우고 노력을 하면 못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도 교과서를 들고 오늘은 몇과 할 차례냐? 어제는 어디까지 했느냐? 는 식으로 해 보지 않았다.

백묵 하나만 가지면 교과서 참고서 필요 없이 영어, 수학, 국어, 국사, 물리, 화학, 지리 등 모든 과목을 거침 없이 가르치므로 이 사람의 별명이 백과사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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