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제대 이후 밀실에 들어가기 직전까지의 행적

11년의 군생활 마감

군에서는 지휘관이 예하 장병들의 근무평점표에 점수를 메기고 의견을 적기도 하는데 이 사람은 육군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몇 번 제대 원서를 적어 내어도 제대가 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 근무하는 동기생에게 물어보고서야 알게 되어서 이사람은 편법을 쓰기로 작정하였다.  

전에 이 사람이 영모님에게 꿈 안찰을 받기 전에는 밤낮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몸이 쇠약해져 폐결핵 초기 단계에 있었는데 꿈 안찰을 받고 나서 그것이 깨끗하게 나은 적이 있었다.  

그래도 X-RAY를 찍어보면 그 부분이 희끗하게 찍혀 나오므로 그것을 군의관에게 보여주면서 부탁을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의가사 제대를 할 수 있었다.  

1963년 7월 31일, 이 사람은 장교생활 11년 만에 육군중위로 제대한 뒤 열두 식구 부양가족을 데리고 소사 신앙촌에 입주했다.

그후 제대할 때 받은 퇴직금을 사기꾼에게 몽땅 사기를 당했는데 그러한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가진 돈이 떨어져 가족들이 굶게 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때 이 사람은 장사라도 해 보려고 신앙촌 내에 있는 공장을 찾아가 물건을 대주면 장사를 해보겠다고 간청했다. 그런데 공장에서는 조중위 마귀가 왔다고 하면서 빨리 나가라고 떠미는 등 상대조차 하지 않고 쫓아냈다.  다른 공장으로 갔으나 거기도 역시 마찬가지로 당신같은 마귀에게 물건을 대주었다가는 마귀로 찍혀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 당신이 있으면 재수 없으니까 빨리 나가라고 하는 바람에 어디에도 발붙일 곳이 없게 되었다.

 또한 예배에 참석하려고 오만제단에 올라가면 안내원들이 마귀가 왔다면서 못들어 가게 하고 주먹으로 귀퉁이를 쥐어박거나 매를 때려 푸른 멍이 든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정 이야기를 가족들에게도 할 수 없었다. 신앙이 없는 동생들이 눈치를 채고 혹 신앙촌 밖으로 나가버릴까봐 매를 맞아도 매맞은 표시를 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매를 맞은 날이면 매맞은 자리를 손으로 비벼서 푸른 자욱을 없앤 뒤에야 집에 들어가곤 했다. 그러다보니 해가 진 후에야 집에 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이 사람은 가족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웃으면서 들어가야 했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날이면 날마다 안내원이 문에 지켜서서 마귀라고 예배를 못 보게 하는 고로 영모님 설교말씀을 멀리 숲에서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소리로만 들어야 했고 그토록 보고 싶은 영모님 얼굴을 뵙는 것조차 힘들었다. 예배 인도차 오만제단에 올라가실 때의 차에 타신 모습만을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어쩌다 스쳐 지나가는 정도로라도 뵈올 수 있을 때는 너무너무 감개무량하고, 반갑고 고마운 고로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절을 하곤 했다. 또 영모님이 단상에서 예배를 마치고 승용차로 내려 가실 때에 이 사람은 급히 달음질쳐서는 도로변에 서서 영모닌께 인사를 드리곤 했는데 그 때마다 구슬 같은 눈물을 흘렸다.

 어떤 때는 영모님께서 차를 잠깐 멈추신뒤 이 사람에게 “요즘은 어떻게 지내?” 하시며 물어 보시곤 했는데 영모님께서 이 사람의 눈물을 보시면서 당신께서도 눈물을 글썽이시며 가시곤 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안내원들은 예배시간만큼은 제단 맨끝 구석자리에 앉아 예배 보는 것을 허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 때마다 너무 감사하고 황송하여 눈물로 예배를 보았고 어떤 경우에는 안내원을 피하여 제단 안에 들어가 보기도 했는데 들키면 매를 맞으면서 끌려 나왔다.  

이뿐 아니라, 조중위는 마귀라고 하면서 오만제단 주일학교 반사를 하던 여동생을 조중위 마귀의 여동생이라는 이유로 제명해 버렸으며 남동생이 신앙촌 안내원으로 있었는데 마귀동생이라 하여 안내원에서 제명해 버리기도 했다.  

그러자 동생들은 “형님, 신앙촌에서 나갑시다 형님같이 충성하는 자를 마귀라고 조롱하니 여긴 있을 곳이 못됩니다” 라고 하면서 모두 나가자고 졸라댔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아니야, 성경에 사랑하는 자를 징계한다는 귀절이 있지 않느냐, 하나님께서 몹시 사랑하시는 고로 징계하시는 것이야” 하며 동생들을 달랬다.

신앙촌 내에서 마귀로 찍혀 모두들 외면하는 고로 공장에도 나갈수 없고 공장의 물건도 팔 수 없었다. 그렇게 되자 이 사람 집에는 쌀도 떨어지고 먹을 것도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할수 없이 이 사람은 김포 큰아버지댁에 가서 쌀을 좀 빌려 달라고 사정했다. 그러자 큰 아버지는 “야 이 새끼야, 집 팔아서 신앙촌에 들어간 미친 자식이 무슨 낯짝으로 여기 와서 쌀 타령이냐!  너같이 정신 못 차린 새끼는 굶어 죽어도 마땅해” 라고 욕설만 퍼부었다.  

그래서 영등포에 사시는 작은 아버지를 찾아가서 말씀을 드렸더니 작은 아버지는 한 술 더 떠서 욕을 할 뿐만 아니라 발길로 차고 귀싸대기를 갈기는 고로 할 수 없이 울면서 돌아와야 했다.  

그렇게 박대를 받고 영등포에서 소사 신앙촌까지 차비가 없어 밤 늦도록 걸어와야만 했다. 걸으면서 이 사람은 하나님 저는 굶어도 좋으니 신앙이 없는 가족들은 한 사람도 버리지 말아 주옵소서하며 울면서 기도했다.  

신앙촌에 있는 집에 와서는 2층 골방에 올라가 하나님께서 불쌍히 보시고 죽게 된 인생들을 이 거룩한 땅에까지 끌고 오는 것을 허락하셔서 소사신앙촌에 입주를 시켜주셨사오니 이 열두 식구를 여기서 나가게 할 수는 없사옵니다. 부디 길을 열어 주옵소서라고 애원하는 기도를 하였다.  

가족들은 쌀이 떨어졌다고 아우성이었으나 돈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신앙촌 콜라 사이다 장사를 시작하다

다음날 아침 기도를 마치고 집을 나와서 영모님댁과 범박우체국을 지나 복숭아밭 있는 곳에 이르렀을때 영등포 당산동 지관에 있는 유집사라는 분을 만나게 되었다.  

그 분은 아들에게서 삼만 원을 받고 이 돈을 누구에게 맡겨서 이자를 받을까 곗돈을 놓을까하고 궁리 하다가 조중위님께 맡기면 가장 신용있겠다 싶어서 소사 신앙촌에 거주하고 있다는 말만 듣고 막연히 만나려고 오는 중인데 여기서 본인을 만나게 되니 참 잘 되었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유집사님께 고맙습니다 그러면 제가 알아서 이자를 드리고 필요하실 때 돌려 드리겠습니다하고 그 3만원을 받아 가지고 쌀 한 말을 사서 집에 들여 놓고 나머지 돈으로 짐싣는 화물용 일제 자전거를 하나 사 가지고 신앙촌 콜라 사이다 장사를 시작했다.  

당시 덕소 신앙촌에서 생산되는 콜라 공장에 병을 납품하는 온양제단의 정장로가 병납품 대금조로 콜라를 가지고 나와서 판매하고 있었는데 그가 콜라를 대주면서 팔아 달라고 하기에 장사를 하게 되었다.  

당시 이 사람의 생각으로는 무슨 물건이든지 신앙촌 물건으로 장사를 해야 되는 줄로만 알았던 고로 위에 시꺼먼 것이 둥둥 뜨는 신앙촌 콜라를 팔러 다녔던 것이다.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칠성 콜라 사이다와는 경쟁이 되지 않을 정도로 불리한 입장이지만 확신을 가지고 도전하고 또 도전하여 서울 시내 제과점 다방 구멍가게에까지 판매망을 넓혀갔다.  

처음에는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 어떤 주류 도매집에 가서 “신앙촌 콜라 사이다를 좀 팔아보시지요. 맛이 좋고 품질도 좋습니다” 며 판촉을 하였는데 주인이 콜라를 보더니 “이 새끼야, 이렇게 시커먼 것이 둥둥 뜨는 것을 사람 먹으라고 만들어서 상품이라고 팔러 다니는 거야!” 하면서 따귀를 갈기고 면박을 주며 내쫓았다.

 그런 모욕을 당하면서도 이 사람은 죄송하다며 90도 각도로 절을 하면서 속으로는 나 같은 마귀새끼는 이런 일을 당해도 마땅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는 자신을 고소하게 생각을 하고, 돌아 서서 다른 곳에 또 판매를 했다.  

그 이튿날 그 매맞은 집엘 가겠다고 하자 짐자전거를 타는 고용인 청년은 다시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그러나 이 사람은 억지로 데리고 다시 갔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집은 두 번 다시 가지 않겠지만 이 사람은 ‘나’라는 것이 개 같은 마귀새끼인 것을 아는 고로 너는 더 천대를 받아야 마땅해 가서 더 수모를 받아라 이 마귀새끼야하고 마음의 싸움을 하면서 매맞은 집으로 다시 갔던 것이다.  

그런데 뜻 밖에도 어제 이 사람을 때린 주인 아저씨는 반색을 하며 반가이 맞아 주는 것이었다. 과거에 자기도 자전거를 타고 장사를 다닌 시절이 있다는 그 아저씨는 젊은 청년이 먹고 살겠다고 장사하러 온 것을 안사면 될 터인데 괜히 사람을 때리고 구박까지 했다며 지난 밤 마음이 아파 잠을 못 이뤘다고 했다.  

그 때 이 사람은 “괜찮습니다. 신앙촌 콜라가 보기는 이래도 맛은 좋습니다. 한번 잡수어보세요” 하면서 병뚜껑을 따고 맛을 보라고 권했다.  

그러자 어제의 그 기세등등했던 사람은 미안했던지 콜라를 받아서 마셔보고는 “야! 맛이 기가 막히군, 젊은 친구가 장사를 해서 먹고 살겠다는데 어제는 내가 성질이 못 돼서 때리기까지 했는데, 그에 대한 사과로 이 콜라를 팔아 줄테니 우선 한 트럭분만 가지고 오시오” 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이후부터 차떼기로 판매가 되었으며 점점 판매망이 넓어지면서 기존의 널리 알려진 칠성콜라와 사이다의 판매가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칠성 회사측에서 사람을 보내어 이 사람을 스카웃 하려고 보수는 원하는 대로 줄테니 칠성에 와서 일 좀 해 달라는 제의를 해왔다.  

그러나 이 사람은 “내가 돈에 눈이 어두워 신앙촌 콜라 사이다를 그만두고 칠성콜라 사이다를 하게 되면 나는 배신자가 됩니다. 나는 굶어 죽으면 죽었지, 그 짓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칠성에서 온 그 사람은 “요새에도 선생님 같은 분이 있다니 정말 감격했다”고 말하였다.  

이 사람은 제과점만 하고 다방은 칠성에 양보를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칠성 측에서 이 사람 친구가 있으면 소개시켜 달라고 해서 “나는 별로 실력이 없고 내 친구 중에 유능한 사람이 있다” 며 친구를 소개하여 취직을 시켜주었다.  그 친구는 두병찬이라는 친구인데 내가 고학을 하면서도 세 학생의 학비를 대주며 공부를 시켰던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은혜를 숨기는 생활

이 사람은 하나님의 기막힌 사정을 알고는 늘 눈물을 흘렸다. 버스를 타도 눈물이 흐르는 고로 옆좌석에 앉은 손님이 부모님이 돌아 가셨느냐고 묻는 경우가 있어 항상 버스를 탈 때는 맨앞쪽 운전석 맞은 편의 좌석을 이용하곤 했다.  

그러나 운전수까지도 필시 부모님이 돌아가신 모양인데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그만 우세요하고 권면을 하는 것이었다. 그럴때면 할 수 없이 버스에서 내려 걸어서 목적지까지 가곤 했다.  

서울 시내를 다니다가도 하나님의 곤고하신 사정과 감사함의 은혜가 사무쳐 뼛골속에서 흘러 나오는 눈물을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는 근처 다방 화장실에 들어가 울었다.  

한참 울다 보면 문을 노크하는 소리와 함께 “손님, 빨리 좀 나와 주세요. 무슨 손님이 화장실을 이렇게 오래 사용하세요” 라는 독촉소리가 들리곤 했다. 그럴 때면 또 다른 다방 화장실로 옮겨가서 울기도 했다.  

하나님의 불쌍한 처지에 깊이 감동될 때는 너무 견딜 수 없어 남대문로 중구 필동을 통하여 남산으로 올라가 숲이 많이 우거져 인기척이 없는 곳을 찾아 거기서 밤새도록 통곡을 하다가 내려오곤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늘 울고 다녔던 탓에 눈두덩이가 부어 올라 옛날의 모습과 다를 정도였으며, 눈물이 어느 정도 나온 후에는 실제 피가 섞인 눈물이 나왔다. 흔히 피눈물을 흘린다는 말이 있는데 이 사람은 실제로 피눈물을 흘려 본 사람이다. 경인국도의 길은 이 사람의 피눈물로 이루어진 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은 소사 신앙촌이었으나 그곳에서는 발붙일 곳이 없었다.  

다행히 온양 전장로님의 배려로 콜라장사라도 하게 되었으나 그것 마저도 얼마 안가서 그만두게 되고 말았다.

 콜라 사이다 공장이 가동을 중단하고 공장을 폐쇄하게 되어 그 동안에 힘들여 개척한 판매망도 거래처도 소용이 없게 되어 할 수 없이 직업을 다른 것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다.  

전도관 식구들 모두가 조중위는 마귀라 하며 반목하고 질시했다. 그중 최수영 전도사만이 이 사람들 받아 주면서 예배보는 것을 허용하였으므로 이 사람은 최수영 전도사가 가는 곳마다 따라 다녔다.  

최수영 전도사가 중구제단에 있으면 이 사람은 중구제단에 가서 예배를 보고 남대문지관에 있을 때는 남대문지관, 신림동에 전보 발령 되면 신림동지관으로, 그 밖에 세검정지관과 도봉동지관 등 몇 군데나 옮겨 다니면서도 새벽예배에 매일같이 참석했다.  

아무리 멀어도 새벽공기를 헤치며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으며 그런데도 대개 예배 시간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면 예배가 끝나 제단 안이 텅 비어도 혼자 남아서 아침이 될 때까지 목을 놓고 엉엉 울며 기도 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런 중에도 30여 년 동안 새벽제단을 빠져본 사실이 없으며 하루도 전도를 안해본 날이 없었다. 이와 같이 매일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다 다리 난간을 들이 받아 개울로 나가 떨어지는 등 교통사고를 당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여전히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집과 가까운 제단이 얼마든지 있었지만 이 사람을 받아주지 않아 갈 수가 없었으므로 최수영 전도사가 있는 곳만 나가게 된 이 사람은 최수영 전도사와 밤을 새우며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면 향취가 나고 생수연결이 되어 이 사람은 “최전도사님과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를 하면 은혜가 연결되어 너무 좋습니다. 최전도사님께서는 은혜가 충만한가 봅니다” 하면서 최전도사를 부추기면서 늘 자신의 은혜체험을 숨기면서 지내왔다.  

그리고 영모님께서는 십의 구조를 바쳤다는 설교 말씀에 이 사람은 십의 십조를 바치는 생활을 했으므로 항상 돈이 없는 상태였으며 때로는 차비가 없어 걸어서 집에 가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가운데도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여 드리고 또 드려도 늘 아쉬운 마음뿐이었으며 이 생명까지 억천만번 기울이고 사는 상태였으므로 늘 빚으로 살아야 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해주시어 해결이 되는 체험을 수없이 하였다.  

콜라 사이다 장사를 그만둔 뒤 이 사람이 부양가족을 위하여 새로운 일을 찾고 있을 때 최수영 전도사의 소개로 강남 영동에 나가 고등학교 3학년생 10명 가량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런데 10명이 모두 서울대학에 합격되어 그 소문이 퍼져나가자 소문을 듣고 재벌 자녀의 부탁이 많이 들어왔다.  

돈은 달라는 대로 줄테니 자기네 자녀를 책임지고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리하여 남산국민학교 앞에 방을 얻고 을지로 2가 2층에 과외실을 마련하여 많은 학생들을 가르쳤다.  또 가르치다보니 학생들이 늘어나서 충무로 3가 등 여러 곳에서 과외지도를 했다. 덕분에 돈을 많이 벌었으며 그 돈으로 회사를 차리기도 했다.  

이 사람이 전도를 아주 열심히 하여 부흥이 잘 될 뿐 아니라 일요일 예배를 다녀갈 때마다 연보대 주머니가 두둑한 것을 본 최수영 전도사는 이 사람이 연보를 많이하는 줄을 아는 고로 많은 전도관 식구들이 조중위는 마귀라는 소문이 있어도 늘 받아주었던 것이다.  

이 사람이 이긴자가 되기까지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긴긴 세월을 두고 이루어진 것이다.  

 

영의 흐름을 깨닫다

소사 신앙촌 근처 광명리(지금의 광명시)에 종열이 엄마라는 아주머니가 정신이상이 생겨 전도관 교인 몇 사람과 이 사람이 정신병을 고치려고 간 적이 있었다.  삥 둘러 앉아서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를 보는데 갑자기 종열이 엄마가 방문을 박차고 뛰어 나가려 하면서 뜨거워서 견디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또한 영모님께서 축복하신 생수를 먹이려고 하면 피! 피! 하고 소릴 지르며 질겁을 하고 먹지 않으려고 온갖 애를 쓰곤 했다. 그리고 자기 남편을 보고 “얘야! 이 애비가 목이 타니 물 좀 떠와라” 하며 행동까지도 꼭 돌아가신 시아버지 행세를 하는 것이었다.  

또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꿉장난 하자며 아기 행세를 하는 등 여러 사람들의 행세를 순식간에 바꾸었다. 이것을 보고서 영의 흐름을 더욱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우리 몸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조상들의 영이 들어 있는데 ‘나’ 라는 주체의식의 영이 왕으로 군림하여 행세를 한다. 그런데 ‘나’ 라는 주체의식이 간혹 어려운 일을 당해 고민속에 깊이 빠졌거나 충격을 받았을 때는 ‘나’ 라는 주체의식의 영이 왕의 자리인 제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다른 영에게 주체의 자리를 빼앗기게 된다.

 조상들의 무수한 영들 중에서 다음으로 강한 한 영이 왕의 위치에 와서 앉게 되는 것이다. 그 때 왕의 위치에 앉게 된 영의 사람이 그 사람의 행세를 하다가 다시 또 바뀌어 다른 조상의 영이 앉고 하는데 이때 피의 쿠테타, 즉 영의 쿠테타가 일어남으로 미친 사람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다.  

그렇게 영이 바꿔 살 때에는 밥을 세 그릇 네 그릇을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는데 그것을 보아 밥을 많이 먹는다고 해서 배탈이 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증명이 된다고 느꼈다.  

그리고 며칠씩 굶어도 이상이 없으며 타이르고 친절하게 하는 것보다 야단을 치고 고통을 가하게 되면 현재 점령하고 있는 영이 하야(下野) 하여 영이 바뀌는 것을 보았으며 주위에 있는 사람 하나하나의 마음 상태까지 알아 맞추며 더구나 그 사람에게 몇 시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두 눈으로 보는 듯이 말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예배를 보고 나서 종열이 엄마가 축복한 생수를 피라고 하며 먹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것을 억지로 먹이고 다시 찬송을 힘차게 부르고 나니 심한 경련을 일으키면서 자기 정신으로 돌아 왔던 것이다. 이처럼 경련을 일으키는 것은 왕의 위치에 있는 다른 영이 왕의 위치를 물러날 때 영과 영이 결사적으로 싸우는 현상이다.

이 정신이상에 대한 치유는 현대의학이 아직도 정확하게 모르고 있으며 100% 고쳐지지도 않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이 익산군 금마 재건 중고등학교에 있을 때에도 희귀한 체험을 한 적이 있다.  최규탁이라는 학생의 집에 우환이 있어 동네의 유명한 무당들을 불러다가 굿을 한다고 하였다. 그 때 이 사람이 그 굿을 몇 시에 하느냐고 물으니 저녁 시간에 한다며 시간을 알려주었다.  

이 사람은 최규탁 학생에게 그 굿이 안될테니 두고 봐라고 말을 해주었다.  

저녁시간이 되자 무당들이 도착하여 옷을 갈아입고 멍석을 깔고 물을 떠 놓고 대나무도 갖다 놓고 분주히 준비를 하더니 드디어 정좌(正坐)를 하고 정성을 드리고 북을 치면서 일정한 리듬에 맞춰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30분, 한 시간, 두 시간이 가도 무당이 움직이지 못하고 주문 외우는 사람만 열심히 땀을 흘려 가며 북을 치며 주문을 외우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고는 주위에서 구경 온 사람들도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때 같으면 2-30분 안에 신이 내려 작두 위에서 춤을 추는 등 초능력을 보이는데 오늘은 무당이 꾸어다 놓은 보리자루 모양 그대로 앉아 있다가 몇 시간이 지난 다음 도저히 안된다면서 포기를 하고 일어서 버렸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기 저 쪽에 있는 전도관에 다니는 군인 때문에 굿이 안된다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만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어떤 사람을 만나면 괜히 기분이 나쁜 경험을 하게 된다.  

지난 83년도에 KBS에서 이산가족찾기 했을 때에 3-40년 만에 만나는 감격의 순간을 화면으로 보고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바라 봄으로써, 생각과 마음, 영이 움직이고, 생각과 마음과 영이 움직이면 피가 변하고, 피가 변하면 몸이 변하는 것을 증명해 주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태초의 아담과 해와에게 모방력이 있는 마귀의 영이 하나님의 모습을 모방하여 나타남으로써 그것을 바라본 아담과 해와인 하나님의 영이 마귀의 영에게 점령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하나님 즉 마귀를 이기신 하나님의 영이 담긴 분을 바라보면 하나님 영에게 점령을 당하게 되어 마귀의 영이 지게 되는 논리는 지극히 정확한 논리인 것이다.

이 사람은 일찍이 영모님께서 하나님의 신을 모시고 계신 분인 것을 깨닫고 초초로 바라보고 고도로 사모하고 생명을 바쳐 순종하는 생활을 1년 2년이 아니라 수 십년을 해왔다.  

더구나 마귀라 하여 발붙일 곳이 없는 가운데서도 게의치 않고 견뎌왔던 고로 하나님께서 조희성의 영을 죽이고 좌정하시게 된 것이다.  

너무나 하나님을 많이 바라보는 생활을 하였던 것이 증명되는 것은 이 은혜 역사를 하기 전에 소사 신앙촌집에서 서울로 버스를 타고 갈 때나 올 때 창문을 뚫어지라 바라보며 눈동자의 초점을 바꾸지 않은 것을 목격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윤성려 양은 이 사람을 잘 아는 고로 창문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을 목격하고는 창밖에 무엇이 있나하고 궁금하여 밖을 봤으나 아무 것도 없었다고 이 사람의 딸 지숙이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차만 같이 타게 되면 창문을 보게 되고 볼 때마다 이 사람이 창문밖을 보며 시선을 떼지 않았었는데 당시는 왜 그랬는지 몰랐으나 승리제단에 와서 이 사람의 말씀을 들어보니 영모님을 바라 보시느라고 그랬었구나하고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이 사람은 긴 세월을 두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고도로 사모하고 순종하는 생활로 일관하여 신의 분별 즉 영의 분별을 정확하게 하며 정코스를 걸어 온 것이다.    

 

육적으로도 당할 자 없어

 이 사람이 콜라 사이다 장사를 할 때 서울 거래처에서 수금을 하고 늘 밤늦게야 소사 신앙촌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한번은 수금이 잘 되어 거금을 가지고 달빛이 으슥한 밤 12시경에 집으로 돌아 오던 중에 강도를 만난 적도 있었다.  

찬송가를 부르며 하나님의 곤고하신 사정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소사 신앙촌 부근에 이르자 갑자기 강도 세 놈이 불쑥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칼을 들이대면서 “꼼짝말고 서라, 그리고 가지고 있는 돈을 몽땅 내놔라”고 하며 협박을 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타고 가던 자전거를 세우면서 큰 소리로 여유만만하게 “보아하니 너희 놈들은 칼 정도를 가지고 까부는데, 총을 가졌다면 몰라도 칼 정도로는 계산 착오야! 어디 한 놈씩 덤벼봐!” 하고 크게 호통을 치면서 도로 복판에서 싸울 자세를 취하고 버텨섰다.  

그러자 강도 세 놈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덤벼들지 못하고 주저주저하고 있었다.  

“덤비지 못하거든 저리 비켜!” 하면서 호통을 치고는 자전거를 끌고 태연히 앞으로 몇 발자국 걸어갔다.

놈들은 잠깐 우물쭈물하면서 옆으로 피하는 듯하더니 다시 덤빌 생각이 들었는지 도전적인 말을 걸어왔다. 이 사람은 다시 자전거를 고정시켜 세우면서 “너희들 오늘 잘못 걸렸어, 어디 덤빌테면 덤벼 봐!” 하며 자신만만하게 버티고 서서 그들에게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쉽게 덤벼들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면서 길 옆으로 비켜 섰다. 그 틈을 타서 다시 자전거를 끌고 신앙촌 쪽으로 계속 걸어갔는데 그들 역시 계속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마침 내리막 길에 접어 들어 끌고 가던 자전거를 재빨리 타고서 힘차게 페달을 밟아 속력을 내며 달렸다. 신앙촌에 다달아 신앙촌 경비들과 함께 뒤따라 오는 강도들을 찾아 나섰으나 그들은 어느새 도망가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사실 이 사람은 싸움을 해보지 않았지만 학생시절부터 기계체조 운동을 늘 하여 몸이 민첩할 뿐 아니라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 연단된 강한 마음으로 인하여 아무리 어려운 경지에 봉착해도 당황하지 않으며 판단이 흐려지지 않고 행동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한번은 군장교로 있었을 때 외출을 나왔다가 혼자서 깡패 열 다섯명과 격투를 벌여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종로 일가 화신백화점 양품부에서 장사를 하시는 이모님이 계셨는데 젊고 미모인지라 치근덕거리는 사내들이 많았다. 이 사람이 찾아 갔을 때도 한 건달녀석이 이모님께 괜한 시비를 걸면서 치근덕거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이 사람은 그 사내의 멱살을 잡고 끌어내어 계단 아래로 내동댕이쳤다. 놈은 위기에 처하자 “형님!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테니 제발 살려주십시오”라고 사정하였다.  

그래서 보내 주었는데 조금 후 열다섯 명쯤 되는 패거리를 데리고 와서 이 사람을 죽인다고 덤벼들었다. 숫자가 많은 고로 처음엔 몸을 피해야겠다고 달음질쳤다.  

그러나 한참 정신없이 달음박질을 치다가 보니 막다른 골목에 부딪쳐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골목벽을 등지고 15명의 깡패와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깡패들은 모두 손에 단도칼을 들고 있었지만 이 사람은 아무 무기도 없이 맨주먹으로 그들과 격투를 벌여야 했다.  

칼을 휘두르며 한꺼번에 십여 명이 날쌔게 덤벼드는데도 이 사람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공격해 오는 상대들을 맨 주먹으로 막아냈다.  

평소 발차기 연습을 비롯해서 운동을 많이 하였던 고로 이 사람의 발에 한 방 맞으면 아무리 장사라도 나가 떨어질 정도로 강한 발길질과 펀치가 있었다.  

발과 주먹으로 달려드는 패거리와 한참 싸우다보니 십여 명은 근처에 쓰러져 있고 나머지 놈들은 도망치고 있었다. 그 때서야 이 사람은 바지 가랭이가 몇 군데 칼에 베어져 있다는 사실과 주위에 구경꾼들이 몰려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구경하던 사람들의 신고에 의해 헌병 백차가 와서는 이 사람을 헌병대 본부로 데려갔다. 마침 당시에 헌병들이 한참 동안을 이 사람의 싸움 모습을 보았던 모양이었다.  

“장교님, 언제 그런 무술을 배우셨습니까? 정말 멋있었습니다.” 하고 감탄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마침 당시에 헌병대 상급기관에 집안 아저씨뻘 되시는 분이 계셔서 더이상 조사 받지 않았다. 헌병들은 헌병 백차로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옛날 우리 속담에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부딪쳐도 정신을 잃지 않고 여유를 가지면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소사 제 1 신앙촌에서 덕소 제 2 신앙촌으로 공장과 교인들이 거의 옮겨가고 영모님께서도 덕소로 가시게 되자 소사 신앙촌은 기강과 질서가 무너져 말이 아니었다. 신앙하는 사람들이 모인 마을답지 않게 술 담배가 성횡하고 밤늦게 고성방가가 난무하였다.  

그 때 이 사람은 영모님께서 피와 땀의 결정체로 이뤄 놓은 신앙촌인데 이렇게 기강이 문란하고 질서가 무너질 수 있는가하는 애석한 마음을 가지고 이제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기강을 바로 잡는 데 나섰다.  

그래서 누구든지 신앙촌에 거주하고 싶은 자는 모두 오만제단에 나가야 하며 술과 담배를 끊으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우선 신앙촌에 살고 있는 깡패들을 붙잡아서 그들을 전도한 뒤 새벽마다 청년들을 시켜 그 강패들을 깨워 오만제단에 데리고 오게하였다.  

그 다음에는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며 신앙촌 거리를 지나가거나 담배를 피우며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 아무리 체구가 크고 힘이 센 사람일지라도 단호하게 훈계를 하였으며, 그것이 먹혀 들어가지 않을 경우엔 거의 죽을 지경으로 두들겨 패서 혼을 내주곤 하였다.  

그 소문이 퍼지자 자연히 신앙촌 거리를 지나갈 때만은 술을 먹고 비틀거리거나 담배를 물고 가는 추태가 없어져 서서히 기강이 바로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강력하게 휘어잡자 일부 불만을 가진 자들이 인근 파출소에 가서 불평을 늘어 놓아 파출소에서는 이 사람을 불러서 이모저모 따져 물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당신네들이 하셔야 될 일을 대신해 드리는데 왜 그러시느냐며 신앙하는 사람들이 모인 마을에서 술 담배가 허용되고 고성방가와 깡패들의 패싸움이 있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 후 파출소와 서로 협조하여 계속 신앙촌 마을의 정화작업을 해 나갔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예비군이 창설될 무렵, 소사 신앙촌에서도 예비군을 창설해야 했는데 신앙촌 청년들은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모여든 사람들이고 자기 개성이 강한 사람이 많아 이들을 통솔해 나갈만한 인물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 때 조중위가 아니면 통솔할 자가 없다면서 당시 천부장과 한영순 권사 등 신앙촌 간부들이 찾아와서 예비군 창설에 협조해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사람이 예비군 중대를 조직하여 거칠고 말썽꾸러기들인 신앙촌 청년들을 완전히 장악하여 맹훈련을 시켜 경기도에서 가장 모범적인 예비군 부대로 만들어 표창도 여러 번 받은 바가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걸고 지켜

이 사람은 일찍이 생활 전반에 걸쳐 빈틈없이 살고자 애썼으며 또한 사회에 봉사하고 나를 희생하는 것을 보람으로 느끼며 살아왔다.  

학생시절에는 고학을 하면서도 친구의 학비까지 대줄 만큼 고생을 사서 하기도 했으며, 장교시절에는 고된 군생활에도 불구하고 야학을 운영하여 못 배운 젊은이들을 무료로 가르치기도 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가는 곳에는 학교가 세워지고 전도관이 부흥되는 것이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아주 철두철미하여 마음으로도 흐린 생각을 안하려고 애를 쓰고 기를 썼던 것이다. 어쩌다 흐린 생각을 하게 되면 자신에게 “이 마귀새끼야, 너 같은 새끼는 죽어버려! 왜 그따위 생각을 해!” 라고 하면서 머리를 시멘트벽에 들이 받은 적이 수백 번이 넘었다. 그럴 때마다 뇌진탕 직전에서 한 두 시간 동안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곤 했다.  

사실 이 사람의 집안 내력을 볼 때 대머리가 없었는데 너무 자주 머리를 벽에 들이받다 보니 머리가 부어 올랐다 가라 앉았다 하면서 머리카락이 빠져 대머리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은 평생 동안 낮잠을 자 본 일이 없었다.  

특별히 할 일이 없거나 여유가 있을 때면 남의 집 마당이라도 쓸면서 시간을 보냈다. 낮잠을 자거나 쓸데없이 잡담을 하면서 노닥거리지를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몸이 아파도 방에 들어가 눕거나 안일한 마음을 갖지 않았다. 몸이 아프면 오히려 “이 놈의 마귀새끼야 잘 되었다, 너는 아파 거꾸러져라” 고 하면서 자신을 고소하게 생각하고 평소보다 더 힘든 일을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하다보면 언제 아팠더냐는 듯이 아픈 것이 없어져 버리는 체험을 하였다. 특히, 영모님 말씀이 하나님 말씀 임을 아는 고로 내 생명보다 억천만 배 더 귀중히 여겼던 것이다.  

영모님께서 기도가 끊어지면 안 되니 항상 기도를 하라고 말씀 하신 적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고지식하면서도 한편 순진한 면이 있었던 고로 그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려 했다.  

그런데 깨어 있을 땐 물론 기도를 할 수 있었지만 잠잘 때는 어떻게 기도해야 될 지 아주 난감했다. 궁리 끝에 이 사람은 잠자기 전에 먼저 기도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꿈에서도 기도하는 꿈을 꾸게 되고 안찰받는 꿈을 꾸면서 한 시도 하나님을 잊어 버리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루도 빠지지 않고 꼭 기도를 한 뒤 잠자리에 들었으며, 기도를 할 때마다 응답이 되어지는 확신 속에서 잠을 잤다. 기도시에는 꼭 빠지지 않고 하나님 잠잘 때 호흡하는 것마저 기도하는 것으로 쳐 주시고 맥박이 뛰는 것마저도 기도로 쳐 주셔요 하면서 간절한 심정으로 매달렸다.  

밤이나 낮이나 기도가 끊이지 않는, 그야말로 기도로 일관된 생활을 함으로써 늘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된 것이다. 유사 이래 이 사람만큼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로 일관된 생활을 한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것이다.  

일반 사람들 마냥 술에 물탄 듯 물에 술탄 듯 미지근하게 적당주의로 신앙생활을 했다면 결코 이긴자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영모님이 단상에서 하신 말씀은 정말 하늘이 두 쪽 나도 그대로 지키려고 애썼으며, 하나의 지상명령으로 여기면서 순종했다.  

영모님 말씀이 하나님 명령임을 아는 고로 그대로 살지 않으면 큰 일이 나는 줄로 믿었던 것이다. 자신에게는 물론 다른 사람들마저도 하나님 말씀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 용납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것은 하나님이 당하고 있는 억울하고도 기막힌 사정을 너무나 잘 아는 고로 상대적으로 마귀에 대한 적개심이 불타 올랐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 사람은 죄라면 이가 갈리고 치가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생활했다.  

 

전과5범 사기꾼의 개과천선

이 사람은 이긴자가 될 때까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내 마음 같은 줄 알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아주 잘 믿었다. 그런 까닭에 사기를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번은 군생활 11년간의 퇴직금을 몽땅 사기당한 적이 있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몇 년 뒤 이 사람의 돈을 사기친 사람을 우연히 길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금방 얼굴색이 창백해지면서 어쩔줄 몰라했다.  

그 때 이 사람은 아주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을 시킨 뒤 식사라도 하고 가라며 식당으로 데려갔다. 식사 도중에 이 사람은 그 사기꾼에게 얼마나 어려웠으면 그런 짓을 했겠느냐며 그 당시 이 사람 역시 너무 어려운 처지라 아주 난처했으나 지금은 발등의 불은 끈 셈이니 그 돈은 굳이 갚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는 “정히 갚고 싶으면 여유가 될 때 갚으세요. 당신이 쓴 것이나 내가 쓴 것이나 매한가지니까 너무 큰 부담감은 갖지 마세요” 하면서 오히려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그러자 이 사람에게 사기를 친 그 사람은 황송해하며 쩔쩔매면서 몸둘 바를 모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자기의 전직이 학교 교사였으며 사기 전과 5범의 불명예 기록을 가지고 있다고 실토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 참으로 형님과 같은 인격자는 처음 만났습니다라며 이후부터는 형님이라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며칠 후 그는 돈을 신문지에 싸가지고 이 사람을 찾아왔다. 이 사람은 그 돈을 안 받겠다며 거절했다. 왜냐하면 그 며칠 사이에 어디서 갑자기 그 돈을 벌어 왔을 리가 없으며 분명히 또 다른 사람에게 사기쳐서 가지고 온 돈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이 돈을 마련하느라고 애를 많이 썼겠지만 또 다른 한 사람이 사기를 당하여 가슴 쓰린 고통을 받아야 할테니 그 사람에게 다시 돌려 주세요. 그런 일이 있었을 때는 매우 어려웠으나 지금은 그 돈이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나는 한번 쓰라림을 맛보았으니 나로써 끝나야치 또 다른 사람을 괴롭혀서야 되겠어요? 꼭 그 돈을 갚고 싶으면 구멍가게라도 해서 몇 년이 걸려도 좋으니 직접 돈을 벌어 갚도록 하세요” 하였다.  

그 사람은 한참 동안 회한과 감동의 눈물을 흘린 후 그 돈을 도로 갖고 갔다. 그리고 정말 구멍가게를 해서 돈을 벌어 그 돈을 갚았으며 그 뒤 공장을 세워 일약 떳떳한 사장으로 변모하였다.  

인간은 원래 악한 사람이 없으며 누구든지 참된 교육과 은혜를 입으면 개과천선될 수 있다는 중요한 실례가 되는 일이었다.  

평소에도 이 사람은 학생들이나 교인들에게 도둑을 맞거나 사기를 당하면 그러한 일을 계속 고민하고 아까와서 속상해 하지 않고 얼마나 없으면 그와 같은 짓을 했겠느냐 네가 쓴 것이 내가 쓴 것이다라고 생각을 돌려먹고 잊어버린 뒤, 이제라도 다시 새 출발하는 심정으로 노력을 했다.  

사실 새 각오로 돈을 버는 것이 현명하지, 돌아오지도 않을 것을 계속 속상해하고 싸우게 되면 자신의 피만 더욱 탁해지고 썩어서 늙고 병들게 되며, 결국 죽게 되고야 마는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이 인도하는 생활

이 사람은 늘 하나님께 순종하며 감사하는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만 살았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좌절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활하니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 사람과 함께 동행하시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어디를 가든지 따라 다니시는 것을 체험했던 것이다. 한번은 서울 신당동에 산다는 김모 씨의 집을 주소도 없이 찾아간 적이 있었다.  

사실 주택이 워낙 빽빽하게 들어선지라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할 수 없는 곳을 주소도 모르고 찾기란 뜬 구름잡는 격이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이 사람은 하나님만 믿고 늘 바라보이는 영모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갔던 결과 그 집을 수월히 찾을 수가 있었다.  

길이 두 갈래 세 갈래로 나뉘어져 있으면 바라보이시는 영모님께서 지시를 해 주셨는데 우측을 가리키면 우측으로 가고 좌측으로 가라하면 좌측으로 가다보니 어느덧 어느 집 대문 앞에 멈춰서게 되었다. 문패를 바라보니 내가 찾고자 했던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상상할 수 없는 일까지도 해결해 주셨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을 느끼면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김씨는 깜짝 놀라며 여기로 이사온 후 집을 아는 사람이 없는데다 주소도 가르켜 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 왔느냐며 의아해 했다.  

그런데 당시 이 사람은 영모님께서 말하지 말라는 지시를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알려 주셨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던 터라  당신이 이 집으로 올 때 몰래 뒤따라 와서는 집을 알아 두었지요하면서 거짓말을 하였다.  

그러한 확신 속에 사니 한 치의 헛점도 없는 온전한 생활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이 사람을 찾아 왔다.  하루는 어떤 낮선 아주머니가 이 사람 사무실을 찾아와 자신이 처해 있는 입장을 털어 놓으면서 도와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육군 장교라고 밝히면서 평소 남편으로부터 조선생님에 대한 말씀을 자주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인격을 믿고 어려운 부탁 말씀을 드리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며 자초지종을 털어 놓았다.  

다름이 아니라 남편의 군동기생들의 부인들끼리 친목도모로 모임을 가져오던 중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전속 발령을 받고 멀리가 있으나, 아이들 학교 교육 때문에 이사할 형편이 못 되어 아이들과 지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가끔 한 번씩 다녀가는 형편이라고 했다.  

그런데 친목회에 참석했다가 일시적으로 외간 남자들과 서로 어울리게 되었는데 마침 게임중에 잠간 파트너가 되었던 남자가 그녀의 집 근처에 사는 사람이었다.  

그 남자는 짓궂은 면이 있어 남편이 집에 잘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전화를 하거나 집에 찾아 오는 등 자꾸만 괴롭히는데 아무리 말려도 막을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 사실을 남편이 알게 되면 가정파탄은 물론이거니와 총살사건이 벌어질 것은 뻔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몇날 몇일을 고심하던 끝에 이 사람을 찾아왔다면서 친목회 부인들과도 의논을 해 봤지만 뚜렷한 대책이 없어서 이처럼 복잡하고 골치 아픈 일을 조용히 해결해 주실 분은 조 선생님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 오게 되었습니다며 도와 달라고 했다.  

그리하여 이 사람이 가서 연극을 하면서 그 못된 남자를 얼씬도 못하게 호통을 치고는 아무런 말썽없이 단념하게 한 사실이 있었다.  

한때 이 사람은 을지로에서 인쇄업을 하기도 했으며 시청 앞에서 복사기를 놓고 복사 겸 제본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종교계의 대정리 작업을 한 적이 있었는데, 신흥 종교에 관계가 있는 모씨가 전도관을 붕괴시키려는 목적으로 전도관을 비방하는 내용들로 보고서를 작성하여 그것을 하필이면 이 사람이 경영하는 복사기 집에 복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  

그래서 복사하러 온 아가씨에게 복사를 해 놓을테니 맡겨놓고 나중에 오라고 한 다음 내용을 다 검토한 뒤 똑 같은 것을 하나 더 복사하여 사람을 시켜 영모님께 보냈다.  

그 당시 전도관에서 이 사건을 해결한다고 하였지만 실제는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이었던 이 사람의 동기생 차모를 통하여 대통령에게 올라가는 서류 중 전도관에 대한 것을 빼버리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결정적으로 위급한 상황에서 이 사람은 이름없이 숨어서 해결하였지 드러나게 일을 해서 공을 차지한 적이 없었다.  

아현동에 매장을 두고 젊은 청년들을 고용하여 리어카와 자전거에 비닐로 짠 각종 방석을 포함하여 신앙촌 제품들을 판매하기도 했으며 또 일요일이면 의무적으로 모든 종업원들로 하여금 전도관에 나가게 하기도 했다.

또한 수십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공장도 경영해 봄으로써 다양하게 이긴자를 배출하는 연단을 받았던 것이다.

 이사람은 베이클라이트(합성수지) 공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그 당시 청계천 도매상에 물건을 조금씩 팔았는데 한 도매상에서는 절대 이사람 물건을 안 받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사람은 그 점포 옆에다가 점포를 얻어 공장도 가격으로 물건을 싸게 팔았다.  

그랬더니 얼마 안 있어 그 도매상이 망해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도매상이지만 그들도 이윤을 붙이고 팔아야 하는데 공장에서 직접 파는 가격에는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소문이 나자 각 도매상 주인들은 서로 이사람 물건을 달라며 이사람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하였다.  

한번은 고무공장을 했는데 기차표 고무와는 질도 떨어지고 해서 경쟁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큰 어려움없이 회사를 키울 수 있었다. 그러나 대개 사기를 당해 얼마 안 있어 빈털털이가 되곤 하였다.  

그리고 한때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무장으로 일하면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을 도와 법정에서 직접 변호함으로써 변호사도 놀랄 정도의 실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한때는 청운동 모 가정집에서 매주 수요일 일요일에 교인 30여 명을 모아 놓고 예배를 보았는데, 선천성 앉은뱅이 벙어리 소아마비 장님들을 고쳐주는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병을 고쳐줄 때에는 누가 고쳐 주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약속을 받고 고쳐주었던고로 소문이 나지 않게 은밀히 숨어서 역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이 사람은 어떻게 하면 전도관 진리를 국민 모두에게 알려서 하나님의 뜻을 속히 이를 수 있을까 하는 일념으로 차 있었다.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신 후 박근혜 양의 역할이 커짐에 따라 청운동 역사를 통하여 알게 된 박근혜 양의 비서실장이 박근혜 양을 도울 수 있는 스승을 구한다는 말을 듣고, 전도관 교인을 들여 보내려고 알아보다가 덕소 신앙촌의 홍교장 선생님의 따님이 숙대 교수로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분을 만나 간곡히 부탁하여 보았으나 승낙을 얻지 못하여 무산된 적도 있었다.  

이 홍교수에게 박근혜 양을 보좌해서 일해 주시고 또 박양의 아버지인 박대통령에게 암병이 있는데 이 사람이 책임지고 고쳐 주겠으니 이 사람에게 박대통령을 만나게만 해 달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 사람이 박대통령의 암을 고쳐주면 전도관 진리가 명실공히 전 국민에게 확산되고 튼튼히 뻗어 나가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홍교수에게 애원해도 홍교수는 높은 사람들의 자녀를 가르치는 것이 힘들다면서 끝내 사양하였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물색해 보았지만 마땅한 사람을 찾을 수 없어 그 계획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가 생긴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이 사람이 드러나서 일을 하면 이긴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중에 깨달은 것이지만 이와 같이 이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움직였지 언제 사사로움을 따라 움직여 본 적이 없었다.  

성경 말씀 가운데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대로 안 보이는 곳에서 희생과 정열을 하나님께 바쳤던 것이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