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모님을 만난 이후부터 1961년 5.16 군사 혁명까지의 행적

신기한 꿈 안찰

설교하시는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님

그런데 어느 날 밤잠을 자는데 꿈에 이단의 괴수라는 박태선 장로가 나타나서 안찰을 해주는데 너무 통증이 심하여 꿈에서도 펄펄 뛸 정도였다.

안찰을 하신 후 귀에서 고막을 꺼내 찢어진 부분을 꿰매 주시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훈련병 시절 동료들과 함께 군용트럭을 타고 이동하고 있던 중 갑자기 어디선가 날아온 포탄이 트럭 바로 옆에 떨어져 당시 타고 있던 훈련병의 대부분이 부상을 당한 적이 있었다.

포탄이 떨어지는 것을 보는 순간 이 사람은 공중으로 뛰어 올라 회전 낙법을 이용하여 포탄이 떨어지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논두렁에 떨어져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리고 바로 일어나서 주위를 살펴보니 파편이 박힌 사람, 총열이 목덜미를 뚫고 나온 사람 등등 각양각색으로 부상을 당한 동료들이 피를 흘리고 신음하며 살려 달라고 외쳐대고 있었다.

그런데 인솔 책임자인 중대장도 역시 전투 경험이 없는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댈 뿐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워낙 겁이 없고 또 3년 동안의 포로 생활을 통해 온갖 시련을 다 겪었는지라 침착하게 한 사람 한 사람 응급처치를 해 주었다.

총열이 목을 뚫고 지나간 사람은 군화로 머리를 눌러 움직이지 않게 하고는 총대를 힘있게 당겨내니 “우둑!” 하면서 총열이 빠져나왔다. 총열이 박혔던 구멍으로 붉은 피가 철철 흘러 나오는 고로 런닝 셔츠를 찢어 나오는 피를 막았다.

이런 식으로 대충 응급조치를 하면서 동료들을 돌봐주었는데 그 때 이 사람도 폭발음으로 인하여 한쪽 고막이 찢겨나갔던 것이다. 그 후부터는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이 작은 소리를 하면 잘 알아 듣지 못하여 되묻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그 분이 꿈에 찢어진 고막을 꺼내니 고막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굉장히 커 보였는데, “이렇게 고막이 찢어 졌으니 소리를 잘 못 알아듣지!” 하시며 친히 바늘로 고막을 꿰매시고는 도로 귀안으로 넣어 주시는 것이었다

 

박태선 장로를 만나다

박태선 장로님 천막집회 당시 내린 이슬성신 사진

참 신기한 꿈을 꾸고 여느 날과 같이 기성교회 새벽기도에 가기 위하여 일어나서 군복을 입으려고 허리띠를 졸라 매는데, 배가 아픈 고로 옷을 헤치고 아픈 곳을 보니 새까만 손자욱이 배, 옆구리 등에 나 있었다. 그제서야 간밤에 꾼 꿈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이었다.

꿈에 안찰을 받았는데 실제로 안찰을 받은 것처럼 손자국이 나 있다니… 하는 생각이 돌아가는데 문득 시계 돌아가는 소리가 분명하게 들려오는 것이었다. 전에는 시계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꿈에 귀 수술을 받았는데 이렇게 귀가 깨끗하게 나을 수가 있다니… 기쁘기도 하고 신기하게도 생각되었다.

그래서 돌아오는 토요일에는 박태선 장로를 만나러 가기로 작정을 하였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토요일 아침이 되니 금요일까지 멀쩡 했던 배가 아파오는 것이었다.할 수 없이 그 날은 그냥 보내고 말았다. 다음 주에도 한 주일이 다가고 토요일이 되니 또 배가 몹시 아파왔다.

멀쩡하던 배가 토요일만 되면 아파오다니, 이건 필시 박태선 장로를 만나러 가지 못하게 하려는 마귀의 장난임에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귀를 속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번 주 토요일은 기성교회에 나가야지… 하고 짐짓 꼭 그렇게 하리라는 결심도 하였다. 그랬더니 그 주 토요일은 배가 아프지 않는 것이었다.

옳지,됐다! 마귀가 속아 넘어갔구나!  쾌재를 부르며 부천 소사로 갔다. 박 장로의 댁을 물어 찾아가니 마침 출타중이었다. 잠시후면 돌아 오니까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잠시후 박태선 장로가 들어오는데 신도들이 대하는 태도가 한 나라의 대통령 대하는 것보다 더해 보였다.

이단의 괴수라더니 정말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기분이 좋지 않아 곧 돌아가 버려야 겠다고 다짐했다. 이윽고 박태선 장로가 오셨다.

“그래, 장교님은 어떻게 오셨어?”

박태선 장로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물어왔다.

막상 질문을 받으니 대답이 궁하여

“장로님께 안찰받으러 왔습니다. ”

“안찰은 이미 해 줬는데 뭘 또 안찰을 받아?”

박장로님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장로님께 안찰을 받은적이 없습니다. ”

꿈에서는 본 적이 있으나 실제로 박태선 장로를 만나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라 분명하게 대꾸하였다.

그러니까 박 장로님은 기가 차다는 듯이

“장교님이 이제는 거짓말까지 하시네 내가 지난 번에 안찰을 해주고 귀수술까지 해 줬잖아?” 이 사람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꿈에서 안찰해 준 것을 알고 말씀하니 박장로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무섭고 떨려 더 이상 인간 대하듯 할 수는 없었다.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되서 안찰을 받지 않고 그냥 갈 수는 없었다.

“그래도 안찰 좀 해 주십시요” 이렇게 하여 안찰을 받으니 향취 냄새가 진동하고 몸이 둥둥 뜨며 걸어가는지 날아가는지 모를 정도로 몸이 가벼우며 기분이 좋았다.

부대로 귀환하려면 영등포 역까지 와서 열차로 갈아타고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가야 하였다. 그러나 버스를 탈 수가 없었다. 일반 사람들은 은혜를 입지 않은 죄인들인지라 감당할 수 없는 세력이 오는 것이었다.

은혜 받은 것이 오염받아 다시 더렵혀지는 것이 너무너무 싫은 고로 걸어서 영등포까지 갔으며 기차 안에서는 자리가 비어 있었어도 앉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승강대에 서서 목적지까지 가야 했다.

그리하여 그 때부터 지금까지 30여 년간을 일편단심 영모님이 이끄시고 가르치는 대로 결사적으로 믿고 따르게 되었다.

 

영모님을 ‘오실 인자’ 로 알고 바라보고 사모하였다

노구산 야외집회시 산 전체를 가득 메우고 운집해 있는 성도들, 1958년 6월 30일

초창기 남산 집회를 비롯한 전국각지에서 천막집회를 할 때마다 영모님이 단상에 서시면 번갯불이 번적번적하며 은혜가 임하는 것을 보고 성경에 “인자가 임할 때 동편에서 서편까지 번갯불이 번쩍인다” (마태 24:27)는 말씀을 그대로 행하시는 ‘오실 인자’가 바로 영모님 이라는 것을 알았다

영모님께서 단상에 서실 때마다 “바라보시라요!”하고 큰 소리로 당신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시고, 안찰을 하실 때에는 “주님을 바라보시라요”하고 말씀하시는 고로 이 사람은 당신이 주님이라는 것을 깨닫고 당신을 바라보았고, 또한 “고도로 사모하시라요”하시므로 초초로 바라보고 고도로 사모하는 이 두가지 말씀이 지상명령인 줄 알고 수십 년간 초초로 바라보고 고도로 사모하게 되었다.

박태선 장로님 천막집회시 내린 이슬성신 사진

또 영모님께서 “마귀가 들린 미친 사람을 쳐다보지 말라! 쳐다보면 마귀신한테 씌운다”고 설교하실 때, 이 사람은 그러면 하나님의 영이 계신 분을 바라보면 하나님 신을 받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수십 년이 넘도록 영모님 얼굴을 바라보며 지내왔다.

바라보이는 영모님 얼굴이 빙글빙글 웃으시면 마음 상태가 정상이고, 바라보이는 영모님 얼굴이 화나신 모습으로 보이면 마음이 잘못된 것이므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또 바라보이는 영모님 얼굴이 바라봐지지 않으면 호흡을 멈추고 ‘영모님께서 외면하시면 죽겠나이다’하고 결사적으로 매달리고 어거지 떼를 썼다. 그러면 다시 영모님이 바라보여 주시기도 하였던 것이다.

또한 영모님께서 단에서 “너희들이 기도할 때 아버지 하나님하고 부르지 말라. 죄인이 아버지 하나님을 부르면 죄인의 아버지 하나님은 마귀인 고로 마귀가 오냐하고 오게 되어 있으니 주님이라고 불러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이 사람은 죄인이 주님을 부르면 죄인의 주님도 마귀인 고로 마귀가 오냐하고 오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죄인은 기도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소사신앙촌 전경
소사신앙촌 건설현장, 산 꼭대기에 깬 돌을 산 아래까지 이어받기로 운반하고 있는 광경

한편 이 사람은 소사 신앙촌 건설대에 참여하여 신앙촌 건설을 도왔다. 당시 노고산은 뱀산이라 하여 뱀이 워낙 많고 바위가 많아 사람이 살 수 없는 버려진 산이었다. 그 산을 신앙촌으로 개발하는 작업이었다.

그 일은 먼저 바위를 깨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바위를 해머로 깨면 그 깨진 면에 감람나무 잎사귀가 뚜렷하게 새겨져 나왔는데, 그 걸 이 사람이 제일 먼저 발견하고 영모님께 보여드리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분은 하나님

박태선 장로님에 대한 헌금사기혐의는 무죄 신문기사

영모님께서 옥중(獸中)에 가 계실 때는, 매일 뵙고 사모하다가 몇날 며칠을 못 뵈옵게 되니 너무나 보고 싶어 눈물로 밤을 지새웠던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현역 장교의 신분이지만 법정에 들어가 검사 판사 등 법관을 죽여 버리고, 우리 영모님을 구출한 다음 자살해 버리기로 작정을 하고 가슴에 권총을 품고 법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때 영모님이 자꾸 이사람을 돌아보면서 고개를 가로 저어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 하여 마음을 바꾸니 영모님께서 뒤를 돌아보지 않으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생명을 걸고 결사적으로 믿었던 것이다.

영모님께서 두 번씩이나 옥중에 들어가시게 된 것은 당신의 참 가지인 아담과 해와를 키우기 위함이었다.

영모님께서 옥중에 들어 가시니 더욱 더 사모가 되고 보고 싶어졌으며 논산 훈련소 근무지에서 열차를 타고 올라와 서대문 형무소에서 면회를 하게 되면, 당시에는 책상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 앉아 보면서 면회할 때였는데 영모님께서 이 사람 두 손을 붙잡고 한 시간 반 내지 두 시간씩 목을 놓고 우셨다.

영모님이 슬퍼 우시니 이 사람도 따라 울었다. 두 사람이 우는 광경이 너무너무 애절하고 기막힌 고로 당시 간수부장으로 있었던 한장로도 같이 울었다.

이 한장로는 그 당시 기성교회 장로로서 영모님의 인격과 은혜에 감동이 되어 후에 전도관에 들어와 소사 신앙촌에서 형광등 공장장으로 일하였다.

영모님께서 애절하게 우시면서 간간이 하신 말씀이 “숨겨야 이겨, 숨겨야 돼” 하는 것이었다. 그때 이 사람은 하나님이 처하신 곤고한 사정과 영모님이 이 세상에서 최고로 불쌍한 분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고로 이 사람은 이것이 희생 재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데 가치가 있으시면 이것을 이용해 주시옵소서. 이용하시다가 나중에 지옥에 던져도 좋으니 당신의 뜻만 이루어 주옵소서 하는 기도를 하였다.

그래서 수십 년 마귀소리를 들으면서도 참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전도관에서 마귀 취급을 당하다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범박동 소사 제1신앙촌, 1957년 11월 1일 착공

이 사람이 군인의 신분으로 온양 제단 전도사 교역을 맡다가 영모님이 “이제 단에 그만 서, 계속 단에 서면 이길 수가 없어. 이긴자가 될 수 없어. 조 중위는 앞으로 세계에서 제일 큰 단에 세울거야”

하시므로 교역자 생활을 그만 두었는데 곧이어 “이제 조중위는 안찰 안받아도 돼…” 하시며 안찰을 안 해주시므로 마귀 소리를 듣게 되었다.(마귀라고 불려져 왕따당함)

많은 신도들이 안찰받기 위하여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데 이 사람도 그 대열에 끼어 서 있으면 그냥 내버려 두셨다가 가까이 가게되면 이 사람을 힐끔힐끔 보시면서 “안찰 안 받아도 되는데…” 하시면서 혼자 말씀으로 하셨다.

드디어 차례가 되어 영모님 앞에 누우면 손을 대시지 않아도 은혜를 부어 주시는 영적 안찰을 해 주시는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양동이로 물을 붓는 것같이 시원한 은혜체험을 하였다.

그러나 영모님께서는 육적으로는 다른 전도사들을 보고 “전도사, 요즘 전도 잘되나?” 하는 식으로 딴전을 부리시다가 안찰이 다됐다 싶으면 눈짓으로 대기중인 안내원에게 고개짓을 하며 데려가 라는 신호를 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면 2,3명의 안내원이 이 사람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덕소 제2신앙촌, 1962년 7월 21일 착공

육군 중위 계급장이 붙은 장교복을 입은 채 얼굴이 빨개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끌려 나오는 것이었다. 창피를 당하고도 또 가면 끌어내고 그래도 또 가고 하니 이 사람을 아는 전도관 식구나 교역자들은

“조중위는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는 이야기를 입에 오르내렸던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 눈을 속이고 손으로 안찰을 안 해 주시기를 3년이나 계속하시니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이 사람이 마귀라서 안찰을 안해 주시는 것같이 보여 수많은 전도관 교인들은 이 사람이 마귀인 줄 알았다.

진짜 마귀라면 안찰받기 위하여 차례를 기다리는 대열에 끼일 수도 없으며, 만약 끼여 있더라도 영모님 가까이 가게 되면, 세력이 가는고로 “저 마귀새끼 끄집어 내!” 하시며 못 오게 하셨다.

어찌 되었던 전도관 식구들 간에 이 사람이 마귀라서 영모님이 안찰을 안해 주신다는 소문이 퍼져버려 모든 사람들이 이 사람을 외면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는 이 사람에게 직접 전도를 받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맛을 보고 이모저모로 신세를 졌던 사람까지 이 사람을 길거리에서 만나면

경상남도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기장 제3신앙촌, 1970년 2월 28일

“오늘은 마귀 새끼를 보게 되서 기분 잡쳤다” 하며 땅바닥에 가래침을 뱉는 것이었다. 길에서 마주치게 되면 마귀라 하여 외면을 하고 오던 길을 돌아 다른 골목으로 가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신사 양복에다 가래침을 뱉기도 했는데, 그러면 이 사람은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길가에 자라고 있는 풀을 뜯어 가래침을 닦아 내곤 하였던 것이다.

이 사람은 주먹으로 한 대 치면 박살이 날 정도의 볼품없고 나약한 형제를 시켜 ‘나’라는 것이 원수중의 원수인 것을 깨닫게 하시고 ‘나’라고 하는 자존심마귀를 뽑아 주실려고 이런 일을 당하게 하신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감사하게 여겼던 것이다.

이 사람이 영등포 당산동 지관에 다녔을 때 나중에 소사 신앙촌 천부장이 되었던 한영순 권사를 전도하였는데 그 아들 김용이도 군입대 할 때 이 사람이 카츄사로 주선해 주었으며, 의사인 남편 김선생이 영등포에서 고려 엑스레이병원 원장으로 있을 때 이 사람이 피의 원리를 논하며 전도를 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한영순 권사는 소사 신앙촌 C 5동 4호실에 있는 이 사람 집을 찾아와 “천부장 권한으로 명하니 조중위 마귀는 나가라”고 행패를 부렸다. 그러나 이 사람은 끝까지 나가지 않고 버티었던 것인다.

 

고도로 사모하는 신앙생활

소사 오만제단

영등포 당산동 전도관을 건축할 때 이 사람이 헌금을 1등으로 하면서도 아무도 모르게 하였으며, 연보 취급자가 눈치채어 알게 되면 일부만 말하고 그 외는 숨겨 달라고 부탁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당시 박기호 전도사가 당산동 지관에 시무하였는데, 그 당시 이 사람 생각에는 나는 평신도인데도 영모님이 늘 함께 따라 다니시는데 전도사님들은 더욱 영모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어

“박 전도사님, 영모님께서 지금 옆에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박 전도사는 무슨 이야긴지 모르는 고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하고 반문하기에 그때서야 사람마다 따라 다니지 않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바라 보이시는 영모님께서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고 말하지 말라고 신호를 하시므로 그 후부터는 일절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지켜왔던 것이다.

소사 오만제단, 예배 후

영모님의 존재를 초창기 때부터 분명히 ‘재림의 주님’으로 알고서 방안에 영모님 사진만 걸어 놓으면 어머니께서 예수 사진을 옆에다 같이 나란히 걸어 놓은 것이 눈에 보여 “어머니, 예수사진은 떼세요.” 하고 말씀 드리기도 했다.

한번은 인천 동암 간석동 전도관 전도사가 설교를 해 달라는 부탁을 해와 박태선 장로님이 재림의 주님이라는 설교를 하였더니 그 곳에 참석한 교인들이 깜짝 놀라며 조전도사가 이상한 말을 하는 마귀라고 한 적도 있었다.

소사 신앙촌 건설 당시에 밤늦게 ‘주님이 거느리시니 즐겁고 태평 하구나. 주야에 자고 깨는 것 주님이 거느리시네. 날 항상 거느리시고 날 친히 거느리시네. 날 항상 거느리시고 날 친히 거느리시네.’하는 찬송의 가사 내용과 일치된 마음을 가지면서 감사함의 눈물을 흘리며 비탈길을 지나 지금의 오만제단이 지어지기 전 넓은 공터에까지 올라갔다.

찬송을 걸음걸이에 맞춰 원래 곡조보다 빠른 템포로 간절하고 은혜 스럽게 부르니 이 찬송소리를 들은 다른 교인이 감동이 되어 이 찬송을 같이 부르며 뒤에 따라오는데, 오만제단 꼭대기에 와서 보니 5-6명이나 따라왔다.

실제로 영모님께서 옆에서 늘 동행하고 계시는데다 이 찬송을 부르니 감개무량한 눈물이 흐르지만, 이러한 체험을 하지 못하고 찬송하는 자는 냉랭하여 은혜생활하는 것 같지도 않은 것이다. 그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이다.

항상 따라다니시고 초초로 바라보이시는 나의 생명이 되신 주님께 무엇을 드려도 늘 아쉬운 마음뿐이고, 또 육으로 매일 뵈옵게 되면 감개무량한 눈물만 한없이 쏟아지지, 말씀드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영으로, 마음으로, 서로 통하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하루도 영모님을 뵈옵지 못하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도로 사모가 되는데 영모님께서 옥중에 들어가시니 그 하늘을 찌를 듯한 사모함은 말로 형언키 어려웠다.

밤마다 베게깃을 눈물로 적셨던 것이다.

 

군사 혁명을 계획하다

서울 원효로 이만제단

그런 영모님을 두 번째 옥중에 투옥시켰을 때에는 완전히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당시의 민주당 정권을 뒤집어 엎고 내 생명보다 억천만 배 귀한 우리 영모님을 옥중에서 구출하고 영모님을 중심으로 우리 대한민국을 전도관 천지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전국 전도관 대학생회장 이종배 관장과 몇몇 청년 간부들 유제창, 민경춘, 박기호 등에게 제의하여 서울 원효로에 있는 2만제단에서 전국 전도관 대 집회를 열어 교인 일부 몇천 명은 결정된 시간에 원효로에서 출발하게 하고, 또 일부 몇천 명은 마포에서 출발하게 하기로 계획을 짰다.

또 몇천 명은 어느 정류소에서 거기에 있는 승객 시민들과 합세하여 출발하고, 또 일부는 다른 버스정류소 여러 곳을 선정하여 출발토록 하는 한편 조철구를 중심으로 하여 300명의 특별 결사대를 조직, 행정부와 육본 등을 담당하고, 각 경찰서는 헌병대가 점령 하도록 하였다.

수류탄을 비롯한 탄약등은 이 사람의 군동기생이 안양 탄약고에 있으므로 연락하여 조달키로 하는 등 치밀한 계획하에 행동에 옳기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영모님 사모님과 형님인 박태국 장로님은 극구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안됩니다! 죄없으신 우리 영모님을 두 번 씩이나 옥중에 집어 넣은 만행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이 썩은 정부를 뒤집어 엎어 버리겠습니다. “고 강경하게 나가니 그들은 용산 경찰서에 신고해 버렸다.

박태선장로에 대한 사형집행 하루 전날 발생한 5.16혁명 직후의 박정희 소장

그리하여 거사가 들통이 남으로 이 사람이 주범으로 지명수매를 받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영어(囹圄)의 몸으로 계신 영모님께 옥중 발령을 받고 온양 전도관에서 시무하며 피신하고 있었는데, 그 후 6개월 뒤에 5.16군사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이 일어나니 용산경찰서 형사들이 사람이 혁명주체세력인 줄 알고 찾아와 점심을 같이 하자는 등 아부를 하려 하기에 나는 혁명주체세력이 아니라고 해명한 적도 있었다.

자유당 정권 당시 부통령 이기붕과 부인 박 마리아가 영모님을 죽이려고 옥중에 집어넣고는 자유당 정권이 무너졌는데, 그들은 그때 영모님을 옥중 깊은 대변통에 빠뜨려 죽게 했는데 다행히 변소 안에 나무토막이 있어 붙들고 살아 나신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영모님을 체포한 강차장 검사가 심장마비로 죽고, 이기붕 박마리아는 아들의 총에 맞아 죽었던 것이다. 그 후 민주당 정권 때 다시 영모님을 두 번째 투옥시킨 정부가 몇개월 만에 무너졌다.

당시 혁검부장 김창룡이라는 자가 영모님을 직접 구속했는데 구속한 다음날 이유없이 자살을 해버렸다.

성경에 ‘감람나무를 해하고자 하는 자 죽임을 당하리라’고 한 대로 하늘의 사람을 건드린 자들의 말로는 이와 같이 비참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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